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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의 금강산 속리산 눈산행

2010년 2월15일 오전 9시59분.
3일간의 짧은 설 연휴 마지막 날 아침.
연휴 기간의 2일간을 나태하게 보낸 몸의 활력 보충을 위해
속리산에 오르고자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위치한
속리산 국립공원 화북분소 앞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지난 주 며칠간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지만
산간 지방에는 눈이 내린 관계로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있다.
더구나 적당한 습도가 유지된 기후 탓인지
고지대의 아름다운 상고대까지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오전 10시 16분.
산행 기점인 화북분소에서 문장대까지의 총 거리는 3.3km 정도.
가파른 경사를 500 여m 오르는 동안 이처럼 발목까지 빠질듯한
순백의 눈 세상이다.

상주시의 거의 30여개에 달하는 동,면의 이름 중에는
화동,화서,화남,화북이라는 면이 있다.
과거 신라시대에 답달비(答達匕), 답달건비(答達建匕),
또는 답달비현(答達匕縣)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16년에는 화령현(化寧縣)으로 명명된
중화지구(中和地區)를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 네 방향의 면이 그것이다.

비록 아침 기온이 영하 7도 이하로까지 떨어진
추운 날씨이긴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듯이
눈 쌓인 계곡에서 들리는 겨우내 얼어 붙은 두꺼운 얼음을 뚫고
약동하는 새 봄을 맞는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오전 11시9분.
산행 시작한지 1시간 이상이 지나니 온 몸에 땀이 배어 든다.
반대편 법주사 쪽에서 오르는 산행로는 초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지만
화북에서 문장대를 오르는 이 코스는 초반 경사가 가파른 곳이다.
흰 눈의 아름다움에 취한 때문인지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을
2km 이상 지난 이제 문장대까지 1km 정도 남은 지점이지만
그리 힘든줄을 모르겠다.
해발 800m에 가까운 지점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몸을 한결 가볍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상고대(hoarfrost on the tree) 란 다른 말로 나무서리(수상;樹霜 ;air hoar)라고도 한다.
겨울철 날씨가 맑은 밤에 기온이 0도 이하 일 때
대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승화[sublimation,昇華]되어 차가워진 물체에 붙는 것을 말한다.
지난 1월 하순 태백산, 그리고 지난 주 계방산 등 해발 1.500m가 넘는 고산
산행시에 건조한 날씨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상고대를
이곳 속리산에서 만난 것도 큰 행복 중 하나일 것이다.

오전 11시14분.
해발 800m를 넘어서면서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다.
설 연휴 기간중인지라 산행객들이 적은 것 또한 조용한 눈산행에
큰 도움을 주는 대목이다.

흰 눈을 잔뜩 머금은 산죽 군락을 지나며 불현듯
신라시대 학자이신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시 한 수가 머리에 떠 오른다.
"바르고 참된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은 그 도를 멀리 하려 들고,
산은 속과 떨어지지 않는데 속이 산과 떨어졌다."

오전 11시18분.
산죽 군락을 지나며 넓게 시야가 트인다.
문장대까지 정확히 1km가 남은 지점에서
비교적 가까운 주위 능선의 눈꽃들, 그리고 상고대를 바라보며
한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영하의 추운 날씨이지만 따사로운 햇빛을 받은
상고대가 녹기 시작한다.
나보다 1시간쯤 늦게 산행을 시작하는 산행객들은
이 아름다운 상고대를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이제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까지 든다.

오전 11시48분.
해발 900m를 훌쩍 넘어 1,000m에 육박하면서
등산로는 눈꽃 터널에 한동안 이어진다.
백설공주를 모시는 난쟁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동화속을 천천히 걷는 이 기분은 겨울 눈산행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큰 행복 중 하나이다.

햇빛조차 들지 않을 정도의 눈 터널을 지나는 중에도
가끔 고개를 들면 이런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푸르디 푸른 하늘 빛에 어울려 햇빛을 받은
나뭇가지가 반짝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뚫고 비치는 따사로운 햇빛이
나뭇가지 가장자리의 눈꽃을 서서히 녹여가는 모습도 보인다.

낮 12시2분.
이제 해발 1,000m를 넘었다.
문장대 바로 아래의 넓은 공터인 문장대 휴게소로 이어지는
수목 보호를 위한 울타리가 있는 산행로에서는 발목까지 눈이 빠질 정도로
푹신푹신한 솜털같은 눈을 밟고 지난다.

낮 12시6분.
햋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문장대 바로 아래 휴게소에는
힘든 산행으로 지친 몸을 달래며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산행객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속리산(俗離山)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게
속세를 떠난 신선의 세계를 찾은듯한 첫 느낌이다.

2시간 여를 어깨에 짊어지고 올라온 배낭을 벗어 내려 놓고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주의의 능선들을 바라 보는 기분은
마치 온 세상이 내 것인양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낮 12시19분.
10여분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한 후 해발 1,054m로
이곳 속리산의 상징인 문장대(文藏臺)로 발길을 옮긴다.
평소 주말이면 저 정상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붐비던
수많은 인파가 없는 한적한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든다.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문장대를 오르는 철계단에서
북동쪽 아래를 내려다 본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졌다는 학창 시절
지리 교과서의 내용이 입증되는 정경이다.

낮 12시31분.
50여명이 앉을 정도의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문장대 정상.
난간에 바짝 붙어 서면 아찔할 정도로 사방이 탁 트인 곳이다.
큰 암석이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雲藏臺)라고도 불린다는 백과사전 글귀가 틀린 말이 아니다.


