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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 내리는 주왕산 국립공원

2011년 6월25일 토요일 낮 12시36분
경북 청송군 부동면에 위치한 주왕산국립공원 입구 주차장에 발을 딛는다.
며칠 째 내리는 장맛비는 쉬지 않고 구질구질하게 내린다.
더구나 제주도를 거쳐 북상중인 태풍 메아리 때문인지
매년 가을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주차장 부근에 인적이 거의 없다.

정면으로 보이는 '기암'부근을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짙은 구름이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을 감싸고 돈다.

낮 12시45분
국립공원 입장료는 없어진지 몇 해 되지만, '대전사'라는 사찰이 등산로 입구에 있기에
문화재 관람료를 내고 매표소를 통과해 대전사 앞에서 잠시 멈춘다.

주차장에서 처음 눈에 들어왔던 눈 앞의 바위 봉우리인 '기암(旗岩)'이
마치 아담한 사찰인 대전사를 온몸으로 호위하듯 버티고 서 있다.

낮 12시59분
대전사 경내는 오후 늦게 하산시에 둘러보기로하고
우측에 대전사 돌담길을 끼고, 좌측으로는 주방계곡의 물길을 끼고
편안한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제법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을 걷는다는건 무척 힘든일이다.
배낭과 옷은 젖어도 무방하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모처럼 비 내리는 날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길 방법이 없기에 아주 조심스레 움직이게 된다.

오후 1시1분
해발 721m인 주왕산 정상까지 2.1km, 주방계곡을 따라 펼쳐지는 폭포 중 하나인
제1폭포까지는 2km를 남겨둔 지점에 자그마한 철제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200m 지점의 '백련암'으로 향한다.

주왕산의 이름은 '주왕'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전사의 부속암자인 이 백련암 또한 주왕과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
즉, 주왕에게는 대전도군이라는 아들 외에 백련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그 딸을 기리기 위해 백련암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일곱 살부터 행자생활을 하셔서 열두 살에 정식 비구니가 되고
일흔 살에 임종하시기까지 대략 육십 년 넘는 시간을 불도를 닦으며 보내시고.
주변에 어려운 이가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가진 것 다 내어주는 버릇 때문에
안동, 청송, 영주 일대에서 ‘걸뱅이 왕초 스님’으로 통했던 백련암 주지로 계셨던
혜명 스님의 얘기는 일반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오후 1시6분
주왕산 정상 방향, 그리고 주방계곡을 따라 올라 3개의 폭포로 연결되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잠시 멈추어 갈등을 겪는다.
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향하면 2km거리의 주왕산 정상이건만,
북상중인 태풍 등을 고려하여 아쉽지만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안전을 위하여 3.1km 떨어진 제3폭포까지 다녀올 요량으로 좌측 길로 들어 선다.

작은 다리를 건너 개울가에 수줍게 피어나는 인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동(忍冬)의 흰 꽃을 만난다.
이처럼 희게 피었다가 노란색으로 바뀌는 때문에 '금은화(金銀花로도 불리우는 꽃.
빗물을 잔뜩 머금은 모습이 싱싱하고 활기차 보인다.

주방계곡의 맑은물이 세차게 흘러내린다.
주왕산 이름의 주인공인 주왕(周王)은 중국 진나라때 벼슬을 지낸 주도라는 사람으로,
진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스스로를 후주천왕이라고 부르며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쿠테타가 수포로 돌아가자 군사를 끌고 몸을 피해 이곳 청송땅까지 쫓겨 왔다는 것이다.
빨치산처럼 산으로 숨어든 주왕은 산문이 되는 주방천 협곡에 산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하여 재기를 꿈꿨지만
당나라의 청을 받은 신라의 토벌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주왕 일당이 모두 토벌된 후 한동안 계곡은 핏물이 시내가 되어 흘렀다 한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 산을 주왕산이라 불렀다.
주왕산에는 수달래란 꽃이 피는데 마치 핏빛처럼 붉게 핀다.
이들이 죽어서 꽃으로 환생하였다고 믿는단다.

