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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산,바다가 모두 푸른 청산도 산행기

2010년 2월28일 일요일 오전 10시32분.
대전을 떠나 4시간 이상을 달려온 끝에 도착한 전라남도 완도.
완도 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행 카페리에 몸을 싣는다.

3일연휴기간인지라 청산도로 향하는 승용차와 버스가
초만원을 이룬다.

오전 10시47분.
오전 10시40분 출항한 오늘 첫 배는 사람과 차량을
가득 싣고 19km남짓 떨어진 하늘,바다,산 모두가 푸르다해서
'청산(靑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청산도를 향해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간다.

왼쪽에 완도 부두에서 150m 해상에 있는 무인도인 주도[珠島]가 점점 작아진다.
섬의 모습이 구슬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주도는
식물생태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다.

오전 10시50분.
완도항 방파제를 벗어나며 청산도를 향하여 남으로 나아간다.
통일신라 시대의 해상왕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으로 유명한
이곳 완도는 빙그레 웃을 완(莞)자와 섬 도(島)자를 써서,
고향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오전 11시17분.
파도가 거의 없이 유난히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선박의 갑판 위에서 기분 좋은 봄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니 무척 상쾌한 기분이다.
완도항 방파제를 벗어나며 어렴풋이 보이던 청산도가
이제는 그 모습을 완연히 드러 낸다.

오전 11시28분.
청산도의 면소재지인 도청리항 방파제 안으로 들어선 카페리는
조용히 선착장에 정박을 시작한다.
완도항을 떠난지 50여분이 경과한 시간이다.

오전 11시31분.
청산도 선착장인 도청리에 발을 내딛는 이들이 맨 처음 만나는
청산도의 상징물이다.
조선 현종대(1660년경)에 장수 황씨가 고금에서,
그리고 나주 정씨가 장흥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당초 불목리라 하였으나 국설 도봉청이 설치되면서 도청리라 불렀다 한다.

어제 연휴 첫날 이곳에서 밤을 보낸 관광객들과
그들이 타고온 차량들로 북새통인 선착장을 벗어나
고성산,보적산 산행을 위해 산행 들머리로 이동한다.

오전 11시46분.
해안가를 벗어나 산행을 위해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
길가 돌담 안쪽에서 매화꽃이 길손을 반갑게 맞는다.

설중매(雪中梅)라는 말로 우리 귀에 친숙한 매화.
겨울이 다가기 전 아직 잔설이 난분분한 시절에 피기 시작하는 매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꽃이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국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
이제는 우리에게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꽃이 되었다.

오전 11시59분.
청산중학교 분기점 위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며
조금 전 지나온 도청리항을 뒤돌아 본다.
여기서 고성산 까지는 남쪽으로 약 3.2km이다.

낮 12시22분.
고성산 분기점을 지난다.
계속 이어지는 동백숲과 소나무숲.
등산 자켓을 벗고 반팔 차림으로 하는 산행인데도 땀이 솟는다.

이제 고성산까지 1.5km. 보적산까지는 3.9.km가 남았다.

낮 12시41분.
고성산으로 향하는 능선길 전망바위 위에서 멀리 남서쪽으로는
구장리 해안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당리 바닷가도 보인다.
옅은 안개로 시계가 좋지 않아 대모도는 보이지 않는다.

방금 지나온 전망바위의 생김새가 특이하다.
마치 작은 돌을 누군가 차곡차곡 올려 놓은듯도 하다.
아마 오랜 기간 풍화작용을 겪어온 역사를 담고 있으리라.

오후 1시4분.
해발 310m 고성산 정상에서 이마의 땀을 씻는다.
해발 310m에 불과하지만 해발고도가 0 인 바닷가에서 출발하여
벌써 해발 300m에 가까운 산 등성이를 두 번이나 넘었으니
해발 900m에서 출발하여 해발 1,500m이상의 정상으로 오르는
태백산보다 쉽지는 않은 산행길이다.

고성산 정상을 벗어나며 남쪽으로 계속 산행을 이어간다.
돌담과 돌탑 너머로 멀리 보적산 정상이 보인다.
왼쪽 저 멀리로는 청산도의 최고봉인 해발 385m의 매봉산도 눈에 들어온다.

오후 1시7분.
고성산 정상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며 남동쪽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당리 마을의 모습을 보니
비로소 청산도라는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하늘도 푸르고,바다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 뒤 야산을 개간해 만든
다랭이논에는 보리가 무럭무럭 자란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경남 남해 가천마을의 다랭이논의
아름다운 정경에 뒤지지 않는 포근함을 준다.

오후 1시18분.
해발 150m정도되는 도로까지 내려섰다가 다시 보적산을 향해
산길을 오른다.
방금 지나온 고성산이 밝게 빛난다.
이제 보적산까지는 약 1.5km가 남았지만 저 고성산 정도 크기의
야산을 하나 더 넘어야 보적산으로 오를 수 있다.


오후 1시56분.
근 30분 이상을 억새군락과 소나무,잣나무가 이어진
숲길을 걸으며 가쁜 숨을 몰아 쉬다 보적산 정상까지
0.5km정도 남은 지점에서 금년들어 처음으로 진달래꽃을 만난다.

