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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동해바다를 품에 안은 대게의 본고장 영덕으로 떠난 여행

2012년 7월29일 일요일 오전 8시40분
영덕대계로 널리 알려진 동해안의 청정 지역 경북 영덕 여행길에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에서 잠시 멈춘다.
아침 식사를 위해 멈춘 이른 시간이건만 이미 중천에 떠오른 햇살은 지상의 모든 사물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휴게소 주차장의 아스팔트는 마치도 장작불 활활 타오르는 시골집 부뚜막 마냥 뜨겁다.





 

오전 11시
냉방 잘된 시원한 차에서 내린 곳은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 위치한
"삼사해상공원 [三思海上公園]"이다.
마치 고온의 한증탕에 발을 들여 놓은듯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휘감아 돈다.
순간 숨이 탁 막힐 지경이다.





 

 

 

기온은 이미 섭씨 30도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매주 주말 등산을 하며 온 몸에 비오듯 땀을 흘리며 오르막 산길을 오르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더위쯤은 금방 적응이 된다.
이곳 삼사해상공원의 상징 중 하나인 '경북대종각'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나뭇가지에 장식한 야간 조명용 작은 전구가 멀리서 보면 마치 흰 벚꽃이 만개한듯 여겨지기도 한다.



 

 

계단을 오르던 중 잠시 멈추어 동쪽을 바라본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빛을 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거의 없는 날씨 때문인지 평소의 동해바다와 사뭇 다른 오늘이다.
푸른 바다 위로 간간히 흰 포말을 튀기는 파도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잔잔한 바다 풍경이다.
마치 남해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난히 잔잔한 오늘이다.



 

 

경상북도 개도(開道) 100주년(1996.8.4)을 맞아 만든 이 경북대종은
지름 2.5m, 높이 4.2m, 무게 7,700관(29톤)으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종이라 한다.
국보 제 29호인 성덕대왕신종을 본 떠 만든 이 종 표면에는 경상북도가 문화 예술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대금 부는 천인상'과 경북의 풍요로운 결실을 상징하는 '사과를 든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 삼사해상공원은 1988년부터 개발된 종합 유원지로
9m 높이의 인공폭포를 비롯하여 천연 공작매화석, 기둥분수와 연못 등의 볼거리와
이북 5도민의 망향을 달래기 위해 1995년에 세운 망향탑, 경북대종 등의 시설물이 조성되어 있으며
경북대종 아래 1만 900㎡ 규모의 삼사 해상테마랜드에는 통나무 방갈로와 음식점 등이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십자형 합각 팔작지붕 구조인 경북대종을 비치한 종각은 바닥 면적이 66.1㎡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이다.
경북대종의 무게 칠천칠백(7,700)관의 7,000은 남북한 겨레 7천만명을 의미하며
700은 경상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고려 충숙왕 원년으로 부터 7백년이 경과했음을 뜻한다는 얘기이다.



 

 

멀리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리 높지 않은 산 줄기 능선에 수많은 풍력발전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이곳 영덕군 주민들에게 전력을 공급하는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돌아간다.
오후에 들리게 될 해맞이공원 위쪽 야산에 자리한 풍력발전단지에 있는 총 24기의 풍력발전기는
1기당 1,650kw의 전기를 만들어낸다.
날개 길이 41m, 높이 80m의 저 풍력발전기가 좀 더 많이 만들어지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질 높은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난 1997년부터는 매년 이곳에서 신년 해맞이행사가 열리며,
주변에 경보화석박물관·장사해수욕장·풍물거리 등이 있어 일년내내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제는 영덕군민이나 경북 도민만을 위한 휴식 공간이 아닌 전국적 명성을 얻은 관광 명소가 되었다.
삼사해상공원 [三思海上公園]의 지명 유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 중 하나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사람이 시랑(侍郞)관직을 지냈다해서 삼시랑이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들어오면서, 살면서, 떠나면서 세번 생각한다해서 삼사(三思)라 했다 한다.



