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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가 태어난 다산초당을 찾아서

2010년 3월6일 토요일 낮 12시17분.
전남 강진군 도암면의 만덕산 산행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를 집필한 다산초당을 찾아서
봄비 내리는 주말 아침 대전을 출발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용문사 입구에서 차를 내려
10여분 걸으니 용문사 경내에 당도한다.

남쪽 바닷가 따뜻한 고장답게
봄비에 함초롬히 젖어든 열대식물이 길손을 반가이 맞이 한다.

지난 밤부터 계속 내리는 봄비는
지난해 가을부터 이처럼 붉은 빛으로 열매를 맺은
청미래덩굴의 작은 둥글고 붉은 열매에도 촉촉히 내려 앉는다.
중금속 해독 등에 약용으로 쓰이며,암수 딴그루이고
흔히들 망개 열매라고 부르는 요염한 붉은 열매를 타고
빗방울이 계속 대지를 적신다.


낮 12시24분.
아주 작은 규모의 사찰인 이곳 용문사는
과거에는 석문사라는 이름이었으며 백련사 소속 암자였다 한다.
지난 1947년 박계수향이 개축 후 명칭을 용문사로 고쳤다 한다.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대적광전,무량수전 등등의 한자식
법당 이름 대신 "큰법당"이라는 명칭의 현판이 붙은
용문사 뒤 바위산 너머 석문산을 거쳐 만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완전히 비구름에 가려 있다.
더구나 보슬비가 계속 내리는 궂은 날씨를 감안해
만덕산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다산초당과, 동백꽃 군락지가 있는 백련사를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되돌린다.

낮 12시57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보동마을에 자리한 다산유물전시관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다산초당으로 향할 채비를 한다.

유물전시관 뒤쪽인 북쪽 능선으로도 짙은 비구름이 덮여 있다.

오후 1시29분.
다산유물전시관 앞 쉼터에서 점심을 마친 후
다산초당을 향해 빗속을 걷는다.

순간 눈 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매료시킨다.
10여년 전 조성한 두충나무 숲길이다.
마치 버드나무처럼 쭉쭉 뻗은 나무숲길이 너무 아름답다.
더구나 촉촉한 봄비가 내리는 오늘같은 날은..

오후 1시38분.
껍질을 벗겨 한약재로 쓰기 위해 두충나무라를 심었으나
중국산이 밀려들어와 가격경쟁력이 떨어지자 숲길을 조성한 두충나무 숲길.
불과 20~30m 정도의 길이에 불과하지만 그 숲길에서
한침을 머물다 다시 다산초당을 향해 빗속을 걷는다.

봄비 내리는 숲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정경이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아름다운 길이 이어진다.

오후 1시58분.
만덕산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따라 다산초당쪽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오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땅위로 드러난 나무 뿌리들이 숲길을 가로 질러 지난다.
이 길을 일컬어 정호승 시인은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나무밭에서 흔히 보던 뿌리가 땅 위로 솟은 모습을
소나무 숲에서도 보며 걷는 길이다.

오후 2시10분.
다산 정약용이 귀양생활 중 10년을 보낸 다산초당에 당도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경상도 포항 장기현에
유배되었던 다산은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터지자
그해 10월 유배지에서 체포되어 다시 강진으로 귀양지를 옮긴 후
강진읍에서 8년을 보내고 18년의 귀양생활 중 10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낸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남긴 흔적 가운데 4개를 꼽은 다산4경이 있다.
이 작은 바윗돌은 다산3경으로 차를 끓일 때 사용했다는 평평한 돌인 ‘다조(茶竈)'
즉, 차를 끊이는 일종의 부뚜막이었다.

다산 1경인 ‘丁石(정석)’의 모습이다.
다산초당 뒤 커다란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글이라 한다.
자신의 성(姓)에 돌 석(石)자 한 자만을 새긴 그 자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강인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여기 저기에서 집자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다산은 이곳에서 10년을 묵으며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위대한 저서를 집필한다.
머릿속으로는 목민심서 중 내가 좋아하는 한 귀절을 떠올리며,
다산이 즐겼다는 녹차 한 잔으로 봄비에 젖은 몸을 잠시 녹여 본다.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백련사 동백림이 가까이 있어서인지
초당 앞의 동백꽃들은 그 붉은 빛이 유난히 강렬하다.

겸손한 마음, 신중, 침착 등이 꽃말인 동백꽃이
다산의 성품과 잘 어울리는듯도 하다.
그러고 보니 동백을 한자로 산다화(山茶花)라고도 부르는 것이
다산(茶山)이라는 정약용선생의 호와도 잘 어울린다.

오후 2시32분.
다산4경 중 제4경인 초당 옆 연못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을
뒤로 하고 백련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다산은 당시 바닷가에 있는 반들반들한 돌을 주워 봉우리를 쌓아 석가산이라 했고,
그 주변 연못엔 잉어를 키우며 자라는 잉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그 반들반들한 돌은 없어지고
이끼 낀 자그마한 돌들만 남아 세월의 흔적을 보여 준다.

본채인 다산초당과 연못을 사이에 둔 다산 선생이 거처했던 동암이다.
다산동암이라는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그 왼쪽의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은 추사의 친필이라 한다.

