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11일 토요일 오전 10시58분
조계산 산행을 위해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산행 들머리인 송광사를 향해 숲길을 오른다.
송광사는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법보(法寶)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로써 고려시대 이후 16국사가 배출된
승가의 대표적 승보(僧寶)사찰이다.
송광사를 알리는 위의 표지석을 지나면 바로 만나게 되는
다리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바라보이는 전면의 현판은 '청량각'이지만 뒷편의 현판은 '극락교'이다.
송광사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400m정도.
이 청량각이 세워진 누각 아래 다리 이름이 '극락교'이기 때문이다.
이 극락교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행기다리'라 부르는데
이는 석조 구름다리인 '홍교'에서 '행교'-'행기'로 부름이 변한 것이다.
조계산 자락의 계곡인 홍골,피아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조계산 뒤 산자락인 토타리 삼거리에서 합류하여 맑은 물이 되어 흐른다.
그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여럿 만들어진 가운데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그 다리를 지나며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친구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조금 전 청량각이 놓인 극락교의 모습이 저 석조 구름다리와 흡사하다.
오전 11시4분
3주 전인 11월21일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나마 절반 가까이 남아 있던
나뭇잎들이 이제 거의 다 떨어져 나간 모습에서
가을은 이미 저만치 지나고 겨울이 가까이 와 있음을 실감한다.
오전 11시7분
일주문 옆 길섶의 이끼 낀 바위 하나에서도 오랜 역사의 흔적이 엿보인다.
칙령(勅令) 이라는 글씨도 보이기는 하나 이하영,김규석,조병지 등
한자로 음각되긴 했으나 주로 사람 이름이다.
요즘처럼 사진이라는 기록매체가 달리 없던 시절의 시쳇말로 '인증샷'쯤 되지 않을런지...
송광사의 일주문인 '조계문'을 들어선다.
대부분 사찰의 경우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일주문은
경내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며 이와같은 담이 없이
거의 외로이 서 있다. 아주 특이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 일주문은 최초에 신라시대에 지은 이래 1310년,1464년,1676년,
그리고 1802년에 고쳐 지었다는데, 건축 양식으로 보아
현재의 일주문은 180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얘기다.
송광사의 주 불전인 대웅보전 모습이다.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서도 보기 힘든 우람한 건물이다.
정면 7칸,측면 5칸의 아자형(亞字形) 건물이다.
화려한 다포식 공포를 조합하여 평면이 아(亞)자를 이루는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난 198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오전 11시18분
송광사를 벗어나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 송광사는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이곳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인 1200년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한다.
오전 11시20분
하늘을 찌를듯한 대나무숲을 지나며 비로소 산길이 시작된다.
대나무를 한자로는 죽(竹)이라고 한다.
주로 열대지방에서 자라던 대나무가 북방으로 옮겨질 때 명칭도 중국 남방음이 따라 들어왔다.
‘竹’의 남방 고음이 ‘덱(tek)’인데 끝소리 ‘ㄱ’음이 약하게 되어
한국에서는 ‘대’로 변천하였고 일본에서는 두 음절로 나누어져 ‘다케’로 되었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이 피지 않지만, 필 경우에는 전 대나무밭에서 일제히 핀다.
대나무의 꽃은 대나무의 번식과는 무관한 돌연변이의 일종으로
개화병(開花病) 혹은 자연고(自然故)라고도 한다.
개화 시기는 3년, 4년, 30년, 60년, 120년 등으로 다양하며,
대나무 밭 전체에서 일제히 꽃이 핀 후 모두 고사한다.
오전 11시34분
해발 270m정도까지 올라온 완만한 경사의 숲길.
갑자기 몰아닥친 강추위 덕분에 인적이 거의 없는 등산로의 한적함이
무척 마음에 든다.
오랫동안 비나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 메마른 계곡물
낙엽이 켜켜이 쌓인 가장자리에는 이미 살얼음이 얼었지만
조금씩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수면이 거울처럼 잔잔하다.
그 잔잔함이 움츠린 몸을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추위를 몰고 온다.
오전 11시40분
송광사에서 1km남짓 걸어 온 지점인 '토다리 삼거리'에 당도했다.
이제 해발 고도는 300m를 조금 넘어선듯 하다.
저 다리를 지나면 송광굴목재로 향하게 되지만
지난 11월21일 저 다리를 지나 송광굴목재-보리밥집-큰굴목재를 거쳐
선암사까지 걸었던 경험이 있기에 오늘은 좌측 피아골 방향으로 산행길을 이어간다
오전 11시47분
인적이 전혀 없는 어찌보면 공포감마저 드는 적막한 피아골을 따라 점점 높이 올라간다.