 

 

공원 광장 한켠에는 이와같은 어디선가 본듯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일출명소로 유명한 정동진의 모래시계공원에 설치된 모래시계를 닮은 조형물이다.
참고로 정동진의 모래시계는 모래가 아래로 모두 떨어지는 데 1년이 걸리며
지름 8m, 폭 3m, 무게 40톤, 모래 무게 8톤으로 준공 당시 세계 최대였다 한다.(현재는 잘 모름)



 

 

오전 11시54분
삼사해상공원을 떠나 다음번 행선지인 영덕군 강구읍 강구리에 위치한 "강구항(江口港에서 잠시 멈춘다.
이곳 강구항은 영덕군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대게로 유명한 곳으로
대게철이 시작되는 11월부터 이듬해 4~5월까지의 대게철에는 수많은 대게잡이 어선들이 집결하는 곳이다.



 

 

일명 ‘대게거리’로 불리는 3km에 이르는 바닷가 식당가는 대게철이 지났음에도
주말을 맞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차량이 심한 정체를 빚는다.



 

 

제 철이 아닌지라 흔히 말하는 옅은 갈색을 띈 영덕대게는 구경하기 힘들고
영덕대게와 맛이나 영양가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붉은색의 홍게가 주류를 이루는 어시장 좌판에도
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간혹 '영덕대게'라는 이름을 보고 크기가 커서 붙여진 이름인줄 아는 이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
예전에 한자로 '죽해(竹蟹)'라고 불리던 대게는 크다고 해서 대게가 아니라 몸통에서 뻗어나간 8개의 다리모양이
대나무 처럼 마디가 길고 곧다고 해서 '대나무 '죽(竹)'과 게 '해(蟹)'로 '대게'를 이르는 말이다.
10마리에 5만원인 홍게 맛을 보는 관광객들이 수월찮게 찾는 식당에서는 홍게 쪄 내기에 일손이 바쁘다.
살아있는 게를 찔 때는 반드시 뒤집어 놓은 채 쪄야 다리에 든 게살이 남아 있고 제맛이 난다는 것 정도는
알아 두면 도움이 될 정보이다.



 

 

낮 12시31분
강구항을 떠나 다음에 도착한 곳은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 오십천 변에 자리한 영덕시장이다.
젊은시절 서울 명동,서소문에 자리한 사무실로 출근을 할 때 울적하면 자주 찾던 남대문시장.
살아 움직이는듯한 장터의 활기찬 모습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곤 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4,9장인 이곳 영덕시장의 장날임에도 무더위 때문인지 너무나 한산한 오늘이다.
갖가지 죽세공품을 늘어 놓고 파는 노점에 몇몇 손님들이 햇빛을 피하기 위한 밀짚모자를 고르는 손길만 보인다.



 

 

바다가 가까운 이곳 영덕시장에서 수산물 다음으로 많이 눈에 띄는 상품은 복숭아다.
이곳 영덕은 매년 4월중순이면 '복사꽃 큰잔치"라는 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는 곳이며
영덕군의 꽃인 "군화(郡花) 또한 복숭아꽃이다.



 

 

낮 12시57분
젊은 시절 남대문 시장의 활기찬 모습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곤했던 기억은 그 후 나의 장터 기행으로 이어졌다.
진주 반성장,성남 모란장, 경기 양평장,신탄진 장,유성 장, 섬진강변 화개장터 등등..
그리고 대부분의 장터에는 오래된 맛집들이 있고, 가장 서민적인 맛집의 음식은 '잔치국수'이다.

이곳 영덕장에도 잘 알려진 허름한 국수집이 있다.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지극히 소박한 잔치국수 한 그릇을 비워낸다.
특이하게도 콩나물 무침으로 고명을 얹은 2,500원짜리 이 잔치국수는
저녁 귀가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6,500원을 내고 먹은 사골우거지국밥보다도
휴가차 집에 내려와 쉬고 있는 작은 아들을 위해 준비해준 고기국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오후 1시12분
더위와 허기에 지친 몸을 시원한 국수 한 사발로 달랜 후 다시 시장 탐방에 나섰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만 높이 떠 다니는 한낮의 시장 풍경은 말 그대로 쥐 죽은듯 조용하다.
남 유럽이나 동남아에서 쉬이 접하는 시에스타를 떠올리게 한다.



 

 

그나마 물기가 있는 생선가게 골목은 조금 시원한 편이다.
마른 미역 등 몇가지 건어물을 늘어 놓고 오전 내 장사하느라 힘이 부친 할머니는 지친 몸을 낮잠으로 달랜다.