오후 2시35분.
동암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정자 천일각(天一閣)이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말로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다산은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던 곳이라 한다.
원래 없었던 정자였지만 1975년 강진군에서 세운 것이다.

저수지인 만덕호와 그 너머로 강진만 바다를 보고 싶었지만
봄비 내리는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 옛날 다산도 오늘같은 날은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리라.

오후 2시44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800m 오솔길을 계속 이어간다.
이제 비는 거의 내지지 않지만 물기 머금은 공기가 얼굴을 기분 좋게 적셔 준다.
다산의 정취가 흠뻑 묻어 나는 이 길은
그의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였다. 두 선인이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던 그 길.
그리고 다산 스스로 학문의 깊이를 더했을 그런 산책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자랑했던 호젓한 길이다.

오후 2시53분.
바다위에 뜬 달이라는 ‘해월루(海月樓)’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지난 2006년 강진군에서 다산 정약용 실학성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덕산 등산로 옆 오솔길 등성이에 2층 십자형으로 4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지은 것이다.
서울 북한산 중흥사 비석거리 앞에 세워진 ‘산영루’의 형태를 재현한 것이라 한다.

청정해역 강진만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이건만
짙은 비구름이 앞을 가려 마음 속으로만 강진만의 갯벌을 그려 본다.

해월루를 만든 이유는
“낮에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물을 보고 사물에 해방되어 편안한 마음을 기르고
밤에는 떠오르는 달을 보고 자기를 희생하여
남에게 베푸는 일을 하기 위한 원기를 기르자.”는 뜻에서라 한다.

비록 강진만의 아름다움을 조망하지는 못했지만
꽃말이 절제,사랑의 희열 등으로 불리는 진달래를 만난다.
봄비에 젖은 우리 민족의 정과 한을 담은 진달래를 보며,
'자산어보'를 쓴 형님 정약전이 귀양살이하는 흑산도에서의
험난한 삶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을 다산의 마음을 느낀다.

오후 3시
해월루를 뒤로하고 다시 백련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담소를 나누며 걷는 저 두 분을 바라보며
19세기 초 오랜기간 서로의 교감을 나누던
다산과 혜장선사의 모습을 그려 본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후 3시6분.
백련사 조금 못미친곳 동백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자그마한 녹차밭을 지난다.
이곳 만덕산은 예로부터 야생차가 많이 자생하여 "다산(茶山)"이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호를 이 산 이름을 본떠 다산이라 정했을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이곳을 아꼈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제 유난히 키가 큰 동백숲이 이어진다.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이곳 백련사 동백림은
고창 선운사, 여수 오동도 등과 함께 전국 최고 동백군락지로 손꼽힌다.

오후 3시13분.
바닥에 나뒹구는 선홍빛 동백꽃을 즈려밟으며 백련사로 걸음을 재촉한다.
다른 꽃과 달리 봉오리째 떨어져 나무 밑을 붉게 물들이는 동백꽃을 보니
참수 당한 죄수들의 머리를 보는듯하다.
순조 1년(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기인하여 유배생활이 시작된
다산과 그의 큰 형인 정약전, 그리고 참수형을 당한 다산의 또 다른 형님인
장약종과 누나의 남편인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 이승훈이 생각난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

오후 3시17분.
동백나무 숲 사이로 백련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백련사는 고려시대 신앙결사였던 백련사결사운동의 본거지였다.
백련결사는 고려 시대 최씨 무신정권이 성립한 후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한 기존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으로 전개된 운동이다.
1216년(고종 3) 이곳 백련사에서 천태종 승려 요세(了世)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요세는 농민· 천민층을 포함한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실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정토신앙이 민중 속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고색창연한 대웅전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에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는 용두(龍頭)로 장식되어 있는데,
다포(多包)기둥 건물이다.

오후 3시30분.
백련사를 떠나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다산유물전시관으로 향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당시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리웠다가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후 3시49분.
백련사에 올 때 걸었던 숲길을 버리고
돌아가는 길은 백련사에서 55번 지방도로 이어지는
백련사 진입로를 따라 걸어본다.

20여분을 걸어 내려오는 2차선 도로 양쪽에
이처럼 아담한 동백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바랑을 울러 메고 여유있게 걷는 스님의 뒷 모습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오후 4시3분.
당초 출발했던 다산유물전시관이 있는 보동마을 입구에서
봄비에 젖은 채 꽃망울을 활짜 터뜨린 매화를 만난다.

귀양생활 중이던 1813년 여름,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를 보내 왔다.
다산은 그 비단 치마폭 위에 그리움을 흠뻑 담아 그림을 그렸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다.
다산은 그림 밑에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내음성과 내한성이 강하여 바닷가 근처에서도 잘 자라는 생강나무도 만난다.

진달래처럼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이 생강나무는
암수 딴 그루로 꽃과 잎, 가지에서 생강 같은 알싸한 냄새가 난다.

오후 4시5분.
4시간여에 걸친 다산초당과 백련사 산책을 마감하고 귀가 준비를 한다.
비구름으로 덮인 만덕산 능선을 보며 주말 하루를 마감한다.

미릿 속에 그 옛날 귀양살이 중 다산이 큰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한 귀절을 떠올려 본다.

“폐족일수록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