이곳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 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가 실감 난다.
내륙의 금강산 또는 소금강산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낮 12시 36분.
문장대에서 내려와 눈터널을 다시 지나 하산길에 나선다.
784년(신라 선덕여왕 5년)에 진표(眞表)를 따라 입산수도한 농부들의
심정으로 돌아가며 속리산(俗離山)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입 속으로 되뇌인다.

오후 1시12분.
문장대를 떠나 법주사로 이어지는 약 6km의 하산길.
오전에 화북에서 오를 때와는 달리
해발 900m부근까지는 급경사길을 내려가야 한다.
눈 쌓인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이 무척 위험하다.

오후 1시37분.
냉천골 휴게소에서 뜨거운 어묵 한 냄비로 추위와 갈증을 달랜 후
기운을 차려 다시 하산길을 이어간다.
볏짚으로 지붕을 잇고 그 위에 함석을 덮은 휴게소 주인 아주머니의
말로는 해발 900고지라고 하지만,
팔목에 찬 고도계로는 800m가 조금 넘는 곳이다.

오후 1시52분.
법주사까지 약 4.5km가 남은
중사자암 부근을 지난다.
우리나라 고산지대에서 간혹 눈에 띄는
참새 크기만한 텃새인 동고비가 눈 앞으로 지나갔지만
금방 숨어 버려 카메라에 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진한 오렌지색이 섞인 앙증맞게 예쁜 녀석인데...

오후 1시58분.
수많은 암반들이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는 곳인지라
이처럼 철계단이 까마득하게 만들어진 곳이다.
아마도 보현재 부근이리라.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하고도 미끄러운 길인데
운동화만 신고 산행하는 사람이 눈에 띄어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안전이 크게 걱정된다.

오후 2시25분.
용바위골 휴게소 앞 의자에도 산행객 몇몇이
음료수를 앞에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잠깐 앉아 휴식을 취하려다 70이 넘은 휴게소 주인 부부의
부부 싸움 소리가 시끄러워 급히 자리를 떴다.
마음 속으로 그 노부부에게 한 마디 남긴다.
"속세를 떠나시오!"

오후 2시32분.
법주사까지 약 3km남은 지점에서 "이뭣고다리'를 지난다.
"이뭣고"란 불교에서 참선수행의 대표적 화두로 꼽혀온 것으로
지난 2005년 여름에도‘간화선의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를 통해
논쟁을 촉발 시킨 동국대 교수 성본 스님에 대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가을 다녀온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 있는
안내문에서는 "이뭣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禪(선)을 참구(參究)하는데
疑題(의제)로 하는 것을 話頭(화두)라 하고.
話頭는 1700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 本來面目(본래면목)
是甚磨(시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뜻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의제를 의심하기 위하여
"이뭣고?"하며 골돌히 참구하면 본래면목,
즉 眞我(참된 나)를 깨달아
生死(생사)를 解脫(해탈)하게 됩니다.---

오후 2시47분.
조선 7대왕 세조가 이곳에서 피부병 치료를 위해
목욕을 한 후 몸의 종기가 모두 없어졌고,
그 후 이름이 붙여졌다는 "목욕소"앞을 지난다.

눈 덮인 얼음 사이로 흐르는 물이 너무 깨끗해 보인다.
당시 약사여래의 명을 받고 온 월광태자라는 미소년이 나타나
세조의 피부병이 곧 완쾌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듯도 하다.

오후 2시54분.
이제 법주사까지는 2km가 남았다.
아직도 눈 쌓인 길을 걷는 발 밑에서 "뽀드득" 소리는 이어진다.
산행이 끝난면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더 못볼 것을 우려하여
아름다운 계곡에서 눈을 뜰 수 없다.
이 아름다움을 망막에 깊이 각인 시킨다.

오후 15시7분.
눈 쌓인 숲길을 홀로 걸어가는 저 산행객의
뒷 모습에서 평화로움과 여유가 느껴진다.
나 자신 비록 5시간이 넘는 산행에 다리는 피곤하지만
부드러운 눈길을 밟으며 걷는 기분을 오래 이어가고 싶어진다.


오후 3시24분.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법주사의 상징처럼 치부되어버린
청동미륵불(또는 금동미륵불)이 반가이 맞아 준다.
이 자리는 원래 조선 후기까지 35칸에 2층으로 된 법주사의 중심 법당인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었고,
그 안에 금색의 육장상(六丈像)이 있었다.
그러나 1872년 당백전(當百錢) 주조 명목으로 대원군에 의해
육장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도 헐리는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100 여년 이상이 흐른 후인 1989년 사월 초파일에 이 자리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이 점안되어 법주사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다.
그 후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한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는 기록이다.

오후 3시51분.
법주사 일주문을 떠나 귀가할 차량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기둥을 한 줄로 하여 짓는 사찰의 일주문에는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 법주사의 일주문에는 '호서제일 가람'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여기서 호서(湖西)라는 말의 어원은 몇가지 설이 있기는 하나
충북 제천 의림지(義林池)를 기준으로 서쪽에 있다하여 충청도를 부르는 별칭이 되었다 한다.

오후 4시12분.
6시간이 넘는 긴 여정 끝에 차량이 기다리는 주차장 부근에 도착했다.
직선 거리로 7~8km떨어진 문장대를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오전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이제 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짧은 겨울 해는 서쪽 산으로 넘어간지 오래이다.

늦은 오후 시간이어서인지
문장대 정상 암반 위에도 인적이 없다.
별칭인 운장대(雲藏帶)라는 이름에 걸맞게
구름에 걸린듯한 문장대를 바라보며 휴일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