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0시경 무덤의 전설(The Legend of Tombs)라는 타이틀로 열리고 있는 고령 대가야축제장의
모습은 경상북도 고령군이라는 산골 마을의 정치를 느낄 수 있는 아늑하고 차분한 분위기였습니다.
축제의 주무대인 대가야박물관 [大伽倻博物館, Daegaya Museum]은 2000년 9월 개관한 대가야왕릉전시관과
2005년 4월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의 첫 발굴조사는 1906년 일본인 세키노(關野貞)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이 지난 후 1977년부터 경북대와 계명대 박물관에서 고분을 발굴하면서, 고분의 성격 일부가
밝혀져 대가야에 대한 역사 연구가 활발해 졌는데,
이곳에서 금동관을 비롯해 금.은.옥 장신구류와 무구(갑옷, 대도 등) 및 마구류(등자, 행엽 등)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초기 6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뒤를 이어 멸망할 때까지 맹주의 역할을 했던 대가야(56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서 멸망)의
발달된 문화 수준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또한 순장제도를 실증적으로 밝히는데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이기도 합니다.
1993년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왕릉전시관 내부 모습입니다.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고분군 제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관람객들이 실물크기로 만든 모형 44호분 속에 직접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껴묻거리([副葬品:부장품]:죽은 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건) 의 종류와 성격 등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 거대한 무덤들의 집합체를 말합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성(主山城)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가지 능선에 걸쳐 넓게 퍼져 있습니다.
주산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습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뿐만 아니라 가야지역 전체에서도 가장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써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더구나 경상북도 고령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행사인데다
축제의 역사도 몇년밖에 되지 않은 탓인지 다른 축제장에 비해 인파에 치여 몸살을 앓는 번거로움 없이 쾌적하게
축제 현장을 지키고 즐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람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집니다.
축제장을 찾은 행락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장승을 조각하고 있는 있는 장인의 모습.
그 진지한 모습과 숙달된 손놀림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과 함께 존경심을 나타냅니다.
가야의 역사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공연이 하루 몇 차례 열립니다. 공연 내용 중 신라,백제 등 주변 강국들과의
전투장면 재현 모습입니다.
가야는 기원 전후한 무렵, 한반도 남부의 낙동강 유역의 부족연맹에서 출발합니다.
3세기 무렵 당시 한반도 남부지방 마한, 진한, 변한에는 각각 54개·12개·12개의 소국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야는 이 삼한 중 변한 지역에서 성립하였는데, 주로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 지금의 마산 및 진해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연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연맹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독립적인 정치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철기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소국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으며. 철기보급의 증가, 군사력의 발달은
소국들 사이의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세력이 강해진 소국이 주변의 약한 소국을 제압하면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갑니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변한지역 에서는 이들 소국들이 결집된 연맹체 전체가 `가야`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연맹 체제에 속한 소국들도 각각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소가야(고성), 성산가야(성주), 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축제장 한켠으로는 작고 아담한 연못 주위로 정자와 산책로 등이 마련되어 피곤한 다리를 쉬게하고,
눈의 피로를 풀게 해주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년 후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이 연못 주위가 세월의
이끼를 머금고 내 마음을 더욱 편케 해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남쪽지방으로는 이제 벚꽃을 비롯한 봄 꽃들이 거의 지고, 연록색의 나뭇잎으로 바뀌는 시기이건만
가야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곳은 봄이 더디 오는 모양입니다. 벚꽃을 비롯한 각종 봄꽃들이 한창 무르익은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냅니다.
맛있는 딸기를 포식하기 위해 딸기체험장으로 향하느 중 잠깐 들린 '산림녹화기념숲'의 읿부 모습입니다.
이번 대가야축제행사 개막과 함께 처음 문을 연 곳인데도 비교적 잘 정돈되고 정성을 들여 만든 모습이 엿보였습니다.
고령 군민들의 훌륭한 휴식처가 될만한 훌륭한 쉼터로 자리잡기 바랍니다.
비닐하우스 안의 딸기 밭 사이를 지나며 잘 익은 딸기를 마음껏 포식하는 딸기체험행사는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농약을 쓰지 않은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딸기인지라 직접 따서 입에 넣기가 바빴습니다.
이렇게 달고 맛있고, 싱싱한 딸기를 마음껏 먹어본게 언제 이던가? 배가 부르도록 먹었습니다.
간간히 청개구리도 뛰어다니고.. 상상이 가십니까? 그리고,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지 않으십니까?
딸기는 비타민이 100g중에 80mg으로 레몬의 두 배, 사과의 10배나 되어 과일 중에서 비타민C가 가장 많고,
신맛을 내는 유기산이 0.6~1.5% 함유되어 있다 합니다. 끝 부분이 가장 달고, 꼭지부분으로 갈수록 과당이 떨어집니다.
딸기 3~4개(약 70g정도)이면 성인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비타민 섭취량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갈아서 쥬스를 만들어도 80~83% 정도까지 남아있는 것이 딸기입니다.
대가야축제장에서 딸기밭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가는 도중 군청 직원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하나씩 건네받은 바구니에 한가득 딸기를 골라 담은 사람들의 행복감. 아마 휴일 하루를 가장 행복하게
보낸 사람들이겠지요.
딸기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로 석기시대부터 식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유럽은 중세시기부터 산딸기가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15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남아메리카의 장딸기가 유럽으로 도입되었습니다.
18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현대 딸기의 원조가 되는 '프라가리아 아나나사(Fragaria ananassa)'를 만들어 내었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재배하는 '프라가리아 버지니아(Fragaria veaca)'와
'프라가리아 칠로엔시스(Fragaria chiloensis)'의 교잡(交雜)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20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합니다.
일본은 미국, 프랑스, 영국 등에서 19세기 말부터 딸기를 도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딸기로 배를 채운 후 들린 우륵박물관 전경입니다.
가야금을 창제한 악성 우륵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수집/ 보존/전시하여 국민들이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우륵과 가야금」 테마박물관입니다.
천 오백 여 년 전 우륵이 살았던 대가야의 주변정세와 문화를 소개하여 고령과 대가야, 우륵과 가야금의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 고유의 악기를 소개하고 가야금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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