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은 모두 비슷한가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심심찮게 보도되는 공중전화나 부스를 파손행위가 일본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모양이다.
수상한 사람 발견시 경찰이나 NTT(우리나라의 KT와 유사한 통신회사)로 연락 달라는 문구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내가 묵었던 호텔 바로 옆 오사카 시립 유치원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담 밑으로 자그마한 화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런 모습이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오전 9시 3분.
아침 식사 후 호텔을 떠나 나라(奈良)의 도다이샤(東大寺)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1,200 여마리의 사슴을 방목하는 사슴목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슴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입구의 일본식 과자인 '셈베'를 100엔에 사서 들고 있으면 어느새 사슴들이 떼 지어 몰려든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면 사슴들이 거의 생기가 없는듯하고, 털에도 윤기가 없다. 육골분 사료를 먹은 영국 소들이 대거 광우병에 걸렸듯이 푸른 초원에서 싱싱한 풀을 뜯어 먹어야 할 사슴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셈베에 맛을 들인 불행한 산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대사 (東大寺)는 일본불교 화엄종(華嚴宗)의 대본산이며 일본말로는 '도다이샤'라고 부른다. 남도(南都) 7대사찰의 하나이이며 서기 745년 쇼무(聖武)천황의 명령으로 로벤(良弁)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본존불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로 앉은 키가 16m, 얼굴 길이만도 5m나 되는 엄청나게 큰 불상이라서 속칭 '나라 대불(大佛)'이라고도 한다.
일본인이 창건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이 최근 문헌을 통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실제로는 이 절 짓기에 백제계의 행기와 양변 스님이 앞장섰고 백제·신라계의 건축가들이 그들을 뒷받침 했다는 것이 진실인 것 같다.
이제 축소지향의 일본인들이 볼품없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어 놓은 동대사의 출입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한다.
볼품없이 크기만한 동대사 출입문 문턱의 양쪽에 이렇게 동판을 덧대어 놓았다. 아마도 건물 색깔과 맞춰 놓은듯도 하다. 그러나 오랜 시일 지나며 나무가 닳아 연륜을 내비치는 우리나라의 일반 유적지의 모습에 비해 인위적인 색채가 너무 강해 보인다.
검은색 옷에 주황색 장식을 덧댄 동대사 스님들의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에 칠해진 붉은색의 화려함, 그리고 스님 복색의 화려함에서 마음 속에 간직했던 고 사찰을 찾았다는 경건함이 슬그머니 멀어지는듯하여 조금 아쉽다.
이곳 동대사의 중심인 대불전, 즉 금당(金堂)의 모습이다. 745년에 쇼무왕[聖武王]의 발원으로 로벤[良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그 후 수많은 내전을 겪으며 반파 또는 전파된다. 그 후 에도[江戶]시대인 1709년에 다시 수리 복원된다.
다만 크기가 창건 당시의 3분의 2크기로 축소된채로. 메이지 시대인
현재 동대사측의 주장으로는 높이 47.5m나 되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화엄종에 근거하여 만들어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심으로해서 대웅전 대신 대적광전이 사찰의 본전인 우리나라 해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대사의 주불도 비로자나불이다.
구리 74만 근으로 만든 불상으로 앉은 키 15미터. 얼굴 길이가 5미터나 되어 속칭 대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의 이름은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다. 15미터 짜리 불상은 중국의 운강석굴(雲岡石窟, 14-16미터), 용문석굴(龍門石窟, 17미터)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 큰 절과 불상은 만들어진 지 1백년이 지난 855년 2월 지진과 화재로 파괴된다. 바닥에 나뒹굴던 불상의 머리 부분은 6년 후인 861년에야 다시 제 자리에 올려 질 수 있었다.
대불은 불체(佛體) 자체와 대좌(臺座)가 창건 당시의 것이지만 양손과 머리 부분은 당시의 것이 아니고 후세에 계속 보수된 것이다.
참고로 역사학자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 입구에는 이처럼 우리나라의 약수터와 비슷한 시설들이 거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달리 극히 일부 “마실 수 있음”이라고 표기된 곳을 제외하고는 물 마시는 곳이 아니다. 손을 깨끗이 씻어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오른손으로 바가지 물을 떠서 왼손을 씻고, 왼손으로 물을 떠서 오른 손을 씻는 것이다.
동대사 경내에 있는 이월당 모습. 이월당 우측에 삼월당이 있다.
양변 스님은 나라땅에서 백제 스님 의연승정(義淵僧正·728년 열반) 문하에서 수학해 큰 승려가 된 분이다. 양변 스님은 당초 나라의 가스가산(春日山) 기슭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속명인 ‘금종’을 따서 곤슈지라고 불렀다. 이 곤슈지의 터가 현재 도다이지 경내에 있는 ‘이월당’(二月堂) 자리이다. 양변 스님이 다이안지에 와 있던 신라 학승 심상대덕을 모셔다 만든 강원(講院) 자리는 그 이웃에 있는 지금의 ‘삼월당’(三月堂)이다. 심상대덕은 신라 부석사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제자였다고 본다. 심상대덕은 화엄종을 펴기 위해 일본 다이안지로 건너갔던 학승이다. 심상대덕에 의해 신라 화엄종의 ‘비로자나부처님’이 된 도다이샤의 거대한 금동불상을 건조한 지도자는 백제인 고승 행기 스님이다. 쇼무천황(성무왕·724∼749 재위)이 행기 스님에게 비로자나대불을 만드는 데 협조해 주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동대사가 있는 나라를 떠나 청수사 (기요미즈데라,淸水寺) 가 있는 쿄토로 향하던 중 차량 안에서 찍은 담배가게 모습이다. 간판에 아예 ‘담배가게’라고 써 놓았다. 일본에서는 이런 가게를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는 외국제 담배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지만 외국인에 대해 극히 배타적인 일본인들답게 일반 편의점이나 길거리 담배 자판기에서는 외국산 담배는 한 두가지만 진열해 놓고 있었다. 물론 손님이 요구하면 보관된 걸 판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교토시내에 있는 헤이안진구(平安神宮) 경내 모습이다.
1895년, 헤이안천도 1100년을 기념하여 창건한 것으로, 헤이안교(平安京-794년)의 궁전을 8분의 5로 축소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헤이안진구는 간무 천황이 천도 1100년제를 기념하여 창건한 신궁으로 이후 헤이안시대 최후의 천황인 고메이 천황을 합사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관광지나 유명 사찰등에서도 요즘 흔히 눈에 띄는 모습이다. 가족의 건강, 자신의 소망 등을 적어 이곳에 걸어 놓으며 마음 가짐을 단단히 가질 수도 있으리라. 대부분 일본어로 씌어 있으나 간혹 영어와 중국어도 눈에 띈다. 한국어는 일본어 다음으로 많은 것 같다.
어디서나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 수많은 한국관광객들이 오랜 시간 들여다 보는 곳이 있기에 확인해 보니 바로 이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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