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 이어진 역사 탐방 순례길



2012년 6월24일 일요일 오전 10시24분
남한산성 성벽을 한 바퀴 걸어서 완주하기 위해 차를 내린 곳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 주차장이다.
아직 오전 시간이건만 옅은 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불볕 더위는 감당키 힘들다.
냉방이 잘 된 차에서 내린 직후부터 온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현재 해발고도는 대략 100m 남짓.
앞으로 4시간 반 정도를 해발 500m가까운 높이까지 오르내림을 반복해야하는 힘겨운 여정이 기다린다.





오전 10시31분
남한산성의 동문을 거쳐 관리사무소와 초등학교 등이 있는 성안 중심부를 거쳐
남문을 따라 성밖으로 다시 나가는 342번 지방도로는 이 지점에서부터 동문까지 구간에서
일방봍행 도로 두 가닥으로 잠시 나뉘어진다.
해발고도 200m 정도인 이 지점에서 도로를 따라 계속 오르면 남한산성 4대문 중 하나인 동문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돌조각공원을 둘러보고 돌아 오기 위해 우측 큰골을 따라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길로 잠시 접어든다.
이곳에서 남한산성 동쪽의 외성인 한봉성을 이루는 해발 515m 한봉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m 정도이다.





도로 입구에는 '돌조각공원' , '석탑공원' 등으로 안내 광고를 하는 곳이나
이곳은 큰골이라는 골짜기 주위로 밀집한 수많은 대형음식점들이 산재한 곳으로 돌조각이 있는 곳 또한
그네들의 사유지인듯 하다.





별로 볼품없고 예술적 가치 또한 없어보이는 수많은 돌조각들이 산재한 가운데
문제의 돌조각이 새겨진 장방형 돌이 10개 세워져 있고, 각각의 한쪽면 상단에 조각이 새겨져 있다.





적나라한 남녀의 정사 장면을 조각으로 새겨 놓은 것인데,
일반적인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모습인지라 작은 사진으로 만들어 이어 붙였다.

문제는 현재 인터넷상에서 10매의 이 사진을 크게 만들어 무분별하게 올려 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들은 이 조각상이 남한산성 내 망월사라는 사찰 경내에 있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 악의적인 장난으로 처음 이런 사진을 올렸을테고, 그를 본 무책임한 다수의 사람들이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 사진들을 퍼다 날랐을게다.
이 조각상들이 망월사 경내에 있다는 내용으로 글과 사진을 올린 이들이 속히 그 내용을 정정했으면 싶다.





오전 10시54분
조각공원을 다녀 온 후 다시 342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르막 길을 오른다.
다행스럽게도 울창한 나무숲이 이어지며 그늘을 만들어 준다.
도로를 따라 운행하는 차량의 행렬이 조금은 신경에 거슬리지만 잠깐 동안의 귀찮음은 이겨 내기로 한다.





오전 11시3분
오르막 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에 차 오를 때 쯤 나뭇가지 사이로 큰 성문이 나타난다.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나만의 문화재 탐방 길이 이제 곧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곳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년)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산성 4대문 중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성문으로 알려진 동문에는
"좌익문(左翼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 선조 때와 인조 2년(1624)에 수축(修築)하였으며 정조 3년(1799) 성곽을 개축한 후부터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문이 그러하듯 축조 양식은 홍예문이다.
특히 이곳 동문은 낮은 지대에 있어 성문을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우마차를 이용한 물자수송이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가까이 있는 동암문을 크게 만들어 우마차가 다니게 하였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 남한산성에 들리게 되면 4대문이나 중요 문화재만을 둘러보고
걷는 길은 성 내부의 평탄한 산책로나 숲길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나는 오늘 오로지 성벽을 따르는 길을 걸으며 문화유적 탐방을 하려 하기로 계획했다.
이제부터 북동쪽 끝에 자리한 동장대터까지 이어지는 오르막 길이 오늘 여정 중 가장 힘든 구간이 될게다.





오전 11시10분
성 안으로 들어와 동문 문루로 향하는 오르막 길을 오르며 오늘 성벽길 탐방이 시작된다.
오랜 가뭄으로 인해 먼지가 풀풀 나는 길. 온몸의 땀이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다.





