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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교를 건너 충무공의 얼이 서린 고하도(高下島)를 찾아서

2012년 8월19일 일요일 오전 10시 10분
아침 일찍 대전을 떠나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를 거친 여정이 3시간에 접어들자
우리 일행이 탄 차량이 지난 6월 말 개통한 목포대교로 진입한다.
항상 그러하듯 처음 접하는 길이나 다리를 지날 때는 떨리는 가슴을 달래곤 한다.




지난 2004년 착공해 8년간의 공사 기간과 3,000 여 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된 목포대교.
목포시 죽교동 북항과 고하도(신외항)를 연결하는 4.129㎞(해상구간 3.1㎞)인 이 다리의 개통으로
영산강하구둑 등의 상습 교통체증이 해소되는 등 이 부근 교통 소통에 큰 도움이 되는 다리라 한다.




초속 75m의 강풍을 견딜 수 있다는 2개의 주탑은
그 높이가 아파트 67층 높이인 167.5m라 한다.
휴일 오전 시간이어서인지 통행 차량이 거의 없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기분 좋게 달린다.




오전 10시29분
목포대교를 건넌 차량은 우리 일행을 고하도 남동쪽에 자리한 고하도복지회관 부근에 내려 놓는다.
그냥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무더운 날씨이지만
숲길로 접어들며 고하도 섬 트레킹을 시작한다.




오전 10시36분
면적 1.78㎢, 해안선 길이 10.7㎞에 불과한 작은 섬 답지 않은 큰 암반이 나타난다.
현재 지점이 이곳 고하도의 중심부 부근 동쪽 사면이다.
지질은 대부분 산성화산암류로 이루어진 탓에 동쪽으로는 대부분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고하도의 해발고도는 가장 높은 지점이 77m 이다.
큰 암반 위에 올라서 동쪽으로 눈을 돌린다.
바다 한 가운데 작은 무인도에 만들어진 용하도등대 너머로 보이는 곳이 대불공단이다.
뒤로 보이는 자그마한 산봉우리들은 아마도 마골산과 두리봉이 아닌가 싶다.




비록 최고점이 해발고도 77m이긴 하지만 반달 모양으로
남북으로 길게 생긴 섬의 남북 길이가 3km 남짓한 작은 섬인 탓에 동쪽 사면의 급경사 내리막 길에는
이처럼 로프를 설치해 탐방객의 안전을 도모하는 구간도 여러 곳 있다.
산행 중 안전사고는 높은 산 보다는 낮은 산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오전 10시43분
큰 암반에서 내려온 후에는 이처럼 걷기 편한 숲길이 이어진다.
작은 섬 답지 않게 울창한 숲이 우거진 때문인지 바람이 전혀 없다.
온 몸으로 흐르는 땀이 겉옷까지 흠뻑 적시는 더운 날씨로 옷자락에서도 땀이 물처럼 떨어진다.
그러나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보다 이처럼 운동으로 흘린 땀이 건강에는 좋으리라는 생각으로 걸음을 이어간다.




울창한 숲 속에서 평소 주말 산행중에는 자주 접하기 힘든 야생화를 만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남,경남,충북 지방에 분포하는 이 야생화의 이름은 "계뇨(鷄尿)" 또는
"계뇨등(鷄尿藤)" 으로 불리는데 잎과 줄기에서 닭오줌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방에서 열매와 뿌리를 채취하여 말린 것을 각각 계뇨등과(鷄尿藤果), 계뇨등근(鷄尿藤根)이라 하며
신경통 ·류머티즘 ·관절염 ·소화불량 ·위통 ·간염 ·비장종대(脾臟腫大) ·기관지염 ,
해수 ·골수염 ·타박상 ·림프선염 ·화농성질환 등에 처방한다.




오전 10시 54분
울창한 숲길을 벗어나 섬 중앙부 부근의 동쪽 끝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멀리 북쪽으로 눈을 돌린다.
목포 북항 부근에서부터 반달처럼 생긴 고하도의 서쪽 해변을 따라
타원형으로 길게 뻗은 목포대교의 곡선미를 간직한 자태가 아름답다.




북쪽을 바라보던 눈길을 서서히 우측으로 옮기면 북동쪽의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가로지른 목포대교로 눈길을 돌리면 우측 끝에 목포의 상징인
228 m 높이의 유달산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이제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유달산 아래 목포 시가지쪽이 보인다.
해안가로는 목포한 국제여객터미널과 연안여객선터미널도 눈에 들어온다.