주왕산을 여느 산과 구별 짓는 꽃이 수달래다.
수달래는 '수단화(壽斷花)'라고도 하는 진달래과의 낙엽성 관목이다.
꽃 모양이 진달래와 비슷하나 진달래보다 더 진하고 꽃잎에 검붉은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달래는 주왕산 일대에만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 주왕산 인근에서야 수달래로 통하지만, 그 꽃의 정식 이름은 '산철쭉'이다.

여름철로 접어든 지금은 수달래는 이미 다 져 버렸다.
수달래 대신 화사한 색깔의 이 중나리가 탐방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는 모양이다.

오후 1시23분
진행 방향 좌측으로 울창한 나무 숲 너머로 연화봉이 보인다.
저 봉우리 아래에 주왕이 은거하며 군사 훈련을 시켰다고 전해지는
연화굴(蓮花窟)이 있다.
높이 3m, 너비 5m, 길이 10m의 통로형 굴인 연화굴은
주왕의 딸인 백련공주가 성불한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오후 1시29분
제1폭포까지 600m 가량 남겨준 지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바위 봉우리를 만난다.
저 바위의 이름은 '급수대(汲水臺)'이다.

후손이 없던 신라 37대 선덕왕에 의해 38대 왕으로 추대된 왕손인 김주원이
홍수로 범람한 강을 건널 수 없게되자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하여
대궐을 지었으나 산속에 샘이 없어 저 아래 계곡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한 연유로
급수대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우측으로는 주방천 계곡물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바위절벽을 이루는 길.
계속 내리는 장맛비는 산책로 옆 계곡을 따라 흘러 내리며 폭포를 이룬다.

주왕산은 계곡 좌우로 펼쳐지는 기암과 폭포 등의 뛰어난 경치 외에도
울창한 침엽수림과 동식물의 자연생태계가 가장 잘 보존된 국립공원으로 꼽힌다.
깨끗이 보존된 계곡과 골골이 우거진 자연 상태의 원시림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1976년 국내에서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부터 지역민들이 쏟은 정성의 결과를 보는 것 같다.

작은 폭포 옆에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기린초가 싱싱하게 자란다.
우리가 아는 키 큰 동물인 '기린'이 아니라
잎이 옛날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의 뿔을 닮았다해서 이름 붙여진 기린초는
이날 산행중 끊임없이 눈에 띌 정도로 주방천 계곡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오후 1시34분
이 기묘하게 생긴 바위 기둥의 이름은 '시루봉'이다.
바위의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떡 시루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방향에서 보아도 여전히 떡 시루의 모습은 아니다.
차라리 험상궂게 생긴 싸움꾼의 얼굴 형상이 떠오른다.
저 험상궂은 바위가 굳건히 버티고 서서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를 막아 주기를 바란다.

국내의 웬만큼 이름 있는 산에 유난히 많은 이름을 가진 바위의 이름 중 하나가 학소대이다.
내리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며 학소대를 올려다 본다.

학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살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학소대가 이곳 주왕산 외에도
무주구천동,괴산 화양동계곡,경북 봉화 청량산,충북 제천의 월악산 등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이 학과 같은 고고한 인품을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인듯 싶다.

학소대 아래를 지나 암벽 사이를 지난다.
청송은 세종대왕의 아내였던 소헌왕후의 고향이라서 주왕산은 조선시대에 청송 심씨의 선산으로 지정되었었다.
청송(靑松)의 산림은 강원도 산골짜기의 빽빽한 원시림보다는 덜하지만
공기의 신선함은 전국에서 제일이라고 한다.
지명 그대로 숲의 대부분을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어 그렇다는데,
청송은 곧 낙동정맥의 허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던 청송은 옛 이름이 청기현(靑己縣)이었다가
조선 세조에 들어와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예부터 ‘푸를 청’자로 이어 내려오는 고장의 지명을 땅위에 펼쳐 보여주는 곳이 곧 주왕산이다.

오후 1시41분
사방이 거대한 암반으로 둘러싸인 제1폭포를 멀리서 바라보며
암반 절벽 옆에 설치된 목재데크로 만들어진 안전시설 위를 걷는다.

