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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고 풍요로운 거창군

8월 2일 토요일 오전 10시 44분.

국민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거창군 위천면 수승대 입구의 위천중학교 운동장에 임시로 마련된 주차장에 주차 후 수승대 인근의 전통 한옥 민박촌인 황산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한다.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安亭座)나무라고 부르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곳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 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雨水)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 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제17호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재는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라한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날씨는 주민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그러나, 여름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 지방은 예부터 품질 좋은 사과로 유명하다.

또한 최근에는 거창고등학교의 열린 교육으로 널리 알려진바와 같이 전국 최고의 질 높은 교육을 지향하는 곳이기도하다.

이 모든 것이 자연에 동화하며 그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이곳 수승대의 풍부한 물과 겨울의 눈을 활용한 사계절 썰매장도 오늘날 가장 뛰어난 고부가가치산업으로 평가 받는 관광산업 개발의 일환인 것 같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에서 신라로 사신을 보낼 때 이곳에서 송별식을 가져 처음에는 근심 수(愁)자와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하였다고 한다.

거창이 백제의 땅이었던 시절 멸망해 가는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듯한 해석이겠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느라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수송대에 담긴 본래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오랜 후 조선 중종 때 퇴계 이황선생이 거창에 머물다 떠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비슷하므로 수승이라 고칠 것을 권하는 시 한 수를 짓고 바위에 수승대 수승대(搜勝臺)라 새김으로써 오늘날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먼 숲 꽃망울은 터져오르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 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 속에는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그러나 사실 퇴계선생은 거창에 왔다가 급한 왕명을 받아 수승대를 찾아보지 못하고 1543년 이른 봄날 이같은 시만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 시를 받은 사람은 거창의 명유 요수 신권으로, 요수선생은 이에 감사의 표시가 가득 담긴 화답시 한 편을 보냈다.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대이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어둡니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물 맑고 아름다운 수승대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 가까이에 있는 금원산 자연 휴양림으로 향했다. 이 바위는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을 찾아가는 초입인 금원산 지재미골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문(門) 바위다.

이는 옛가섭사 일주문에 해당하는 가람 수호신으로 우리나라에서 단일 바위로 제일 큰 바위로 알려져 있다.

이바위는 호신암(護神岩), 가섭암(伽葉岩), 금달암(金達岩), 두문암(杜門암), 지우암(知雨岩), 기도암(祈禱岩)등 역사적인 내력과 주변여건에 따라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 바위의 왼편 중턱에는 1393년 달암 이원달 선생과 그의 사위 유환 선생이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절을 지켜 순절하였음을 알리는 달암 이선생 순절동(達巖 李先生殉節洞)이라 새긴 글자가 선명하다.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동굴의 외곽 모습이다. 세 개의 큰 바위가 서로 기대면서 내부에 삼각형 모양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오른편 큰바위 안쪽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중앙에 보이는 바위와 바위 사이로 오르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 마애삼존불상은 그동안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했으나, 1989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왼쪽 협시불 옆 암벽에 새겨진 가로 70㎝, 세로 88㎝ 크기의 해서체 기록인 불상조상기(佛像造像記)를 발견하여 불상의 조상시기가 1111년(고려 예종 6년) 10월임이 확인되었다 한다.



금원산은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 함양군 안의면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금원산의 줄기는 남으로 기백산(1,331m)과 남령을 거쳐 남덕유산(1,507m)과 이어져 있다.

금원산에는 두 골짜기 즉, 성인골 유안청계곡과 지장암에서 유래된 지재미골이 있으며 이곳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상천리에서 합수하여 상천(上川)이 되어 위천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1959년에 간행된 경상남도지(慶尙南道誌)에 의하면 옛날 이 산속에 금빛 나는 원숭이가 거칠게 날뛰므로 한 도사가 바위 속에 가두었다는 전설에 따라 금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산중턱에 있는 그 바위를 금원암 또는 원암(猿巖)이라고 한다. 주변 계곡일대와 지재미 지암(芝巖) 골짜기는 절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 산은 본래 나무 가 울창하고 숲이 우거져 멀리에서 바라보면 검은 색이어서 산 이름이 <검은산>이었는데 와전 되어 금원산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던 최근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음에도 이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쉬임없이 흐르는 계곡물로 얼굴을 씻기만해도 온몸이 시원한,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