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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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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10일 토요일 오전 11시11분
마니산 산행을 위해 도착한 곳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
마니산국민관광지 입구이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따뜻하다. 온 몸으로 봄을 느낀다.





오전 11시18분
오래 전 옛날인 단군 기원 51년(BC 2282년)에 단군 왕검께서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塹城壇)으로 향하는 산길로 접어든다.
좌측으로 난 계단길은 거리가 2.2km이지만 지금 향하는 산길은 거리가 2.9km이다.
아직은 겨우내 얼었던 두터운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계곡을 따라 잔설이 남아 있다.





오전 11시53분
해발고도 30m 정도 지점에서 시작한 산행길이 40여분간 땀 흘리며 오르자 해발고도 300m에 도달한다.
남서쪽으로 자그마한 산봉우리 너머 서해 바다가 보인다.
남쪽 봉우리 너머에는 흥왕리 마을이 있다.
흥왕리에는 옛날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과 같은 왕도를 만들 때 지어진 이궁이 있던 흥왕리궁터가 있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부분을 망원렌즈로 당겨 보니 멋진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가 보인다.
이곳 마니산 일대는 이른바 마니산 화강암(Manisan granite)이라 칭하는
선캄브리아기의 오래된 암석의 대표적인 지역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저처럼 멋들어진 바위를 보게되는 것일게다.





오전 11시57분
참성단까지 1.2km를 남겨둔 능선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 서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옅은 안개에 휩싸인 바다에 작은 섬들이 보인다.
신도,모도,시도, 그리고 길게 드리운 장봉도의 모습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낮 12시6분
이제 참성단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800m 남짓.
남동쪽으로 참성단이 자리한 봉우리의 윤곽이 드러난다.





낮 12시16분
해발고도 400m에 조금 못미친 지점에서 가파른 나무 계단을 만난다.
지난 2006년 6월 강화군 관광시설관리사업소에서 설치한 이 나무계단의 이름은 "삼칠이계단"이다.
아마도 계단 수가 372개인듯 싶은 이 나무계단을 오르는데 산행객들은 무척 힘들어 한다.

통상 아파트 비상계단의 경우 층간 계단 숫자는 대략 15~16개이니
1시간 이상 산길을 오르느라 피로에 지친 다리로 아파트 23,4층까지 대략 70m 높이를 계단을 이용해 오르느라
대부분의 산행객들이 기진맥진한다.





낮 12시32분
가파른 나무계단이 끝나는 봉우리 위에는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어 많은 산행객들이 휴식을 취한다.
잠시 머물며 물 한 모금 마신 후 눈 앞에 보이는 참성단을 향해 위험스런 바위능선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산행길을 이어간다.





참성단으로 향하는 바위 능선길은 양쪽으로 급경사 내리막인 위험한 구간이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이와같은 멋진 바위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솔솔하다.





낮 12시38분
사적 제136호인 참성단 경내는 이와같은 시설물로 보호되어있다.
동절기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절기에는 오후 5기까지 개방된다.





해발고도 468m 인 참성단 앞에는 수많은 산행객들로 붐빈다.
참성단의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았으며
이곳 마니산은 백두산 천지와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한다.
둥근단의 지름은 8.7m이며, 네모난 단은 6.6m의 정방형 단이다.
고려 원종 11년 (1270)에 참성단을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인조 17년(1717) 강화유수 최석항이 전등사 승 신묵에게 명하여 참성단을 수축케한 금석문이 전한다.





지난 1953년 이후 매년 전국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타오르는 성화는
이곳에서 7선녀에 의해 성화가 채화되어 대회장을 밝히고 있다.

지난 1964년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서울 중심에 자리한 학교 체육대회를 위한 성화 봉송주자의 일원으로
이곳 참성단에서 채화한 성화를 여러 학우들과 함께 서울까지 봉송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1970년 강화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인 당시에는 이곳 강화도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건너야 했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 당시 학교 체육대회를 위한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해 봉송했다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죄책감마저 든다.





참성단 앞에서 남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위험스런 바위 능선이 이어진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행객들이 운집한 봉우리에는 헬기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잠시 후 가야할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이곳 마니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이곳 참성단이 자리한 곳보다 4m정도 높은 해발 472m라 한다.