매년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일 때마다 이곳을 찾았지만
시장바닥보다 더 혼잡한 인파로 인해 걷기조차 힘들던 곳.
인적 없는 오늘의 분위기가 너무 좋다.
이미 온 몸은 비로 흠뻑 젖었고, 카메라에도 빗물이 스며 들었지만
인적 없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제1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제1폭포 상단부에서도 한참 머물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 본다.
온통 세찬 물소리만 들릴뿐인 무아지경 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염된 비를 맞기를 두려워하건만 이 순간만은
얼굴을 스치는 빗줄기의 감촉이 차라리 감미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제1폭포를 뒤로하고 계속 제3폭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주왕산에 폭포와 기암절벽이 발달한 것은 이 지역 암석의 대부분이 화산쇄설물인 회류응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왕산을 이룬 회류응회암은 공중으로 날아와 쌓인 일반 응회암과는 달리 화산재가 용암처럼 흘러내려 가다 멈춰 굳은 것이다.
용암 상태의 회류응회암이 냉각되면서 부피가 줄기 때문에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발달하게 되며,
이 주상절리를 따라 이뤄진 침식 작용으로 수직절벽과 계단 모양의 지형, 폭포 등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오후 2시2분
제1폭포를 지나며 금년 여름 처음으로 만나는 여름 야생화인 '꿀풀'를 보게 된다.
'너를 위한 사랑' , '추억' 등의 꽃말을 가진
산기슭의 볕이 잘 드는 풀밭에서 주로 서식하는
꿀풀의 꽃속에는 꽃에비해 유난히 많은 꿀이 들어있어
꿀벌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한방에서는 꽃 이삭을 말려 하고초(夏枯草)라하며 이뇨 소염제로 쓰이기도하지만
특히 갑상선 , 인파선에 특별한 효험이 있으며
꿀풀의 속명인 '프루넬라[prunella]'는 라틴어로
편도선염이란뜻인 독일어의 브루넬라[brunella]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또한 영어명인 셀프힐[Self-heal]은 스스로 치료한다는 뜻이다.

오후 2시8분
인적이 전혀 없는 제3폭포 전망대에서 한동안 비를 맞으며
홀로 고독을 즐긴다.
이곳 주왕산 제3폭포에 올 때마다 제대로 된 구경은 커녕
발 디디기조차 힘들던 곳인데..
다음 번에 이곳에 올 때는 악천후를 골라 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하루 전까지 내가 사는 대전,충청지역에 200m가 넘는 폭우가 내린지라
엄청난 물이 쏟아지는 폭포의 장관을 기대하고 왔건만 이곳 주왕산에는
어제까지 비가 거의 오지 않은듯 폭포의 물줄기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기대한만큼의 많은 물이 쏟아지는 폭포를 보지는 못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 차원인지는 모르나 인적없는 호젓함이 마음에 든다.

오후 2시17분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어찌보면 외로워보이기까지 하는 제3폭포를 뒤돌아 보며
당초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간다.
뒤돌아 보는 제3폭포 주변 경관이 마치 소백산 자락 희방사 바로 아래의 희방폭포의 그것과 흡사하다.
물론 희방폭포의 규모는 이곳보다 훨씬 큰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폭포이긴 하지만..

오후 2시33분
제3폭포를 따나 당초 출발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200m쯤 들어간 곳의 주왕산 제2폭포가 눈 앞에 보인다.
이곳 제2폭포 주위는 제1폭포나 제3폭포와 달리 폭포 가까이 쉬기 좋은 나무숲이 있다.
항상 점심 식사를 곁들인 휴식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건만
이곳 역시 인적이 전혀 없다.
간혹 나뭇잎에 모였다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빗방물 소리만 들릴 뿐 으시시한 느낌마저 든다.

온몸으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물속을 걸어 폭포 가까이까지 가 본다.
소백산,지리산 등 해발 1,500m 를 넘는 고산지대의 계곡물처럼 뼛속까지 시릴 정도는 아니지만
다리와 발에 전해오는 물이 무척 차고 시원하다.
깨끗하고 시원한 폭포수로 한바탕 세수를 하고 발길을 돌린다.

오후 2시47분
1시간여 전 지났던 시루봉 앞을 이번에는 반대방향에서 지난다.

