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토요일 오전 9시 25분
아침 7시가 못되어 집을 나설 때는 구름 만 잔뜩 끼어 있던 날씨가
대전 동부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속리산 버스터미널에 내렸을 때부터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대지를 적신다.
법주사 매표소가 보이는 곳까지 진한 나무향을 맡으며 빗속을 걷다보니 무릎 밑으로는 완전히 젖었다.
더구나 3단 접이 작은 우산으로 카메라 가방을 집중적으로 덮다시피 쓴 우산에 상체까지 촉촉히 젖어 온다.
인적 없는 숲길을 한참 걸어 일주문 앞에 당도하니 등산객들이 여럿 눈에 띈다.
그들은 모두 우의를 입는 등 산행 채비에 분주하다. 당초 문장대까지 오르려던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다.
사찰의 일주문에는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 법주사의 일주문에는 '호서제일 가람'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여기서 호서(湖西)라는 말의 어원은 몇가지 설이 있기는 하나
충북 제천 의림지(義林池)를 기준으로 서쪽에 있다하여 충청도를 부르는 별칭이 되었다 한다.
속리산사실기비(충북 유형문화재 제167호) 가 세워진 속리실기비각 앞에 이르니 빗줄기가 더 거세진다. 잠깐 비각 아래에서 비를 피해 본다.
이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라 한다.
그 옆에는 벽암대사비(충북 유형문화재 71호)가 대사의 업적을 기리며 비를 맞고 서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1664) 때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고 전해진다.
나 자신이 걷기에는 불편할지언정 쉬임없이 내리는 비는 길 옆의 개울물에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산사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깨끗한 물줄기를 바라 보는 기분도 상쾌하다.
물가에 옹기종기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무척 많다. 그만큼 소원을 빌며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게다. 그들의 소원이 지금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처럼 이루어 지기를..
엷은 구름에 둘러 싸인 야트막한 산 자락의 품에 안긴 법주사 경내는 고요함 그 자체이다.
지난 주 다녀온 단양 구인사의 경우는 반바지,미니스커트에 대한 경고문까지 요란하게 써 붙이면서도
동네 장터 같은 시끌벅적함과 산만함을 느꼈으나, 이곳 법주사는 그런 경고문 하나 없이도 내 마음 속에 저절로 경건함을 불어 넣는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범종각이 앞에 보인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일반인들에게는 법주사의 상징처럼 치부되어버린 청동미륵불(또는 금동미륵불)이 빗 속에서도 탐방객을 반가이 맞아 준다.
이 자리는 원래 조선 후기까지 35칸에 2층으로 된 법주사의 중심 법당인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었고, 그 안에 금색의 육장상(六丈像)이 있었다.
그러나 1872년 당백전(當百錢) 주조 명목으로 대원군에 의해 육장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도 헐리는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100 여년 이상이 흐른 후인 1989년 사월 초파일에 이 자리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이 점안되어 법주사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다.
법주사 측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으며.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고,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한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는 기록이다
국보 제55호인 팔상전 안에서는 건장한 체구의 스님이 불경을 계속한다. 빗 속에서 간간히 들리는 목탁 소리가 무척 정겹게 느껴진다.
이 팔상전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24년째인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초창되어, 조선 이조4년(1626)에 벽암선사가 재건하였고,
최근(1968)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팔상전 뒤편 대웅보전과의 사이에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쌍사자석등은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그 조성연대는 성덕왕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이다.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인적없는 고찰의 분위기를 이렇게 가슴 깊이 느끼게 된 것이 모두 비 때문인지라 내리는 비가 무척 고맙게 느껴진다.
우산을 받쳐든채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스님의 자태에서도 경건함이 묻어나는듯 하다.
엄숙하게 자리 잡은 대웅보전의 모습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이곳 법주사의 위엄이 느껴진다.
법주사는 우리나라 불교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보물 제915호인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창건되어,
혜공왕12년(776)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다시 조선 인조2년(1624) 벽암대사가 삼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 절의 개조(開祖)로 알려진 의신(義信)이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天竺:인도)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경전(經典)을 얻어 귀국하여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신라 진흥왕 14)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법(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脫俗)의 절이라 하여 법주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제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진다. 천왕문을 뒤돌아 보며 법주사를 떠난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46호인 천왕문(天王門)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사찰의 금강문은 앞면 3칸 정도의 규모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법주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는 것이 법주사 측의 설명이다.
오전 11시 14분.
2시간 남짓 동안 보낸 비 내리는 사찰의 아침은 내 기분을 무척 상쾌하게 해 주었다.
더구나 인적이 거의 없어 이곳이 국립공원 구역이 아닌 깊은 산속의 사찰인 것 같은 느낌까지 들게 해 주었다.
진한 나무 향을 맡으며 돌아가는 내 발걸음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이제 비도 거의 그쳤다.
내일 일요일 방문 예정인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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