 

 

싱싱한 고등어가 눈길을 끈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8년간 머물며 쓴 책인 "자산어보" 에 벽문어(碧紋魚)·고등어(皐登魚) 등으로 기록된
동맥경화예방, 뇌졸중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등푸른 생선인 고등어를 적당량 사서 집주소를 알려 주고
택배로 배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싱싱한 도루묵도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지난 해 가을 고교 동창들과 인제 동아실 물가에서 하루 묵으며 먹었던 도루묵 찌개 맛을 떠올리니 군침이 고인다.
그러나 도루묵은 10월에 잡힌 것이 가장 맛이 있는 것을 알기에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작지만 소박함이 느껴지는 영덕시장을 벗어난다.



 

 

오후 1시59분
영덕시장 옆으로는 주왕산국립공원의 대돈산(大遯山:905m)·벅구등(846m)에서 발원하여
강구항에서 동해바다로 흘러 드는 오십천이 흐른다.
그 오십천변의 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온도계 눈금은 섭씨 36도에 육박한 높은 기온이지만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으니 시원하다.
습도계의 눈금이 40%에 머문 낮은 습도 때문이다.
우리가 더위를 크게 느끼는 요인은 온도보다는 습도에 더 크게 좌우됨을 절감한다.



 

 

오후 3시9분
영덕시장을 떠나 도착한 다음 여행지는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의 '괴시전통마을' 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인 이곳은
200~300년된 전통 가옥 30여채가 모여 있는 곳이다.
뜰을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랑채 뒤에 안채를 숨겨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사대부가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는 이곳은 문화재적 가치를 간직한 곳으로 최근 들어
관광객들이 심심찮게 찾는 곳이다.



 

 

1847년 처음 건립된 후 1938년 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괴시리 영감댁' 담장 밖에는
철 늦은 자귀나무 꽃이 여름 햇살에 반짝인다.
밤이면 잎이 오므라들어 서로를 포옹한다고 하여 합환수(合歡樹)로 불리는 자귀나무는
정원에 심어놓으면 부부금실이 좋아진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곳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호지골·호지마을·호지촌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으며
최근 전면 시행을 앞둔 새로운 행정 지번상으로도 이곳 마을의 행정지명은 '호지마을 1길'등으로 부여되어 있다.



 

 

이곳 30여 호의 가옥 가운데 괴정(槐亭), 영해 구계댁(邱溪宅), 영해 주곡댁(注谷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 국가 및 도 문화재자료만도 14점이나 된다.
조선시대 후기 경북 지역 사대부가의 주택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학자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2003년부터는 2년마다 5월에 이곳에서 목은문화제가 열린다.



 

 

고려 말에 함창 김씨(목은 선생의 외가이며, 선생의 외조모는 영양 남씨)가 처음 입주한 이래,
조선 명종(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金氏),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처음 정착하면서
타성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해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문벌을 형성한 곳이라 한다.



 

 

금등화(金藤花)라고도 불리는 중국이 원산인 능소화가 담장을 따라 예쁜 꽃을 피운다.
옛날에서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양반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지에 흡착근이 있어 벽에 붙어서 올라가고 길이가 10m 까지도 자라는 능소화
이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심어 가꿀 수 있는 세상이다.



 

 

꽃말이 '명예,자랑,자만' 등으로 알려진 능소화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땅을 기어가는 가련한 꽃이었던 능소화가 소나무에게 ‘나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자,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반한 소나무가 쾌히 승낙하여 나무나
담을 붙잡고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오후 3시39분
괴시리전통마을을 떠나며 멀리 떨어진 도로에서 마을을 바라다 본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 3은(三隱)으로 잘 알려진 목은 이색(1328~1396)의 외가인 영덕은
예로부터 경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했다.
그래서인지 이곳 괴시리 마을에서 태어난 목은이 영덕의 경치와 물산을 주제로 많은 글을 남겼다 한다.
그는 '목은집'에서 "고향 영덕의 경치가 동방에서 가장 으뜸"이라며
"건강할 때 땅을 갈고, 집을 짓고, 해돋이의 빛을 한번 마셔야겠네" 라며 시를 읊조리곤 했다.



