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4일 토요일 낮 1시 50분.
34년 전인 1974년 여름 울릉도행 여정에 잠시 들렀던 희방사를 다시 찾기 위해 먼저 죽령휴게소를 찾아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죽령 [竹嶺]이라 함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大崗面)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689m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과거 그토록 번성하던 이곳 죽령 휴게소가 최근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이제는 젊은이들이 도회로 떠난 우리네 농촌마냥 한가한 곳으로 변했다.
그나마 이날은 주말인데다 이날부터 시작된 소백산 철쭉축제 때문에 그나마 사람 냄새가 좀 더 진하게 나는듯도 하다.
이곳 휴게소 정면의 돌에 새긴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고개를 넘다가 하도 힘들어 짚고 가던 대나무 지팡이를 꽂아놓고 갔는데
이것이 살아나 죽령이라 함.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5년(서기 158년)에 이 길을 열렀다는 기록이 있음."
34년 전 그 때는 서울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완행열차를 이용해 희방사역에서 내리는 여정을 택했었지만 이날은
단양쪽으로해서 죽령을 넘어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인 희방사를 찾았다.
국립공원 입구 표지판이 붙어 있고, 정문 구실을 하는 큰 길가에서 부터 울창한 삼림욕을 즐기며 걷기 시작했다.
흽방사까지의 거리가 약 2km정도이니 이 더운 한낮에 해발고도 850m에 있는 절 바로 밑의 희방폭포까지 가는데도
족히 30분 이상 걸릴리라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더구나 걷는 도중 잠깐씩 발걸음을 멈추고
카메라 셧터를 눌러야 될 처지이니.
4~5분 정도 걸음을 옮기면 나타나는 안내소. 아마 국립공원 입장료 징수 제도가 없어지기 전까지 입장료를
받던 곳이리라. 이제는 조금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주차장의 주차비를 징수하고 있었다.
시인마을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안내소 역할을 하는 이곳 근무자인 아리따운 경상도 아가씨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그녀들의 사진을 찍어 즉석에서 인화 써비스를 한 후 가벼운 발걸음을 다시 산으로 향했다.
희방사로 향하는 길 옆의 희방사계곡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르며 그 물소리가 계속 귓전을 맴돈다.
갈수기인 요즘도 물이 마르지를 않으니 이 계곡의 풍부한 수량으로 산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희방폭포에 가까워 질수록 물은 더욱 맑고 깨끗해 보인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녹음 짙은 숲길을 걸으며
진한 나무향을 코 끝으로 느끼는 이 순간의 행복감만으로도 휴일 하루를 누구보다 보람있게 보내는듯하다.
오후 3시 15분. 국립공원 입구에서부터 근 50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도착한 희방폭포.
34년 전 그 여름날의 웅장함에 비해 갈수기의 물줄기는 한 눈에도 웅장한 맛이 떨어진다.
그러나, 높이 28m로 우리나라 내륙지방 최대의 폭포라는 이름에 걸맞게 처음 이곳을 찾는 이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튀어 나온다.
바로 위에 위치한 희방사 절 터의 양쪽에서 흘러 내린 물이 한 곳으로 합쳐서 폭포를 이루는 곳이다.
이 사진은 삼각대를 휴대치 않은 관계로 난간에 기대어 4/10초라는 장노출로 촬영한 것이다.
폭포 주위에서 진을 치고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는 인파와 우거진 녹음으로 인해 폭포와 주위 경관을
한 눈에 다 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모자라는 부분은 내 두 눈에,
그리고 귀로는 친금감마저 드는 폭포의 물소리를 담고 걸음을 옮겼다.
희방폭포 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이내 눈 앞에 희방사 건물 자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자그마한 희방사의 대웅보전 앞에 서게 된다.
아마도 희방사가 무척 오래 된 절이라는 얘기만 듣고 찾아온 분들은 대웅보전의 깨끗한 모습에 적이나 실망했으리라.
그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희방사 [喜方寺]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두운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568년(선조 1)에 새긴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6.25동란으로 인해 법당은 물론 당시 보관 중이던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모두 소실되는 불행을 겪었다.
법당은 1953년에 중건되었으나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48년 훈민정음 언해본이 처음 발견된 곳이 이곳 희방사라는 점이기도 하다.
참고로,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또한 월인석보는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 판 15장, 30면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대웅보전 죄측으로 극락교를 건너 석탑과 종루가 있고, 그곳에 동종이 걸려 있다. 그러나, 이 종 또한
최근에 제작해 매달아 놓은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희방사 동종은 대웅보전 우측 건물에 보관되어있다.
그 희방사 동종은 동종은 원래 조선 영조 18년(1742년)에 주조된 충북단양 대흥사종으로 승장인
해철과 초부등이 제작한 중종이었으나 대흥사가 폐사되면서 희방사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종루와 맞닿아 직각을 이루며 서 있는 지장전이다 .
이곳에는 지장보살님과 이 절의 창건주였던 두운 선사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힌 후 너무나 작고 아담한 희방사를 떠난다.
이곳 희방사의 창건해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운대사가 소백산 토굴에서 수행 중에 밖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살펴보니 여인네를 잡아먹은 호랑이의 목에 비녀가 걸려있었다.
무운대사가 호랑이 목에서 비녀를 빼내고 "산속에 먹을 것이 많은데 하필 사람을 해쳤느냐?"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얼마 후 산돼지를 물어오자 "나보고 육식을 하란 말이냐"고 호통을 친 얼마 후에
그 호랑이는 대사에게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놀란 무운대사가 알아보니 경주호장의 무남독녀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금지옥엽 무남독녀를 잃고 시름에 잠겨있던 호장은 무운대사에게 은혜를 갚고자
산세가 좋은 이 곳에 절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절 이름을 지을 때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와 기쁘다는 뜻의 기쁠 희(喜)와
두운선사의 참 선방이라는 상징으로 방(方)을 써서 희방사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대웅전 앞쪽 계단참에 있는 허름한 가건물 문 앞에 이렇게 써 있다.
** 부엌(창고용), 해우소(화장실) 아님.**
십여개 남짓한 올망졸망한 장독들과 더불어 이곳 희방사의 살림살이를 짐작케한다.
요즈음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사잘은 대부분 인터넷 홈페이지를 거창한 규모로 운영한다.
더구나 그런 사찰의 스님들의 승용차는 말 그대로 비까번쩍하다.
인터넷 홈페이지도 없는 희방사의 현실을 직시케하는 모습인듯하다. 과연 거창한 홈페이지에다
비까번쩍거리는 승용차가 있어야만 불심이 깊어지고,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가득할까?
이곳 희방사를 오르내고 잠깐 머무는 3시간 남짓한 동안 수많은 다람쥐를 봤다.
다람쥐뿐 아니라 개구리와 뱀도 봤다. 그만큼 오염이 덜 되었다는 뜻일게다.
바위틈 사이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다람쥐의 모습이 마치 작고 아담한 희방사를 닮은듯 앙증맞다.
희방사를 찾은 이들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긴 하겠지만, 사찰을 품에 안은 산자락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이
자그마한 폭포를 이루는 곳은 대부분 사찰 경내를 지나 산위로 더 올라가야한다.
그러나, 이곳 희방사는 절 아래에 폭포가 있다. 좀 더 자연에 가까운 곳이며 기억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이다. 맑은 공기를 가득 마신 후 희방사 계곡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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