동쪽 더 멀리로는 목포의 또 다른 상징 중 하나인 삼학도 너머 멀리 영산호 하구둑까지 눈에 들어온다.
세 마리의 학이 내려앉아 생겼다는 전설이 있는 "삼학도(三鶴島)"는
유행가 가사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목포의 상징이었으나
지난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발전을 위한 공업화라는 명분하에 진행된 간척사업으로
오랫동안 이름만 남아있는 상태였으나 최근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수년 후면 원래 모습인 세 마리의 학이 내려 앉은듯한 아름다운 섬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아래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거대한 통로가 만들어진 멋진 바위를 옆으로 하고 산길은 이어진다.
아마도 오래전 옛날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큰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큰 바위가
이처럼 멋진 석문을 만든 것이리라.
누군가 이 바위에도 이름을 붙일 날이 있을게다.
마치 선사시대 사람이 거주하던 '움집'처럼 생겼으니 "움집바위"라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오전 11시13분
작은 섬 고하도의 북쪽 끝까지 1km 정도 남겨둔 지점에서 동쪽 해안가로 잠시 내려간다.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목포대교 남단에서 유달산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몸을 맡긴다.
사진 중앙부의 목포대교 끝 부분 건물이 밀집한 곳은 목포해양대학교가 자리 한 곳이다.




북동쪽으로는 유달산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이곳 고하도의 섬 이름은 저 유달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불렸다고 한다.




오전 11시52분
온몸에서 흘린 땀이 입은 옷을 적셔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젖은 옷에서 마치 소나기 내리듯 땀이 흘러 내린다. 유난히 습도가 높은 날씨 탓이다.
작은 섬 고하도의 북쪽 끝에 가까운 지점. 나뭇가지 사이로 유달산이 바라다보이는 곳
나무 그늘아래에서 이른 점심과 더불어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228m 라는 높이만 듣고는 코웃음을 칠 사람도 있겠으나
유달산 정상 부위를 망원렌즈로 당겨 보면 그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
산세가 험하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실감이 간다. 참고로 '개골(皆骨)'이라 함은 겨울철 금강산을 부르는 별칭이다.




낮 12시28분
점심과 휴식을 마친 후 남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기 전
마치도 우리나라 한복 저고리 소매를 따라 흐르는 부드러운 곡선을 연상케도 하고
우리 고유 한옥의 처마 곡선을 연상케도 하는 아름다운 목포대교를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뒤돌아 본다.
누군가는 목포의 상징인 삼학도와 연관지어 우아한 학의 날개짓에서 저 다리의 디자인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작은 섬 고하도의 북동쪽 해안에서 북서쪽 해안으로 가로지르는 길은
이처럼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우거진 울창한 숲길이다.
참나무 종류가 주를 이루는 숲길 주변에는 칡넝쿨이 밀생할 정도로 토질도 비옥해 보인다.




동쪽 해안가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암반이 절벽을 이루는데 반해
서쪽 해안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지형이다.
이와같은 모래사장도 비교적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고하도의 서쪽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목포대교 교각 아래를 따라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뒤돌아보는 풍경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낮 12시57분
오전 중 동쪽 해안가를 따르는 숲길에서 흐르는 땀을 주체 못할 정도로 더위와 싸웠던 것에 비하면
지금 서쪽 해안을 따라 걷는 이 길은 천국에 온듯 시원한 길이다.
찬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잠시 동안 행복감에 젖어 본다.




다리 중앙부 2개의 주탑을 받치는 부분의 교각 높이가 무려 55m에 달하는 높은 다리이지만
그 교각의 높이는 점차 낮아지며 고하도 서쪽 신항만 공사장 부근에서는
그 높이를 점점 낮추며 비로소 지표면에 길게 이어진 다리의 끝 부분을 살며시 내려 놓는다.




인구 300명 남짓한 작은 섬인 고하도는 예전에는 염전이 많이 있었으나 개발에 따른 간척으로 인해
이제 염전은 자취를 감추었다.
기후가 온난습윤하고 "무상(無霜)기일-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200여 일이 넘어 우리나라에서
"육지면(陸地棉)-목화)"이 처음으로 재배되었던 이곳 고하도에도 변화의 바람은 찾아왔다.
요즈음은 무화과 재배를 가장 많이 한다. 마을 주변에 가장 많이 눈에 띄는 풍경은
사람 키 정도의 무화과 나무 밭이다.




아시아와 지중해 지방이 원산지인 무화과의 우리나라 주산지는 이곳 목포와 경계를 이루는 전남 영암군이다.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80~90%를 점하던 영암군이지만
최근 충청도와 경상북도 지방에서도 무화과 재배를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치부를 가렸던 나뭇잎이
이 무화과의 잎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이 사진은 길가 노점에서 무화과를 산 일행으로부터 얻어먹은 무화과 맛에 취하여
귀가 길 함평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구입한 집에 있는 가족을 위한 무화과이다.
만원 한 장으로 가족을 위한 선물을 샀다는 행복감을 고이 간직한다.