낮 12시44분
참성단을 떠나며 침성단만큼 유명한 소사나무를 다시 한 번 살펴 본다.
규모와 아름다운 자태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표 소사나무로 명성을 얻은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502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참나무목 자작나무과인 소사나무는 원산지가 우리 대한민국으로
영문 이름 또한 "Korean Hornbeam"이다.





낮 12시50분
참성단을 떠나 나무로 만든 마니산 이정표가 있는 바위 봉우리에서 참성단 쪽을 바라본다.
따뜻한 봄날을 맞아 많은 산행객들이 이곳을 찾아 주말을 즐기는 모습들을 바라보니
나 또한 덩달아 행복감에 빠져 든다.





모든 사물은 가까이에서 보아야만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멀리 보아야 나무만이 아닌 숲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우리 주위에는 산재한다.

참성단은 민족 제1의 성적(聖蹟)으로, 마니산 제천단(摩尼山祭天壇),참성대(塹城臺),·참성 초단(醮壇),·
마리산 초단,·마니산 초성단(醮星壇),마리산 제성단(祭城壇)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은 역시 참성단(塹城壇)이다.





낮 12시53분
멀리 보이는 마니산 최고봉을 향해 남동쪽으로 산행길을 이어간다.

마니산이 자리한 위치는 예전에는 강화도와 떨어져 바다 한 가운데 서 있던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다.
그러던 것이 1664년 강화도 유수인 조복양이 강화도의 가릉포(嘉陵浦)와
고가도의 선두포(嘉陵浦) 사이에 둑을 쌓아 강화도와 고가도를 연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성단을 떠나 마니산 최고봉으로 이르는 남동 방향의 능선길에는 이처럼 멋들어진
기암괴석들을 무수히 만난다.
이곳 마니산은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리웠는데,
마리란 고어로 머리를 뜻하니 강화 사람들이 마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뜻한다.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되어 있으며 그 뒤에 마니산(摩尼山)으로 바뀌었다.





멋들어진 바위 바로 옆 이와같은 돌비 앞에는 '참성단중수비'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새겨진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가로 50㎝, 세로 105㎝인 이 비석은 참성단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써
8행 238자를 새겨 넣었다 한다. 주요 내용은 당시 강화 유수 최석항(崔錫恒)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마리산에 올라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선두포별장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 총섭 신묵(愼默)에게 명하여 보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온통 크고 작은 화강암,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좁은 능선길을 따라 이어지는 산행길은
위험한 길이다. 걷는 속도 또한 무척 더디다. 마니산 최고봉은 아직도 멀리 보인다.





지나온 방향인 뒷쪽을 돌아본다. 아찔한 돌무더기 능선길을 산행객들이 줄을 이어 따라온다.
어찌보면 거대한 파충류의 등짝에 돋은 비늘을 밟고 지나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멀리 10여분 전 지나온 참성단이 까마득히 보인다.





오후 1시10분
마니산 최고봉으로 으르는 길목에서 또 다시 나무계단을 만난다.
이 계단의 이름은 '칠선녀계단"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계단의 숫자는 불과 몇십개에 지나지 않는다.





칠선녀계단을 다 올라간 후 지나온 쪽인 참성단쪽 능선을 바라다본다.
옅은 안개로 인해 바다 풍경이 선명치 못함이 못내 아쉽다.





망원렌즈로 당겨 보는 참성단이 자리한 바위 봉우리의 경관이 멋지다.

≪수산집 修山集≫의 <동사 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강화의 옛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단은 높이가 17척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 6치요 아래는 둘레가 60자이다.
혹자에 의하면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神明)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제터를 닦아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제단은 반드시 수중산(水中山)에 만드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세운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 마니산 최고봉인 해발 472m 봉우리는 주위 경관 또한 무척 멋진 곳이다.
시원한 봄날의 바닷바람을 한껏 들이킨다.





식물이 자랄 것 같지 않은 바위 틈을 뚫고 나와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는
붉은 껍질 빛깔이 선연한 소나무를 바라보며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생각해 본다.