동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이 문루의 형태는 남한산성 4대문이 모두 대동소이하다.
이곳의 성문 문루는 물론 성벽 위의 기와도 모두 우리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듯 하다.
기와에 새겨진 각인으로 보아 고령토로 유명한 경북 고령지방의 기와 생산업체 제품인듯 싶다.





동문을 지나면서부터 한동안 남동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성벽길은 계속 오르막 길이다.
경사가 급해 미끄러지기 쉬운 길에는 작은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아무튼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숨이 턱에 차 오르게한다.
더구나 아직 다리 근육도 덜 풀린 상태인지라 이날 탐방 구간 중 가장 힘들었던 구간이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쪽인 서쪽을 바라 본다.
남문을 지나 길게 동문 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일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4시간 후 성벽을 한 바퀴 돈 후 저곳을 거쳐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생각하니
4시간 후의 일이 막막해진다.
그러나 매주 산행을 하며 겪는 일이지만 이를 악물고 걷다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산성의 축조는 최대한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활용한듯 하다.
성벽 바깥쪽은 이처럼 거의 암반으로 된 낭떠러지 형태이다.
그 옛날 신라 문무왕 때부터 이 성벽을 축조하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를 생각하니
눈 시울이 붉어진다.





오전 11시16분
'송암정터(松岩亭址)'라는 안내 표지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성벽 바로 밖에 위치한 멋진 바위와 소나무를 바라본다.
안내 표지판의 문구를 그대로 옮겨 본다.

**송암정은 우리 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 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 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 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 부르는 소나무이다.





성벽 안쪽 숲에서는 그 죽은 기생을 슬퍼하듯 고개 숙인 야생화가 숙연하게 서 있다.
이곳 남한산성 성벽 주변에 유난히 많이 자라는 이 야생화의 이름은 "큰까치수염"이다.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 이 야생화는 한방에서는 식물체 전체를 진주채(珍珠菜)라는 약재로 쓰는데,
생리불순·백대하·이질·인후염·유방염·타박상·신경통에 효과가 있다.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해 축성된 성벽은 꼬불꼬불, 그리고 오르락 내리락 하며 이어진다.
더 이상 볼 수 없게된 위치에서 마지막으로 송암정터를 뒤돌아 본다.
황진이까지 등장하는 송암정터에 얽인 얘기는 조금은 황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멋진 바위와 어우러지는 소나무의 자태는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빼어난 경치임은 분명하다.





지난 해 가을 여름 더위 속에서 간직해 오던 싱싱한 푸르름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 후
추운 겨울 동안 눈 속에 갇혀 지내던 낙엽들이 성벽 그늘 아래 켜켜이 쌓여 있다.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듯한 푹신함을 느낀다.
나에게 이런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 저 낙엽들도 곧 닥쳐올 여름 장마를 지난 후에는
자신이 태어난 가지 많은 나무의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위해 희생할 준비를 이미 마쳤을게다.





낮 11시25분
남동쪽으로 향하던 성곽을 따르는 길은 이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성벽은 끊임없이 올라간다.
그나마 구름이 점점 짙어지며 햇빛을 조금은 가려줌이 고마울 따름이다.





오전 11시28분
남한산성 축성 때 팔도의 역승(役僧)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그 당시에 있던 9개 사찰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인 장경사 바로 아래 주차장 주변에는
너른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내가 머리 숙여 지나가야할 정도의 작은 암문이 있는 부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 한모금을 마신다.
암문 입구에는 남한산성의 16개 암문중 제1암문이라는 안내 표지석이 놓여 있다.





오전 11시34분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성벽을 따르는 오르막 길을 오른다.
돌로 쌓은 성벽은 겉으로 보기에도 무척 튼튼해 보인다.
더구나 바깥쪽으로는 이처럼 담쟁이 덩굴이 뒤덮다시피 자라고 있다.
이를 두고 '철옹성'이라 표현해도 될듯 싶다.





오전 11시44분
해발고도 420m 정도되는 지점의 제2암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동문에서 1.1km 떨어진 지점이며 앞으로 가야 할 동장대터까지 400m를 남겨둔 지점이다.
이 제 2암문에는 '장경사신지옹성 암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암문은 윗부분이 반원형인 홍예문이지만 이곳은 윗 부분이 "ㅡ"자인 평거식 문이다.





