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27일 일요일 오전 충남 아산시 영치면(靈峙面) 백암리(白岩里)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무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인 현충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습니다.
마침 이충무공의 탄신일을 맞아 며칠 전부터 오는 말일까지 축제기간인지라 오전 시간임에도 현충사 진입로는 차량들로 조금씩 붐비는 모습이었습니다.
전날 기상청의 예보에 의하면 맑고 따뜻한 날씨를 기대했건만 오보(誤報)를 밥먹듯하는 기상청의 명성은 변함없었습니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쌀쌀한 기운을 느끼는건 저 혼자만이 아닌것 같았습니다.
현충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깨끗하게 단장된 진입로, 그리고 넓고 아늑한 잔디 광장을 대하면서 쌀쌀한 날씨에 움츠러 들었던
어깨가 조금 펴 지는듯했습니다.
문득 이곳 현충사에 보관중인 보물제326-1호 장검의 칼날에 새겨진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어지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글귀가 생각 났습니다.
그 장검은 이순신의 유품 가운데 전쟁 중에서 직접 사용했던 장검으로써 길이 197.5㎝이며,
당시의 명수로 이름난 태귀련과 이무생에 의해 임진왜란 중인 1594년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충사의 정문인 충무문(忠武門)입니다. 현충사 경내·외를 구분하는 외삼문(外三門)이라는 곳으로
1967년 4월에 지은 한식 맞배집 콘크리트건물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21살 때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였습니다..
따라서 처가집이 자연스럽게 충무공의 본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 건천동(현재의 인현동)에서 태어난 충무공이 결혼 후 32세때인 1576년 (병자, 선조 9년) 2월에
식년 무과 병과 4등으로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 이곳 현충사 자리이며 이곳 현충사 경내의 활터 옆에
충무공이 사시던 고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충무문을 지나 석재로 잘 다듬어진 진입로를 잠시 걸어 올라가면 나타나는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이란 궁전,관아,능(陵),원(園),묘(廟),사당(祠堂)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으로 사당의 경내를 표시하며 그 경건성을 유지하기 위한 성역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민간에서는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 등으로 표창받는 경우에 사는집 입로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홍살문은 다른 말로는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통상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을 넣습니다.
현충사 홍살문은 일제시대 사당 재건 당시의 정성어린 민족의 성의를 길이 보존하고자 경내가 확장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본전 건립당시의 위치에 현재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의문은 본전의 정문을 말하며 내삼문(內三門)이라고도 부릅니다.
1932년 구본전 중건시 건립되었는데 1968년 현충사 성역화 공사로 현재와 같이 확장 개축된 것입니다.
1967년4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자앙문(自仰門)이라는 額書를 휘호하였으나 후에 충의문(忠義門)으로 바뀌었다 합니다.
현충사의 현재 면적은 16만 3096평이고 주요시설로는 본전, 구 본전, 유물관, 고택, 활터, 홍살문, 정려,
이순신 장군의 아들인 이면의 묘소가 있으며. 이순신장군 묘는 현재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습니다.
현재 현충사의 본전으로 1967년 5월 24일 본래의 사당(구본전) 위편에 총 건평 63.1평의 순한국식 사당을 준공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충무공의 표준 영정으로 공식 지정된 영정이 모셔진 곳입니다.
4월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거행될 행사 준비 관계로 내부 출입이 통제되어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본전에서 유물전시관으로 향하는 중간에 만들어 놓은 등나무길입니다.
충무문,홍살문,충의문등을 거치는 동안 피로해진 방문객들의 피로를 푸러줄 정도의 운치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아마도 잠시나마 더위를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구본전 (舊本殿) 모습입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최초의 현충사 사당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종손(13대 종손 李種玉)의 가산이 쇠진되어 채무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일은행·호서은행등 채권자들의 의 경매에 따라 충무공 묘소 임야와 위토(位土)마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하게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 소식이 1931년 5월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뜻 있는 인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하게되어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화백이 그린
영정 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하였으며 아울러 사진 우측 하단부에 보이는 현충사 사적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유물관 (遺物館)입니다.
현충사 유물관은 1962년 4월 최초 건립 후 세번에 걸쳐 이전, 재건축 등의 과정을 거쳐 1974년 4월에
전통조경에 알맞도록 한식 청기와 건물로 개조하고 외부 단청을 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곳입니다.
현재 유물관에는 국보 76호 9점(난중일기 7권,임진장초 1권,서간첩 1권)과 보물 326호 6점(장검 2병, 요대 1구, 옥로 1점
도배 1쌍) 및 비지정 유물을 포함하여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현충사 방문에서 크게 아쉬운 점은 혼자만의 여정이 아닌 많은 인원의 단체 여정인 점이었습니다.
어느곳을 가든지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역사 탐구인 저에게 있어서 인물 촬영이나 외형적 아름다움 위주로
나들이를 하는 일행들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융화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긴 하지만, 큰 아쉬움입니다.
일명 연지(蓮池)로 불리는 현충사 경내에 있는 연못입니다.
1972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인공으로 축조된 것으로 비단잉어와 돌다리 등이
경내의 조경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는 현충사 관리소 측의 부연 설명입니다.
돌다리 위쪽에 있는 연못은 700평이며, 아래쪽에 있는 연못은 1,000평 크기 라고 합니다.
연못 주의의 아름다운 산책로 풍경입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뒤로 하고 현충사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유물전시관 내의 거북선 모형, 《난중일기(亂中日記)》 서간첩(書簡帖) 및 《임진장초(壬辰狀草)》, 장검(長劍),
무과급제 교지, 사부유서(賜符諭書), 증시교지(贈諡敎旨), 옥로(玉鷺), 도배(桃盃), 요대(腰帶) 등과 각종 무기를 둘러보지 못하고,
또한 고택, 활터, 이순신 장군의 아들인 이면의 묘소 등도 다 불러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한 가지 다짐을 합니다.
앞으로는 평소 나의 취향대로 나홀로 여행만을 하리라...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가지며, 역사 탐구에 그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는데 열중하리라...
'기본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이섬과 두물머리 여행기 (0) | 2008.05.18 |
---|---|
보성 녹차밭과 율포 해변 (1) | 2008.05.06 |
바위섬 해금강과 외도 Botania(식물의 낙원) (0) | 2008.04.23 |
천년 고찰(古刹) 해인사(海印寺). 080412. (0) | 2008.04.17 |
대가야 축제와 딸기 체험.080412 (0) | 2008.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