사랑의 희열,신념,청렴,절제 등의 꽃말을 가진 진달래.
여수 영취산의 진달래축제도 4월초에 열리는데
한 달 먼저 진달래를 보니 기운이 절로 나는듯 하다.

오후 1시 59분.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보적산 정상으로 오르는 급경사 돌계단길.
저 앞에 가는 중년부부도 서로 격려하며 땀을 흘린다.

보적산 정상 부근은 암반이 오랜 세월을 지나며
풍화작용 등으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 나고
그로인해 깨어져 나온 돌무더미가 너덜지대를 이루고 있다.
사면의 작은 돌무더미가 떨어져 내릴듯 위험해 보이기조차 한다.

오후 2시9분.
보적산 정상에서 남서쪽 방향의 구정리,권덕리 마을 쪽으로 보이는
논밭과 바다도 푸르고 아름답다.
깎아지른 절벽 끝 부분의 바위들도 갈라진 틈이 보일 정도이다.

남동쪽으로는 멀리 청산도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범바위와
산행을 하지 않는 일반 관광객들을 위한 전망대가 있는
부드러운 능선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본디 승천할 이무기가 바다에 살고 있었는데 범바위의 위력에 눌려 승천할 수 없자
앙심을 품고 매일 이 섬을 안개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섬을 치러 나온 왜적들과 한 패가 돼 섬을 공격했는데
결국 범바위 호랑이가 이무기를 무찌르며 안개의 미명을 벗어나
산, 바다, 하늘, 들녘도 푸른 청산도가 됐다 한다.

이곳 보적산 정상에서 1.1km거리인 범바위 전망대와
그 앞 자그마한 광장에는 관광객 10여명이
따사로운 해풍에 온 몸을 맡긴채 이른 봄을 반가히 맞고 있다.

보적산을 이 산 북쪽 기슭의 청계리 사람들은 백산으로
신흥리 사람들은 필봉산으로 불러 왔었다.
청계리 옆으로 폭 2~3m의 피내리고랑이라는 실개천이 있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때 왜군을 격퇴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청산도에 들어오자 청산도 사람들은
부녀자까지 모두 합심하여 돌을 주워다 보적산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왜군을 산으로 유인하여 돌을 산 아래로 굴려 왜군을 격퇴한다.
그리고 작은 실개천은 왜군의 피로 불들게 되고..
그 후 그 실개천은 피내리고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오후 2시17분.
보적산 정상을 떠나 하산을 시작한다.
남쪽으로는 권덕리 마을이 아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1740년대에 제주양씨인 철운과 암양권씨가 이주하며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범바위가 가까이 있어서 호암동으로 불렀다가
1900년에 권덕포라 하였다가 분구되어 권덕리라 하였다.

서쪽으로는 조선 순종 무신년에 제주양씨가 읍리에서 이주해 오며
마을을 이루고 지난 1960년대 초반까지는 척산이라 불리었던
구장리 마을과 그 옆으로 서편제와 해신 촬영지인 해안선도 보인다.

오후 2시25분.
급경사 내리막길에 날카로운 작은 돌이 위험스레 쌓인
위험 구간을 지난 후 버작산 정상을 뒤돌아 본다.
푸른 하늘,흰구름과 어우러진 정상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후 2시34분.
구장리 방향으로 향하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하산길.
오늘 하루 중 가장 하늘이 맑은 시점이다.
억새군락과 자그마한 소나무 등이 어울린 능선에서
산행객들은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오후 2시41분.
산행이 거의 끝날 시점.
범바위가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이다.
보적산 정상에서는 범의 형상이라 느끼지 못했지만
이 위치에서는 웅크린채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눈에 들어 온다.

청산도의 수호신 범바위는 가파른 능선에 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적을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다.
호랑이 한 마리가 저 범바위에 올라가 포효하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 제 소리에 놀라 도망친 뒤
청산도에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오후 3시.
3시간 반에 걸친 산행을 끝내고 구장리 부근 도로에서
보적산을 다시 한번 바라 본다.
남녘땅에서부터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붉은 선혈같은 동백꽃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봄 햇살을 가장 많이 받는 남향한 돌담 아래에 유채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4월에나 피는 노란 유채꽃을 볼 수 있는 것도 이곳이
따뜻한 남쪽 섬마을이기 때문이다.

머잖아 5월이면 시작될 모내기를 앞두고
산비탈을 깎아 만든 앙증스런 다랭이논들도 농번기 준비를 하는듯하다.
지금 한창 자라는 보리를 베고난 후에는 저 논에는
가을 추수를 기다리며 벼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손바닥만한 다랭이논이지만 논두렁 사이로
논물을 대기위한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거린다.
다행스럽게도 금년에는 겨울동안 비교적 많은 눈이 내린데다
2월 들어 지난해에 비해 두배에 가까운 비가 내려
지난해와 같은 심각한 봄가뭄은 없을거라는
기상대의 예보가 반가울 뿐이다.

오후 3시15분.
구장리에서 당리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에서 초분을 발견한다.
요즘은 극히 보기 힘든 모습이다.

