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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古刹) 해인사(海印寺). 080412.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로 들어가는 산문 입구에 이르는 길 양편으로는 예상치 못했던 만개한 벚꽃이
절정을 이루어 해발 1400여 미터네 달하는 가야산 자락으로 향하는 동안 고도 차이로 멍멍해진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는듯했습니다.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3년(802년) 10월16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해인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자리잡은 해인사 성보박물관 모습입니다.

최근들어 전국 유명 사찰에서 성보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듯합니다.
옛것을 배워 새롭게 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주제로 조성되었다는 해인사성보박물관은
실내 전시공간과 유물 수장고, 학예실, 세미나실, 대장경 인경 체험실, 괘불 전시실 등을 갖춘
종합적 성격의 사찰박물관으로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MBC미술센터가 고고 유물중심 박물관을 시공한 2번 째 사례라고 자화자찬을 늘어 놓기는 하나
건물의 외양이 빼어난 경관을 가진 가야산의 경관이나 천년고찰이라는 해인사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졌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제 눈에도 허접한 싸구려 건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야산입구에서 해인사를 거쳐 집단시설지구까지 이어지는 10리길의 피로를 씻어주는 홍류동 계곡입니다.
좌측의 매화산 우측의 가야산을 구분하듯 맑은 물이 힘차게 흘러 내립니다.

갈수기인 요즘에도 다른 산 자락에 비해서는 비교적 흐르는 물이 많은 편이니 여름철에는 땀을 씻는 길손들에게
오아시스같은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찰과 비교하면 주차장에서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여정이 상당히 긴 것 또한 해인사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울창한 숲과 계곡 물을 따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야트막한 로르막 산책로를 따라가다보면
마음은 더욱 맑아 지는듯합니다.


10여분 이상을 산림욕을 즐기며 이마의 땀방울을 훔칠 즈음이면 눈 앞에 해인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기 802년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자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해인사를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습니다.


큰 바위에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각인을 해 두었습니다.

해인사는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 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이라
불리웁니다.
여기서 삼보 사찰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세가지의 보물 즉佛, 法 僧을각각 대표하는 사찰을 뜻하는 것이며,
해인사가 법보 사찰이 된 것은 바로 대장경 때문입니다.
불가에서 법이란 곧 불경이고, 국내 최대불경인 대장경이 이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곳 해인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조계종 종합수도도량인 해인총림(海印叢林)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총림은 강원과 선원·율원·염불당·종무원 등을 갖춘 종합수련원으로, 1967년 해인총림이 가장 먼저 설립되었으며
초대 방장은 성철 스님이었습니다.

방장[方丈]이란 총림의 최고 책임자의 명칭입니다. 해인총림에서 상시 수련에 열중하는 스님 숫자는 약 500에 달한다고 합니다.



대적광전 옆 구광루 앞에 그려져 있는 해인도를 따라 돌며 소원을 비는 이들에게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의상스님이 도안했다는 해인도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는 오묘한 도안으로, 합장하고 한 바퀴 돌면 큰 공덕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침 이 날이 호국팔만대장경법회 봉행행사를 거행했던 날인지라 낮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역력합니다.

해인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연유된 이름입니다.
우리들 마음의 바다에는 번뇌라는물결이 일고 있는 데 이는지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 어리석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잔잔해지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무한한 시간과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명백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부처님의깨달음이고,중생들이 귀의해야할참된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 어느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으나, 사찰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교회나 성당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씩 배우다 보면 그 분들의 고귀한 사상에 항상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해인사의 본당인 대적광전 앞에 한쪽으로 치우쳐 서 있는 3층 석탑이 무척 외로워 보입니다.
몇가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지라 좀 부산스러운 경내입니다.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이 본당인 점으로도 해인사가화엄종의 이념을 추구하는 사찰이라는 것을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웅전"과 "대적광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웅전 [大雄殿]은 불교의 선종 계통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곳입니다.


‘대웅(大雄)’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였다 합니다.

반면 대적광전[海印寺大寂光殿]은 석가모니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는 곳입니다.

화엄종 최고의 부처는 비로자나불이이므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본당을대적광전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사찰에서는 그 사찰의 본당인 대웅전(또는 대웅보전)이나 대적광전이 가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으나
이곳 해인사는 팔판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는데,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1011년에 시작하여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몽고군의 방화로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5년 뒤인 1236년에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16년에 걸쳐 81,340 여장 고려대장경을 완성하였습니다.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 장경판수가 팔만 여장에 이르는 데서 비롯되기도 했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장경판전은 과학적인 건물배치와 통풍구조 등으로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팔만대장경을 원본의 모습으로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 경문을 새겼다고 합니다.
글자를 한자씩 새겨 넣은 선현들의 숨결이 느껴지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