지난 10월23일 단풍이 절정이던 시기에 지리산 노고단에서 피아골로 이어지는
단풍산행을 한 일이 있다.
그곳 지리산 피아골은 예전에 부근에 '피(곡식의 일종)밭'이 많았던데서
연유한 이름이라는데 이곳의 경우는 아직 그 어원을 알지 못하겠다.
오전 11시56분
피아골로 접어든지 15분여가 경과했음에도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다.
여순반란사건 무렵부터 6.25까지의 기간동안 무장공비들이 아지트로 이용했다는
'국골 공비굴'에 대한 안내 간판을 지나며 위치를 찾을 수 없어
행여나 지나가는 산꾼이라도 있으면 물어볼까 했으나 적막강산이다.
낮12시2분
피아골 계곡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녹색 이끼로 뒤덮인 너덜지대를 한동안 지난 후 이처럼 아늑한
낙엽으로 뒤덮인 오솔길이 연이어 이어진다.
낮 12시28분
해발 600m를 넘어서며 산죽군락이 이어진다.
엊그제 내린 첫눈이 아직 녹지 않은채 그대로이다.
아마 저 눈은 겨우내내 이어지는 다른 눈에 뒤덮여
내년 봄까지 녹지 않고 남아 있을듯하다.
낮 12시 40분
해발 700m를 넘은 지점에서 급경사 오르막이 나타난다.
급경사 내리막 길로 하산하는 산행객들의 안전을 위해
굵은 로프를 이어 놓은 곳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엿보이는 것을 보니
아마도 연산봉사거리쯤 되는듯하다.
토다리 삼거리에서부터 1시간을 쉬지 않고 걷느라 조금은 피로한 다리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급경사 길을 오른다.
낮12시44분
해발 750m 정도 지점인 연산봉 사거리 능선에 올라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자그마한 바위 봉우리인 배바위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해발 884m 장군봉이 보인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무척 세차게 부는 곳이다.
이곳 능선 기슭 양지바른곳에서 점심식사 중인 10여명의 산행객들을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누며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셨다. 1시간만에 사람 구경을 한 셈이다.
추풍령과 가까운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서 온 그분들은 선암사에서 출발했으며
조계산 최고봉인 장군봉은 거치지 않고 바로 송광사로 향할 예정이라 한다.
갑자기 찾아온 강추위는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둔하게 한다.
오후 1시6분
연산봉 사거리에서 해발고도 800m대의 능선을 따라 장군봉으로 가는
일반적인 산행 경로를 벗어나 해발 635m인 작은굴목재를 거쳐
장군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해 아늑한 숲길을 따라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20여분 이상을 이런 인적없는 한적한 숲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20여분 이상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얼굴에 땀이 맺힌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에 얼굴을 씻는다.
뼛속까지 시릴 정도의 찬 물에 얼굴을 씻으니
몸에 느끼는 추위를 상쾌한 기분이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오후 1시18분
해발 635m 작은굴목재에 마련된 나무 벤치에서 잠깜 한 숨을 돌린 후
다시 장군봉을 향해 오르막길을 오르기를 10여분.
헐벗은 나무가지 사이로 멀리 '배바위'의 모습이 비친다.
해발 700m정도 되는 지점이다.
배바위를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저 배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아득한 옛날 온세상이 물에 잠기는 큰 홍수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큰 배를 만들어
이 바위에 묶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살아남았다 한다.
성서의 '노아의 방주'와 흡사한 전설이다.
오후 1시36분
배바위 옆에서 조계산 최고의 조망을 즐기기 위해 눈길을 돌려 본다.
그러나, 오늘 새벽부터 강추위와 함께 서해안쪽으로 밀려온 황사 때문에
시계가 극히 불량하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무등산까지 볼 수 있는 곳인데.
비록 옅은 황사로 시계가 맑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거리인 장박골쪽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의 부드러움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오후 1시51분
조계산 최고봉인 장군봉 앞에 도착했다.
세찬 겨울 바람이 휘몰아진다.
오후가 되면서 햇빛이 밝게 비추기는 하지만
피부에 느끼는 온도는 오전보다 더 차겁게 느껴진다.
내일 아침 올겨울들어 최저기온이 되리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이런 때는 잘 맞는듯 싶다.
정상석 아래 시멘트 몰탈 부분을 자세히 살피면
조개 껍질을 섞어 시멘트를 바른 것이 확인된다.
아마도 가까운 벌교가 꼬막 주산지이기에 꼬막 껍질을 섞은듯하다.
이것은 앞에서 거론한 '배바위'에 얽힌 전설과 관련이 있다.