 

 

오후 4시5분
영덕 여행의 마지막 명소인 영덕읍 창포리에 위치한 영덕해맞이공원의 랜드마크인 창포말등대 앞에서
시원한 바닷 바람으로 이마의 땀을 씻는다.
지난 2006년 1월말 점등식을 가진 대게의 집게발 모양의 멋진 이 등대는 이제 전국적 명소가 되었다.
높이 24m인 이 등대에서 밤에 비추는 불빛은 23마일(36.8km) 거리까지 도달한다.



 

 

36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이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이 계속 불어오는 전망 좋은곳에 서 있으니
일시에 더위가 가신다.
저처럼 맑고 푸른 동해바다를 보기 위해 이 멀리까지 달려온 것이다.
아! 참 잘 왔구나!



 

 

창포말등대 아래의 목재 계단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 등대쪽을 올려다 본다.
햇빛은 뜨겁지만 파도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닷바람이 상쾌한 기분을 주는 곳이다.

창포말등대란 이름은 이곳 창포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창포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은 붓꽃이 많이 피는 갯가가 되므로 「붓개」로 불렸는데,
우리나라 원산인 붓꽃은 '수창포', '창포붓꽃' 이라고도 하므로 마을 이름이 "창포(菖浦)리"로 된 것이다.



 

 

바닷가에서 갯바위 낚시를 즐기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아침 6시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260km 정도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온 긴 여정이지만
지금 바라보는 동해바다의 푸르름을 망막에 각인시키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보상받은 느낌이다.



 

 

온통 암반으로 이루어진 바닷가에 내리 쬐는 뜨거운 햇살을 가려 주는 나무는 오직 소나무 뿐이다.
어느곳에서나 멋진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소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다른 작은 나무들이 자라지 못함에 대해 포용력이 없어 4군자에 끼지 못한다며
싫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바위틈을 비집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는 소나무 때문에 만들어지는
여름 한낮의 시원한 그늘이 고맙기만 하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더운 날씨 때문인지 바닷가까지 내려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간혹 용감하게 바닷가까지 내려왔던 관광객들은 등대가 있는 도로변까지 오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쉰다.
매주 주말 등산으로 단련된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며 길섶의 야생화들을 관찰한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사삼이라고 하며 진해·거담·해열·강장·배농제로 사용하는
잔대꽃이 예쁘게 피어난다.
잔대는 옛부터 인삼,현삼,단삼,고삼과 함께 다섯까지 삼의 하나로 꼽아 왔으며 민간 보약으로 널리 쓰여왔다.
잔대는 뱀독,농약 독,중금속 독,화학약품 등 온갓 독을 푸는데 묘한 힘이있는 약초로 알려져 있으며
옛기록에도 백가지 독을 푸는 약초는 오직 잔대뿐이라 하였다.



 

 

예쁜 술패랭이꽃도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다. 아름다운 화원이 따로 없다.
옛부터 꽃이나 열매가 달린 식물체를 그늘에 말려서 이뇨제·통경제(通經劑)의 약재로 쓰던 야생화이나
근래 들어 예쁜 꽃을 보기 위해 관상용으로도 많이 심는다.

옛 문헌에는 이 식물이 구맥의 가는 섬유질로 덮인 듯하며 마디가 있고 높이도 일척(一尺)이 넘고
한줄기에 가늘게 뻗은 꽃잎이 붉은 자주색으로, 온 천지에 많이 피어나
누구나 이 꽃을 좋아하여 낙양화(洛陽花)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녹음 우거진 나무숲과 맑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맞이공원 주위를 잠깐 산책하며
잠시 후면 이곳을 떠나 도시의 소음과 매연 속으로 돌아가게됨을 아쉬워 한다.



 

 

오후 4시19분
행정구역상 영덕읍 창포리인 이곳 '영덕해맞이공원'은
지난 1997년 산불로 황폐해진 곳을 '자연 그대로의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1998년 착공, 2002년 완공된 해안형 자연공원이다.
창포말등대도 이곳 해맞이공원의 중요 시설물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다시 한번 둘러본 후 휴일 하루 행복했던 여정을 마치고 귀가 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