제2암문 밖으로 연결된 "장경사신지옹성"의 모습이다.
이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이다.
둘레가 159m 인 이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한다.





끝 없이 이어질듯한 오르막 길.
저 앞에 걸어가는 탐방객의 발걸음이 무척 무거워 보인다.
아마도 온통 땀에 젖어들어 힘들게 걸음을 옮기는 내 모습도 누군가 멀리서 바라보면 측은해 보이리라.
'以熱治熱(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처럼 땀 흘린 후 저녁에 집에 돌아가 샤워를 마친 후의 상쾌함을 누가 알겠는가?





오전 11시53분
처음 만나는 '군포지(軍舖址)'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군포(軍舖)" 란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을 뜻한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총 125개의 군포가 있었다 하나 현재 남은 곳은 한 곳도 없다.
당시의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토석(土石)벽을 둘린 건물이었다 한다.





오전 11시57분
해발고도 490m 정도 지점에 자리한 '동장대터(東將臺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땀을 씻어 낸다.
장대란 지휘,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에 있던 동장대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동장대터 바로 앞 성벽 부근에는 이와같은 훼손된 성벽이 보이고 그 앞에는
'남한산성 여장(女墻)'이라 표기된 안내 간판이 서 있다.
여장(女墻)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 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함이다.





낮 12시10분
동장대터까지 북향하여 이어지던 성곽 길은 동장대터를 지나며 방향을 바꾸어 서쪽을 향한다.
동문에서 1.7km를 지난 지점이니 이제 북문까지는 대략 1.2km 정도 남았다.
진행 방향 우측인 북쪽으로는 옅은 안개를 뚫고 그리 크지 않은 동네가 보인다.
아마도 남한산성 북쪽에 위치한 경기도 하남시 사창동쯤인듯 싶다.





이 부근 숲길에는 온통 이처럼 노란 미나리아재비가 거대한 군락을 이루며 피어 난다.
어린잎을 나물로 먹는 이 미나리아재비는 독성이 있으나
한방에서는 뿌리를 제외한 식물체 전부를 모랑(毛 )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간염으로 인한 황달을 치료하고 눈에 낀 백태를 제거한다.





낮 12시16분
한동안 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른 길은 해발고도 420m 내외를 유지하며
높낮이가 별로 없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여유가 생긴다.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채 성벽을 따르는 좁은 산길은 능선을 따라 꼬불꼬불 길게 이어진다.





고려 때의 이두 명칭은 견내리화(犬乃里花)·대각나리(大角那里)였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개나리불휘’로 수록되어 있는 참나리의 색깔이 유난히 붉다.
이 참나리는 폐결핵으로 인하여 기침을 심하게 하고 가래가 많으며 때로 각혈을 하는 증상,
그리고 기관지확장증으로 각혈이 있을 때에도 많이 쓰이던 야생화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발열이 되면서 기침이 잘 낫지 않는 만성해소에 긴요하게 활용된다고 전해진다.





낮 12시26분
이제 오늘 걸음을 시작한지 2 시간이 지났다.
긴장했던 다리 근육이 풀린 때문인지 1시간 전보다 걸음걸이가 훨씬 수월하다.
나처럼 홀로 탐방 길에 나선 이들을 마주치면 서로 격려의 말을 건네며 미소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럴 때면 피로감을 잠시 잊어버린다.





낮 12시42분
눈 앞에 큰 성문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팔작지붕 구조의 문루가 있는 걸 보니 북문에 도착한듯 하다.





동문과 마찬가지로 홍예문 구조인 북문 또한 성 안에서 바라보는 문루에는 현판이 없다.
팔작지붕 구조인 문루의 건축 양식도 동문과 차이가 거의 없다.





