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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에 파묻힌 강천산

2009년 1월11일 일요일 오전 7시25분.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의 경계에 자리 잡은 강천산 산행을 위해
차량 탑승 장소에 도착해 보니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혹한임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통해 건강을 지키려는 이들로 무척 붐빈다.

서점 숫자의 10배가 훨씬 넘는 4만여 노래방이 주택가까지 파고든 퇴폐 환락의
대명사인 대한민국에서도 그나마 일말의 희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출발이 상쾌하다.

그러나 누군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느라 출발 시간 7시 반을 30분이나 넘겨 출발하면서
사과 발언조차 없었던 산악회 관계자에게는 무척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 8시35분.
아침 식사를 못한 이들을 위해 20여분 정차한 충남 금산의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바라 본 아늑한 시골 마을 모습이 정겹게 여겨진다.
자그마한 마을을 품에 안은 야산 산허리를 빠르게 휘돌아 나가는 짙은 안개가 살을 에듯
피부로 파고드는 추위를 배가 시키는 듯하다.





오전 11시 5분.
대진고속도로와 88고속를 연이어 달려온 차량이 강천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10시 40분경. 발목까지 쌓인 눈길을 걷기 위해 아이젠을 단단히 착용한 후 10여분 걸어 도착한 병풍폭포 모습이다.
추운 날씨로 인해 떨어지는 수량이 적어 시원한 물줄기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으나
암벽에 얼어붙은 흰 얼음이 아쉬움을 조금 달래 준다.

그러나, 이 폭포는 자연이 아닌 “인공폭포”이다. 아래는 폭포 앞 안내판에 쓰여진 글 귀이다.

“이 폭포는 병풍바위를 비단처럼 휘감고 있는 폭포로 높이 40m, 물폭15m, 낙수량이
분당 5톤이며, 작은 폭포는 높이 30m, 물 폭 5m로 전설에 의하면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오전 11시 46분.
강천산 정상인 왕자봉에 오르기 위한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남짓.
두꺼운 스웨터를 벗어 배낭에 챙겨 넣었건만 두꺼운 방한 파카 속에 입은 한 벌 티셔츠는
땀으로 흥건하다.





오전 11시 55분.
눈꽃으로 뒤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남쪽 산봉우리도 흰 눈으로 덮여 있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낮 12시 29분.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여가 흐른 시간.
팔목에 찬 시계의 기능을 고도계로 설정해보니 해발 500m정도 되는 높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다운 얘기를 나누는 중년의 두 친구분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눈꽃은 더 깨끗하고 아름답다.
지난주 이곳 강천산을 다녀온 블로거의 글과 사진을 보고 눈이 거의 없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오늘 산행이었지만 엊그제 내린 눈이 이토록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할 줄이야!
올해 원하는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올 겨울 들어 지난 11월29일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첫 눈 구경을 하긴 했지만
이처럼 아늑하고 고요한 느낌의 설국(雪國)에 파묻힌 것이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도시의 눈은 내린 후의 불결한 모습만 떠올리지만 산 속의 눈은 마음을 맑게 해 준다.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혹한이었지만, 이곳 눈에 파묻힌 산속은 너무 포근하다.
바람 한 점 없는 이 하얀 세상을 느낌은 아마도 남쪽 능선을 따라 산행을 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낮 12시 53분.
원래는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 불렸다는
해발 583.7m인 강천산(剛泉山) 왕자봉을 떠나 하산 길에 오른다.
눈발이 날리는 왕자봉에서 준비해간 김밥을 꺼내 놓고,
같은 산악회 차량을 이용한 비슷한 연배의 친구 사이인 두 분과 같이 앉아 점심을 먹었다.
산행때마다 따님이 먹거리를 준비해준다는 분의 얘기는 딸 없는 내 마음 한 구석에 잠시 한기를 불어 넣는다.





오후 1시 34분.
해발 425m인 신선봉으로 연결되는 현수교로 향하는 하산길은 무척 가파르다.
가파른 내리막을 30여분 이상 내려왔건만 끝이 없는듯하다.
등산화에 꽉 채워 끼운 아이젠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양 다리에 힘을 모은다.





오후 1시 42분.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한 시간 가까이 내려오느라 다리가 뻐근해질 즈음 현수교 앞에 당도했다.

‘구름다리’로 흔히 불리는 길이 75m, 높이 50m의 용접 철교다.
멀리 기암절벽으로 장관인 삼인대계곡과 장벽처럼 솟구친 산성산도 보인다.
바닥에 얼음이 얼어붙은 다리위를 지나오는 등산객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멀리 담양군의 금성산성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산행을 해 온 광주분들의 얘기에
지난 가을 들렀던 금성산성의 추억을 떠 올리며 그곳까지 가고픈 마음이 잠시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나, 단체 산행에서 집합 시간을 어길 수는 없는 법. 발길을 돌린다.





오후 1시 57분.
산행을 하는 3시간 여동안 내린 눈이 하얗게 덮인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저 앞에 좌측으로 강천사 돌담, 그리고 우측으로는 삼인대가 눈에 들어온다.





강천사 앞 남쪽 개천 건너에 있는 정면 1칸의 비각이다.
이 비각 속에는 전북유형문화재 제27호인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三印臺] 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744년(영조 20)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대학자인 이재 (李縡:1680∼1746)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중종반정을 주도하고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愼守勤) 일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77년에 관음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는 강천사[剛泉寺]의 고요한 정경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末寺)로, 887년(진성여왕 1)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살얼음이 언 개울가를 따라 늘어선 눈꽃을 안은 나뭇가지들.
그리고 흰 눈이 소복히 쌓인 귀가길.
눈 속 산행을 마치고 귀가하는 산악인들의 발걸음들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진다.





오후 2시 7분.
저 앞에 이곳 강천사 경내의 시작을 알리는 일주문인 강천문이 보인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내 마음이 먼저 아는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강천사 경내의 요사채와 관음전 사이로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던 부처바위가
일주문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니 그 자태가 한층 의연해 보인다.





담양의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만큼 많은 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강천산 입구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도 그 본연의 자태인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오른 모습이
흰 눈과 어울려 이곳을 다시 찾아 달라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듯 하다.





오후 5시.
귀가길에는 아침 출발 때와 달리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 덕분에
눈이 많이 내리는 정읍 휴게소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내리는 함박눈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나이 50,60대의 중년들이 흰 눈을 맞으며 함박웃음을 웃는 모습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다시 깨우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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