주왕산의 웅장하고 험준한 경치는 이 산의 격렬한 생성 역사의 산물이다.
주왕산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포항 내연산과 함께 중생대 백악기,
지금으로부터 약 7천만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반도가 이 시기엔 현재의 일본보다 화산활동이 더 활발했는데,
지금의 영남 동남부에서 전남 남해안으로 이어지는 활모양의 지역이 그 중심 무대였다.
당시 화산 폭발의 흔적은 안산암이나 유문암 등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지질을 통해 알 수 있다.

출발했던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우측으로 깎아지른듯한 암벽들이고
좌측으로는 주방계곡 밝은 물이 흐르는 아늑한 길이다.

주방계곡은 주왕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주왕산국립공원 탐방객들의 80∼90%가 이 계곡을 찾고 있다.
이 계곡에는 매년 4월 말∼5월 중순경에 수달래(산철쭉)가 피고
수달래가 피는 시기에 맞춰 관할 지자체인 청송군 문화원 주최 수달래 축제가 열린다.

오후 2시57분
온통 이끼와 칡넝쿨로 뒤덮인 돌무더미 옆을 지난다.
돌무더미 가장자리에 입간판이 서 있어 이 돌무더미의 정체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곳은 일명 자하성(紫霞城), 또는 주방산성이라 불리는 산성터이다.
아래쪽 대전사로부터 동쪽 계곡 1km 지점에서 시작하는 산성으로
주왕이 신라군사를 막기 위해 축조했던 것으로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을 거쳐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돌담이지만
지금은 성의 형태를 지닌 곳은 거의 없고 돌문, 사창(司倉) 등 성지(城址)의 잔해만이 주위에 흩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30리를 넘는 큰 성이었다고 한다.

빗줄기가 그리 굵지는 않지만 줄기차게 내린다.
사방으로 눈에 들어오는 바위능선마다 낮은 비구름이 걸려 있다.
이제 카메라도 렌즈를 비롯하여 핫슈에 부착한 플래시에서까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지난 해 여름 비를 맞으며 설악산 바위능선을 7시간 산행한 후
카메라 수리비가 수십만원이 들어갔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불안하다.

오후 3시10분
매표소 바로 옆에 자리한 대전사 경내의 돌탑 앞에서 잠시 멈춘다.
항상 무언가를 빌며 돌탑을 도는 인파로 붐비던 이곳도 비 내리는 오늘은 인적이 없다
제주도 부근을 거쳐 북상중인 태풍 메아리가 우리나라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지나가기를
잠시 기원해 본다. 비록 나 자신 믿는 종교는 없지만 순수한 내 소원을 부처님이 조금은 신경을 써 주시리라 여기며.

이곳 주왕산 전설 속의 주인공인 주왕(周王)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는 대전사는
672년(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고,
919년(고려 태조 12년) 눌옹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대전사는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때는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 대전사의 주불전은 특이하게도 '보광전(普光殿)'이다.
전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구조인 "보광전(普光殿:빛이 넓게 비추는 집이라는뜻)" 내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한다.

보광전 앞에 줄지어 늘어선 작은 화분에는 수련이 함초롬히 꽃을 피운채 비를 맞는다.

꽃말이 "청순한 마음"인 수련(睡蓮)은 물 위로 길게 꽃대가 올라온 끝에 꽃이 피는 연꽃과 달리
수면 가까이에서 꽃을 피우며, 피었다 닫았다를 3~4일동안 반복하는 특징이 있다.

오후 3시20분
당초 출발한 주차장 부근에 도착해 뒤돌아 보니
대전사를 품에 안은 기암 주위로 온통 바위 능선들이 에워싼 형상이다.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 중 하나인 주왕산은
수백미터 돌덩이가 병풍처럼 솟아있어,
신라 때는 석병산(石屛山)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 말엽부터 주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오후 4시36분
대전에서부터 동행한 일행들과 주차장 부근 비를 가려주는 공터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과 간단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귀가 채비를 한다.
이제 빗줄기는 거의 그쳤지만
기암 주위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의 구름이 몇시간 전보다 더 짙어졌다.
비록 계속 내리는 장맛비로 인해 주왕산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한적한 숲길을 산책하며 맑은 물과 장쾌한 바위능선의 경치를 보며
1주일간의 피로를 푼 주말 하루를 마감하고 귀가 길에 오른다.

위 지도에서 적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날 탐방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