48년 전인 1964년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이곳에 성화 봉송을 위해 왔던 그 때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못 살던 나라 중의 하나였었다.
당시 장충체육관을 지어 준 필리핀이라는 잘 사는 나라를 무척 부러워했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을
이제는 필리핀 사람들이 부자나라 사람들이라며 거꾸로 부러워 한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남쪽으로 흥왕리 마을 너머 강화도 남쪽의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우측에 길게 누운 섬이 지난 해 6월19일에 다녀온바 있는 장봉도이다.
그 좌측으로 모도,시도,신도 등 작은 섬이 이어진다.
그 너머 바다를 건너면 인천국제공항이 있다.
청명한 날씨였으면 끊임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이 줄을 이었을텐데 안개가 시야를 방해한다.





오후 1시25분
마니산 최고봉인 해발 472m 부근 바위에 걸터앉아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로 기력을 보충한 후
1.8km 거리의 함허동천 쪽으로 방향을 잡아 하산길에 나선다.
한동안 이와같은 파충류의 등딱지 마냥 생겨먹은 능선길을 조심스레 지난다.





오후 1시40분
능선길이 끝나고 가파른 내리막 산길로 접어들기 전 동쪽 방향으로 눈길을 돌린다.
멀리 오전에 차를 타고 지나온 초지진 너머 김포시로 이어지는 초지대교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강화도와 김포시 대곶면을 잇는 길이 1.2km의 초지대교를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귀가길에 또 다시 차를 타고 지나야할 저 초지대교는 강화대교의 남쪽 10여km에 위치해 있다.

저곳에는 우리 민족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초지진(草芝鎭)이 있던 곳이다.
1656년(효종 7년)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던 진지인 저곳.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에 의해 유린 당하고,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에게 함락당했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
그도 모자라 1875년(고종 12년)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의 침공을 받은 후
이듬 해닌 1876년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에 의해 우리 민족의 치욕이 시작된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마니산을 찾은 이들 중 과연 몇명이나 이와같은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우리나라를 지키는 길은 우리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기본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을지?
오랜 세월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에 다니며 역사를 배운 기억들은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오후 2시2분
마니산 정상부를 이루는 능선길을 벗어나 가파른 내리막길로 하산하며
서쪽 하늘을 올려다본다. 조금 전 내가 지나온 바위 능선길을 지나는 산행객들의 실루엣이 눈에 비친다.
저들의 힘있는 발걸음을 바라보며 초지진의 역사를 생각하다 울적해진 마음을 추스른다.





오후 2시26분
귀가 차량이 기다리는 함허동천 주차장까지 500여m를 남겨둔 지점의 정자에 올라
동쪽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를 바라보니 비로소 울적했던 마음이 가벼워진다.
좌측의 높은 봉우리는 전등사라는 고찰을 품에 안은 길상산이고,
사진 한 가운데 자그맣게 솟은 봉우리로 보이는 부분은 자그마한 섬인 동검도이다.





아마도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이름 붙인듯 싶은 자그마한 정자인
'함허정'에서 내려오면 산길이 끝나고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나타난다.
관광지에 만든 전망용 정자라면 주변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목재를 이용하여
조금은 품위있게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숲 속의 정자를 콘크리트로 만들고, 흰 페인트 칠을 해 놓다니...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로 변 헐벗은 나뭇가지에서 봄 소식을 눈으로 확인한다.
멀리서는 느끼지 못하지만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연초록빛의 새 순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봄은 이미 우리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비록 바로 옆 계곡의 얼음은 아직 다 녹지 않았고,
추운 겨울 동안 쌓였던 눈도 아직은 다 녹지 않았지만,
우리 마음 속의 봄 소식이 저 흰눈 정도는 시나브로 녹여줄 것을 믿는다.





오후 2시48분
함허동천 주차장에 도착하며 3시간 30여분에 걸친 마니산 산행을 마감하고 귀가 길에 오른다.

"함허동천(涵虛洞天)" 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 이라는 뜻이라 한다.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가까이 위치한 정수사(精修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며.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涵虛洞天(함허동천)" 네 글자가 남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