북문을 통과해 성 밖에서 바라 보면 문루에 "전승문(全勝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해발고도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으로, 이 문을 통해 세곡을 운반하였다 한다.
그런데, 안내 간판에는 "전승문(戰勝門)"이라 되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전투 중 최대의 참패를 잊지 않기 위해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하기도 하고,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고도 불렀다는데...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낮 12시54분
북문을 지나면서부터 이어지는 성곽 길은 북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울창한 숲으로 덮인 산 능선에 작은 성이 하나 보인다.
아마도 1km 남짓 떨어진 남한산성 북서쪽 끝에 위치한 연주봉옹성이 아닌가 싶다.





급한 마음에 망원렌즈로 가까이 당겨 본다.
마치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유럽의 이름 모를 작은나라를 찾은듯 싶다.
예쁜 공주가 잘 생긴 왕자를 만나 사랑을 키우는 그런 작은 성처럼 보인다.
한시 바삐 그 동화책 속으로 뛰어 들고 싶어진다.





오후 1시5분
연주봉옹성까지 200~300m 정도 남긴 지점을 오르며 뒤돌아 본다.
뒤돌아본다기 보다는 해발 465m 인 연주봉의 높이 때문에 오르막 경사를 오르느라 숨이 차서일게다.
멀리 우거진 녹음 사이로 지나온 능선길이 희미하나마 흰 줄로 보인다.





2km 남짓 떨어진 성벽 부분을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옅은 안개로 희미하게 보이긴 하지만 성벽의 윤곽이 뚜렷이 보인다.
아마도 동장대터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평탄한 구간의 성곽인듯 하다.
둘레가 8km 에 이르는 저 성곽에 의지해 병자호란 당시 적의 침입에 대비해 순찰을 도는
군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더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후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들의
항복을 주장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비통한 심정은?





오후 1시11분
개구부의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인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을 통과해 전망대로 향한다.
이 구간은 비교적 최근에 보수를 마친듯 마치 서을 시내 어느 고궁의 산책로를 걷는 느낌으로 다가 온다.





오후 1시13분
연주봉옹성의 최북단 전망대에 오른다.
이곳은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됨은 물론 성 내부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 조사 결과 이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한다. 이 연주봉 옹성의 둘레는 315m이다.





옹성 북단에서 북쪽을 조망한다.
안개 때문에 해발 321m 금암산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만이 분명히 보이고
우측으로 하남시 항동 부근은 희미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금암산 너머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도 뚜렷이 보일만한 위치이다.





오후 1시17분
연주봉옹성을 벗어나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자리 한 서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길을 오르내리기 힘든 이들은
성곽 아래를 따라 이어지는 비교적 평탄하고 편안한 숲길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나 자신 오늘은 오로지 성곽을 따라 걷기로 다짐한 터인지라 조금 힘들지만 참아 보기로 한다.





오후 1시18분
"매탄터(埋炭處)"라는 안내 표지석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표지석의 글귀는 아래와 같다.

[서문에서 북동쪽 능선 방향에 있는 이 곳은 매탄터(처)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중간 부분에는 지름 5m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있는데
아마도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목탄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숯도 산성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물품 중 하나였는데,
‘남한지’에는 숯을 묻는 것이 94곳에 24,192석이라 하였고,
천주사 별관에서부터 북장대까지 묻은 위치와 양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매탄처 바로 아래 성벽 끝에는 작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어 북서쪽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다.
서울시 송파구 외곽 지역인 거여동,마천동 부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좁은 우리 국토를 황폐화 시키는 주범인 골프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국토의 70%에 가까운 면적이 산악지역인 우리나라 지형상 골프장 건설은 나라가 망하는 첩경임을 왜 모르는가?
그로 인해 개나 소나 "공 치러 간다!"면서 골프장을 다닌다.
입으로는 "반미(反美),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등을 외치면서
왜 몸으로는 그네들 유목민들의 잔재인 골프에 열광하는가?





오후 1시20분
눈 앞으로 오늘 세번 째 만나는 남한산성의 또 다른 대문 하나가 보인다.
외형상으로는 동문,북문과 거의 유사하다.
많은 예산을 들여 복원을 하면서 좀 더 철저한 고증에 의해 조금은 다른 특징을 부각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홍예식으로 만들어진 성문 밖으로 나가 서문을 바라본다. 현판의 글씨는 "右翼門(우익문)"이다.
남한산성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 해발 450m 지점에 자리 한 이 서문은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으로 많은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또한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한다.