오래 전부터 '배바위'에는 조개껍질이 붙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오래 전 이곳이 바다속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구상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도 오래 전 옛날에는 바다속에 있었음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동쪽 아래로는 멀리 선암사 입구 주차장이 보인다.
산행을 끝낸 후 귀가할 차량이 기다리는 곳이다.
선암사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오후 2시25분
정상 바로 아래 찬바람을 막아주는 양지 바른 곳에서
잠시 동안 늦은 점심식사와 휴식을 끝내고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 지점 부근을 다시 한 번 둘러 본다.
선암사 아래 주차장 지구 너머로 상사호에 가득 고인 파란 물빛이
내년 봄에 시작될 풍년 농사를 예고하는듯 싶다.
오후 2시28분
선암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은 송광사쪽에서 오르던 길에 비해
급경사 내리막 길이다.
더구나 해발 700m 부근까지는 이처럼 눈이 얼어붙은 곳도 간혹 눈에 띈다.
겨울철 산행객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오후 2시30분
해발 700m를 갓 내려선 지점에 작은 옹달샘이 있다.
갈수기인지라 물이 한방울씩 똑똑 떨어진다.
그러나, 한여름 우기에는 충분한 샘물이 고여
목마른 산행객들의 갈증을 풀어줄 중요한 샘물 구실을 하리라.
오후 2시42분
해발 540m정도 지점에서 이와같은 무척 튼튼해 보이는 석축을 만난다.
예전에 암자와 같은 작은 건축물이 있던 자리이거나
혹은 전시에 쓰이던 방어진지터가 아닐까 생각되긴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또 하나의 숙제로 남겨 둔다.
오후 3시4분
장군봉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한 선암사의 여러 암자 중 하나인
대각암(大覺庵)의 모습이다.
대사찰 소속의 암자라기보다는 마치 내 이웃의 시골집 같은 느낌을 준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선암사를 중창 불사할 때
이곳에 머물다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얻은 이름이 대각암(大覺庵)이다.
오후 3시8분
대각암을 지나 선암사로 향하는 길 우측에 예사롭지 않은 자태의
큰 바위가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 본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남문화재자료 제157호인 "선암사 마애여래입상 [仙巖寺磨崖如來立像 ]"이다.
높이 7m 암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이 불상에 대한 문헌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중,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오후 3시12분
선암사의 주불전인 대웅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식의 팔작지붕 구조이다.
내부의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후불탱화에는 영산회상도를 모셨다.
정유재란 이전에는 이 자리에 2층의 미륵전이 있었다 한다.
여러차례의 중건 등을 거치며 한 때는 폐사되기도 했던 이곳 선암사.
지금 이 대웅전 건물은 1824년(순조 24년)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한다.
선암사 "뒷간"즉 화장실의 모습이다.
이곳은 내가 정호승 시인의 시를 통해 처음 접했던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 일주문의 모습이다.
이곳 또한 오전에 지나온 송광사 일주문처럼 일반 사찰에 비해
조금은 특이한 위치에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일주문의 현판 또한 밖에서 선암사로 들어올 때는
'조계산선암사'라는 현판 글씨를 보고 들어 오지만
나갈 때는 사진에서처럼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는
현판을 보고 나간다. 이곳 조계산과 선암사의 옛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후 3시11분
일주문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좌측 길가에 외로이 서 있는 고목나무 한 그루.
500년이 넘은 나무라는데
내 키의 두배는 됨직한 고목나무의 빈틈마다 동전이 촘촘이 박혀있다.
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 본다.
주로 100원짜리인 동전이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저 동전들을 꽂거나 혹은 올려 놓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소원이
좀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동전이 꽂힌 고목나무를 지나 내려오면서
전라남도기념물 제46호인 '선암사 삼인당[仙巖寺三印塘]'앞을 지난다.
862년(신라 제48대 경문왕 2년) 도선(道詵:827~898)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인데,
이 안에 섬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안에 있는 섬은 ‘자이이타(自利利他)’, 즉 남을 이롭게 하면 자신이 잘 된다.
밖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自覺覺他)’,즉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한다.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연못의 명칭에서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연못 양식으로,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한다.
주차장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아담한 누각인 '강선루' 아래를 지난다.
승선교 아래 계곡물에 비친 강선루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곳이다.
보물 제400호인 이 승선교(昇仙橋)는 화강암으로 된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승선교의 치석(治石)과 홍예의 결구(結構)가 벌교 홍교의 것보다 고식(古式)을 띠고 있으며,
그 구조도 웅장한 점으로 보아 영조(英祖) 때 조성하였다는 벌교 홍교보다 조성연대가 앞선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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