오전에 출발했던 지점인 고하도복지회관쪽으로 향하는 길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걷는 길이다.
하지만 간혹 이처럼 운치있는 숲길도 지난다.
지금 이 길은 지난 봄 다녀온 경기도 가평의 아름다운 남이섬의 산책길을 걷는듯한 느낌을 주는 길이다.




오후 1시21분
마을 안길에는 이처럼 울창한 대숲을 둘러 싼 낮은 돌담길도 지난다.
어려서부터 부산과 서울 대도시에서만 자란 나에게 이와같은 대숲이 있는 시골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잠깐 들렀던 부모님 고향 마을에서 스치듯 지나친 울창한 대숲의 기억이 어렴풋할 뿐이다.




오후 1시34분
한동안 그늘이 없는 뜨거운 들판을 걸으며 온몸에 땀을 흘린 후 시원한 바람이 이는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소나무 숲 뒤로 보이는 담장은 행정구역상 전남 목포시 달동 230번지인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지를 둘러싼 담장이다.
임진왜란부터 이어진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도, 고하도, 고금도의
세곳에 위치했었다 한다. 그 연유로 이곳에 이충무공 사당이 세워져 있다.

40여명의 일행들 대부분은 힘들다는 이유로 충무공 사당을 들리지 않고
에어콘 가동되는 버스로 들어가 버린다. 우리 국민의 한 사람으로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충무공 사당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소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힌다.
유달산을 바라본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유달산은 목포시와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므로 산정에 두 개의 봉수대를 설치해
멀리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한다.
작은 정자인 달성각(達成閣)에서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午砲臺)와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그 중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군량을 쌓아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인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충무공 사당 입구에는 관례대로 홍살문이 서 있다.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 '홍살문(紅─門)'은
능(陵)·원(園)·묘(廟)·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을 말함인데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다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서는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라 한다.




홍살문을 지나 사당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는 '맥문동'이 거대한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다.
우리나라 원산인 이 야생화는 중부 이남의 산지에서 잘 자라는데
뿌리가 광맥(-麥겉보리)를 닮아 그 이름을 얻었다하며
뿌리를 한방에서 약용으로 써 왔으나 요즈음은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모충문을 지나면 사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의 나이 53살 때인 그해  1월 14일.
약 20만의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정유재란)한다.
그리고 삼군수군통제사이던 원균이 전사한 후 장군은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그해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기쁨도 잠시 뿐 얼마 후인 10월 14일 아들 면의 전사 부음을 듣는다.
그 해 10월 29일 장군은 이곳 고하도에 수군진을  설치한다.




모충각 내에는 이충무공 기념비가 모셔져 있다.
1722년(경종 2년)에 만든 비문에는 당시 충무공의 여러 행적이 새겨져 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곳 고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히 여겼는바  
난중일기의 일부 내용 중 고하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밤 두 시쯤에 출항해 목포로 향해했다가  보화도(현재의 고하도)에 정박하니 
된하늬바람(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을 짓기로 계획했다”




오후 2시33분
고하도를 떠나 귀갓길에 잠시 머문 곳은 목포시 용해동에 위치한 갓바위 관광지이다.
천연기념물 제 500호로 지정된 이곳 목포 갓바위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 tafoni)로서
삿갓을 쓴 사람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한 한 젊은이의 정성이 깃든 전설이 전해지는가 하면
또 영산강을 지나가던 부처님과 아라한이 놓고 간 갓이 돌로 변하였다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기도 하는 이 갓바위는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치면서 수면과 잇닿은 바위 아랫부분이 깎여나가 마치 갓을 쓴 사람 형상으로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갓바위 앞에서 바라보는 동쪽 풍광이 한폭의 그림 같다.
멀리 영산호하구둑까지 이어지는 물결치는 바다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목포팔경 중 하나로 "입암반조(笠岩返照)"라 것이 있는데
이는 저녁노을에 물든 이곳 갓바위와 뒷편 바위절벽으로 된 입암산에 반사되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다.




오후 4시18분
갓바위를 떠나 목포 북항변에 자리한 횟집에서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허기를 해결한 후 귀가 길에 오른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곡선을 그리며 좌로 휘어지는 목포대교의 매끈한 몸매가 일부 보인다.
기묘한 기암괴석을 가진 유달산 암릉은 앞에 놓인 야산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고하도에 머무는 몇시간동안 내내 바라보았던 그 기억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휴일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위 지도상에서 청색 실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날 고하도에서의 트레킹 구간이며,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잠시 머물거나 혹은 지나쳐 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