서문 바로 옆 숲 속에서 주황색 꽃 한 송이를 발견한다.
오늘 성곽 탐방 중 처음으로 만난 꽃임은 물론 이곳에서도 단 한 송이만 피어난 모습이 외롭게 보인다.
통상 7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이 원추리꽃이 활짝 핀걸 보면 금년 여름이 일찍 시작된 것을 실감한다.
원추리는 봄철 어린순을 나물로 먹고, 꽃을 중국요리에 사용하며 뿌리를 이뇨·지혈·소염제로 쓴다.





오후 1시34분
서문을 지나면서 성벽은 이제 남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서문에서 0.6km 떨어진 수어장대(守禦將臺)에 도착했다.
이곳은 유난히 인파로 붐빈다. 나처럼 성곽을 따라 탐방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남문과 수어장대 등 남한산성 내의 몇몇 곳만 둘러 보기위한 관광객들이 이 부근에 많기 때문이다.





수어장대가 자리 한 작은 경내에는 수어장대,청량당 등 몇몇 건물 외에 무망루(無忘樓)도 있다.
이 무망루는 당초 1751년(영조 27년) 증축한 수어장대 내부의 2층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었다.
그 후 1989년에 지금 이 전각을 새로 건립하고 현판을 새로 만든 것이다.

무망루(無忘樓)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무망루 바로 옆 공터에는 '매바위'라는 이름이 붙은 이처럼 큰 바위가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귀는 "守禦西臺(수어서대)"이다.
많은 이들이 남한산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바위의 글귀를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무책임하게 표현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이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일게다.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이곳이다.
지금은 그냥 이곳을 '수어장대'로 표현하지만 이곳은 최초 4개의 수어장대 중 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매바위에는 당시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였던 이회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얘기가 전해 진다.
이회가 죽은 후 매 한마리가 이 바위 위에 날아와 앉아 이회의 누명을 벗겨준다.
그로 인해 이 바위의 이름이 매바위로 불리어진다.





이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 기둥이고,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는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의 수어장대를 유심히 살펴본 후 수어장대를 떠나
남한산성의 남은 한 개 대문인 남문쪽으로 성곽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오후 1시45분
수어장대를 떠나 남문으로 향하는 성곽은 방향이 남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문과 서문 부근이 일반 관광객이 많은 구간이어서인지 성벽을 따르는 길을 걷기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산행을 주로하는 나로서는 가장 싫어하는 길이 계단 길이다.
가급적 계단을 따르지 않고 맨 땅을 밟으며 걷는다.





오후 2시3분
외관상으로는 지금까지 거쳐온 동문,북문,서문과 구별이 되지 않는 남문이 눈 앞에 나타난다.
이제 오늘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걷는 역사 탐방도 거의 끝난다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다.





성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가 남문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 본다.
해발 고도 370m에 위치한 남문의 현판에는 지화문(至和門)이라 씌어 있다.
이 남문은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곳이라 한다.

인조는 1636년 음력 12월 14일 한밤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너 새벽에 이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 들어갔다.
세자와 신하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그곳에서 딱 46박 47일간 머물며 스스로 ‘독 안의 쥐’가 되었다.
청나라 12만 군대는 남한산성을 겹겹이 둘러싼 채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렸다.
당시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남문 밖 보호수는 오랜 세월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부러진 가지를 부목에 의지하고 있다.
수령 350년으로 추정되는 이 느티나무는 1626년(인조 4년) 성곽 준공시 성곽 사면 토양 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호수가 뿌리 내린 장소의 현재 행정구역상 지번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산132-2번지이다.





오후 2시6분
3시간 여 전 동문에서부터 시작된 성곽을 따르는 탐방길은 성곽 안쪽을 따라 걸어온 길이었다.
잠시나마 성곽 바깥쪽 벽을 따라 걸어보기로 하고 성벽 바깥쪽의 숲길을 따라 길을 이어간다.





철저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벽이어서인지
바깥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내부에서 보던 때와는 그 느낌부터가 다르다.
수직으로 솟은 저 성벽을 넘어 내부로 침투하기가 수월치 않아 보인다.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최적의 장소인듯 싶다.