초분(草墳)은 풀이하면 ‘풀무덤’이다.
상주가 고기잡이로 멀리 나가 급히 장례를 치를 수 없을 때
바닷가 섬 사람들은 일단 시신을 짚으로 덮어 땅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3년 혹은 5년 뒤쯤 시신이 깨끗하게 썩고 나면 날을 잡아 무덤을 만들었다.
섬마을에서만 행해지던 풍장(風葬)이다.
근래 들어 대다수 섬마을에서 이런 풍습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청산도 곳곳에서는 이 초분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북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완만한 경사의 양지바른곳.
이런 지형 조건은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며
또한 조상을 숭배하는 정신이 강한 우리 선조들에게는
가장 좋은 묘자리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저 당산나무는 수백년은 되었음직하다.
나무 아래에 작은 돌탑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저 나무도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쯤 되리라.

오후 3시37분.
지난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촬영했던
자그마한 초가집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돌담 사이사이에 핀 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 준다.

작은 초가집 마당에 들어가 본다.
벌레 먹어 바늘 구멍이 숭숭난 나무 기둥 한켠에
완도군에서 만들어 붙인 작은 금속 표지가 붙어 있을뿐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듯 하다.
작은 정성이라도 보였으면 싶다.

오후 3시46분.
당리 마을을 지난다.
과거에는 진말이라 하였으나
장보고의 부하였던 청주한씨의 군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정월5일날 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를 연유하여 마을명을 당리라 부르고 있다.

1771년 정월 초 엿새에 청산도에 도착하여 목숨을 건진
장한철의 '표해록'에 이곳 당리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29명 일행 중 8명만 살아 남았고. 청산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귀향한 일행 중 이곳 청산도 여인과 꿈같은 며칠밤을
보내고 귀향했던 장한철의 애틋한 사랑 얘기가 나오는 그곳이다.

오후 4시8분.
처음 출발했던 도청항으로 돌아오니
오전에 나를 반겨주던 낡고 작은 어선들이
그 자리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리다 반겨주는듯하다.
4시간 반에 걸친 도보여행으로 피곤하던 몸의 피로가 가신다.

선착장 앞 공터에는 뭍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과 차량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곳 청산도는 오래 전부터 교육열이 높았다.
"청산리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친척집 버선까지 팔 정도이다."
"청산에서는 글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도 전해 온다.
이는 조선 말기 문신이었던 김유(1814~84)선생의 영향인듯하다.
김유 선생은 거문도에 귀양갔다 귀양을 마치고 귀향중
산세 수려하고 인심 좋은 청산도에 머물렀다.
그리고, 곳곳에 서당을 세우고 후세들을 위해 교육에 힘 쓴다.
그 후 후학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숭모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매년 3월3일 제를 올린다.

오후 4시28분.
돌아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도청리한 이곳 저곳을 둘러 본다.
해산물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방파제를 걷는 여인의 자태가 아름답다.
지난 2007년 신안 증도, 장흥 장평·유치면, 담양 창평면 등과 함께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 City)로 인증된 청산도에서 느끼는
느림의 여유를 보는 것 같아 무척 자연스럽다.

슬로시티는 이탈리아어로 “유유자적한 도시 또는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의미인
칫따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으로
전통보존, 지역민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아직은 밤이 낮보다 긴 시기이다.
이제 낮동안 대지를 비추던 태양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수많은 갈매기떼들도 보금자리를 찾기위한 채비를 서두르는듯하다.

오후 4시47분.
4시40분에 청산도 도청항을 떠난 배가
방파제를 벗어난다.
인천 영종도에서 눈 앞에 보이는 불과 10분 남짓한 무의도를 향할 때나
부산항에서 일본 오사카까지 16시간동안 배를 타고 갈때나
배 떠날 때의 느낌은 항상 서운하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빛을 받은 바다가 은색으로 빛난다.
어제 발생한 칠레의 초대형 지진으로 인한 해일경보가 내려진 일본과 달리
이곳 바다는 너무 잔잔하다.
아마 일본 열도가 거센 태평양의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리라.

오후 4시58분.
출항한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청산도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온다.
하긴 직경이 10km정도에 불과한 원형의 자그마한 섬이기 때문일게다.
지난 1993년 4,000명을 넘던 인구가 이제는 3,000명 정도인 작은 섬
아름다운 청산도의 자연 경관이 오래 보존되기를 바란다.

오후 5시43분.
약 50분에 걸친 항해 끝에 완도항에 도착하여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중 지난 2008년 9월 준공된
높이 76m의 완도타워가 있는 일출공원 앞을 지난다.
저 완도타워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지만
혼자만의 여행이 아닌 단체여행인지라 다음 기회로 미룬다.

오후 6시7분.
주차장 옆 둔덕 위의 나뭇가지에서는 까치가 집짓기에 열심이다.
자신의 몸 길이보다 두 배는 넘을듯한 긴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짓다
떨어뜨린 후 모습이 마치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는듯하다.
이제 저 까치는 잠자리로 들려나 보다.
나 또한 오늘 하루 일정을 마감하고 보금자리를 찾아 귀가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