성벽 안쪽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반해 바깥쪽은 너무나 한적하다.
숲길도 자연 그대로 보존된 상태이어서인지 귀여운 다람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3시간 이상을 걷느라 다리는 피곤하지만 마음이 무척 편안해 지는 구간이다.





오후 2시15분
처음 출발했던 동문까지 1.3km 정도 남긴 지점에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큰
남한산성 16개의 암문 중 하나를 통과해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오후 2시24분
동문까지 1km남짓 남은 지점의 남장대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한다.
남한산성 축조시 만들어졌던 5개의 장대 중 서문 부근의 수어장대만 현존하고 나머지는 그 흔적조차 없다.
사진에서 보는 것은 남장대터 바로 앞의 제2남옹성치(第二南甕城雉)이다.

치(雉)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 중의 하나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성곽 주변 길 중 남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다.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홀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사람들 뿐이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지난다.
오늘 처음으로 기와 보수하는 공사 현장을 지난다. 안전에 대한 당부 인사를 하고 땀 흘리는 그들 곁을 지난다.





오후 2시33분
이제 처음 출발한 동문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600m 정도.
멀리 산 아래로 오전에 걸음을 시작한 검복리 주차장 부근이 눈에 들어 온다.
이제부터는 비교적 경사가 급한 내리막 길이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힘들게 계단을 오르는 저 탐방객과 서로 인사를 건네며 스쳐 지난다.





계단 아래 풀섶에는 작은 흰꽃이 모여 피는 큰까치수염이 군락을 이룬다.
그 가장자리에서 코스모스가 외롭게 피어난다.
금년 들어 처음 만나는 코스모스를 보니 반가우면서도 한편 본격적인 여름이 이제 막 시작인데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라니?
계절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혼란스럽다.
이런 혼돈(caos) 을 잠재우는 것이 그와 대립된 질서인 코스모스(cosmos)가 아니던가?





오후 2시38분
눈 아래로 멀리 동문에서부터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성곽길 순례가 거의 끝났음을 의미한다.
녹음 우거진 산 중턱에 희미하게 사찰 건물이 보인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찰 부근을 망원렌즈로 자세히 살펴 본다.
망월사 대웅보전과 그 옆의 흰색 탑이 보인다.
망월사(望月寺)는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 태조(太祖)가 한양에 도읍을 세울 때
서울의 장의사(莊義寺)를 헐은 뒤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 금솥 등을 이 절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있었던 9개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었다 한다.





오후 2시42분
제 11암문인 동암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곳은 남한산성에 있는 16개의 암문 중 가장 크다. 폭 2.86m, 높이 3.07m
동문에는 계단이 있어 우마차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동문과 가까운 이 동암문을 크게 만들어
우마차 통행이 가능케한듯 싶다.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때 희생당한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벼려진 곳으로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으로 시구문(屍軀門)이다. 서울의 광희문,서소문 처럼 시체를 버리는 문이다.

성문 바깥에 작은 돌비석이 놓여 있다. 비문에 새겨진 글귀는 아래와 같다.
[시구문
이곳은 신유(1801), 기해(1839), 병인(1866) 박해를 통해서
순교자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로) 등 300 여분의 시신이 버려진 곳이다.]





오후 2시44분
동문에서 시작된 남한산성 성곽을 따르는 탐방을 끝내고 다시 342번 지방도로에 발을 디딘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물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동문교를 건너 검복리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후 3시3분
4시간 40분 전 떠났던 검복리 주차장에 도착하며 오늘 남한산성 성곽길 탐방을 끝낸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거의 말라버린 논을 보니 슬퍼진다.
400여년 전 병자호란으로 인해 우리나라 임금이 오랑캐들에게 무릎 꿇은 역사의 현장에서
가뭄으로 메말라가는 논을 보니 슬픔이 배가된다.
항상 좋은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픈 마음을 수어장대 옆 전각인 '무망루(無忘樓)'의 뜻을 생각하며 달랜다.
또 다른 아픈 역사인 6.25 를 하루 앞둔 날을 의미있게 보낸 하루를 마감하고 귀가 길에 오른다.





위 지도상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구간이 이 날 걸었던 남한산성 성벽을 따르는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