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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관에서 주흘관까지 이어진 문경새재 과거길

2011년 7월16일 오전 10시13분
문경새재 과거길을 걷기 위해 수옥정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며 엄청난 비를 퍼붓던 장마전선이 중부 지방으로 밀려간 후
오랫만에 접하는 푸른 하늘과 흰구름만 보아도 마음 속이 뻥 뚫린다.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인 이곳의 해발고도는 450m이다.

오전 10시27분
주차장 가까이 자리한 이화여대 연수원인 '이화학당 금란서원'을 지나
동쪽으로 이어진 완만한 오르막 경사의 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커다란 돌에 씌어진 글귀는 '어사또가 걷던길'이며 진행방향이 아닌
뒤쪽 방향으로 화살표가 새겨져 있고 300m 라는 표시도 보인다.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으되
과거 응시를 위해 상경했던 대다수의 선비들이 쓰디쓴 낙향을
경험했을 것을 생각하면 '어사또'라는 표현은 현실과 괴리감이 있음을 느낀다.

오전 10시34분
아직까지는 지나는 길이 차량이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인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차량을 통제하는 구간이고, 주위는 울창한 나무숲과
이와같은 맑은 물이 쉴새없이 흐르는 아름다운 길이 이어진다.

오전 10시57분
눈 앞으로 '백두대간 조령' 표지석이 보인다.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이곳까지 오르는데 무척 힘들어 한다.

산림청 충청북도 괴산군이라는 글귀가 선명한 표지석 앞을 가로막은
저 흉물스런 개인업체 안내 간판이 눈에 무척 거슬린다.
관계 공무원들은 눈을 감고 다니는지?
제발 금품수수,향응 제공 등 불미스런 일이 없었기를 바라며
저 꼴불견 간판이 조속히 철거되기를 바란다.

'조령(鳥嶺)'은 순 우리말로는 '새재'라고 부른다.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릿재 사이(間)의 고개',
새(新)로 만든 고개'라는 등 여러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충북 괴산군에서 경북 문경시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오전 11시1분
눈 앞으로 큰 성문이 나타난다.
문루의 현판에는 '鳥嶺關(조령관)' 이라 씌어 있다.
출발 지점인 고사리마을에서 2.2km를 왔다.
해발고도 650m인 이곳은 오늘 걸어야 할 구간 중 가장 높은 지점이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조령관 문을 지나자 눈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별천지가 펼쳐진다.
넓은 초원에 잠시 주저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제3관문인 이곳에서 2관문을 거쳐 3관문까지 이어지는 새재길은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嶺南)이란 명칭도 이곳 조령의 남쪽 지방이란 뜻이다.

이곳 3관문인 조령관에서 2관문인 조곡관까지 거리는 3.5km 이다.

내가 앉아 쉬는 풀밭 바로 옆에서는 잠자리 한 마리도 휴식을 취한다.
여름까지는 암수 구분이 되지 않던 고추잠자리가 9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수컷의 경우 진한 빨간색으로 수컷의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수컷의 성징이 강해질수록 색깔은 점점 진해진다.
그런 연유로 초여름에는 우리 주위에서 고추잠자리를 볼 수가 없다.

오전 11시7분
조령관의 다른 한쪽인 남쪽 문루의 현판에는 '嶺南第三關(영남제3관)'이라 씌어 있다.
그동안 동쪽 방향으로 이어지던 길이 이제부터는 남향길이다.
이곳에서 제1관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문경새재는 조선태종 14년(1414년)개통된 관도(官道),즉 벼슬길이다.
영남지방(낙동강 유역 권)과 기호지방(한강 유역 권)을 잇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로로
과거 길은 물론 보부상들의 생계를 위한 고난의 길이기도 하였다.

오전 11시13분
완만한 내리막 경사의 흙길을 여유롭게 걷는다.
길 옆 작은 도랑으로는 맑은 물이 졸졸 소리내며 흐르고
다른 한쪽으로는 울창한 숲에서 새소리,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아늑한 길이다.
연간 100만명 이상의 탐방객이 몰린다는 이곳이지만 7km 정도의 긴 거리인데다
넓은 길이어서인지 붐비지 않아서 좋다.

오전 11시26분
이곳 문경새재길 곳곳에 마련된 이런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옛날 과거길에 나선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추풍령과 죽령을 마다하고 돌고 돌아가는 길에다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힘든 고개인 鳥嶺(새재)를 넘어간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이유인즉슨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 해서
또 '죽령'은 과거 시험에서 "죽쭉 미끄러진다' 고해서
그 두곳을 피해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는 곳이 바로 문경새재다.

오전 11시34분
요즈음 연간 100만명 이상이 다녀가는 넓은 새재길은 조선시대에 넓게 만든
이른바 영남대로이고, 오래 전부터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다녔던 길은
대로 옆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이다.
잠시 대로를 버리고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본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오솔길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이다.
물양지꽃에서 꿀을 모으는 벌들의 날개짓이 분주하다.

반바지에 아쿠아 등산화를 착용한 복장인지라
이처럼 물을 만나면 더 즐거워지는 오늘이다.
땀이 무척 많이 나는 더운 날씨이지만 물속에 발만 담구어도 온몸이 시원해진다.
밤에 잠 잘때 멍멍 짖는 개들은 코가 따뜻해야하고
사람은 발이 따뜻해야 잘 잔다는 옛말이 실감난다.

습기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산수국이 한창이다.
이날 문경새재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띈 꽃 또한 이 산수국이다.

중앙부의 작은 꽃들이 수술,암술을 가진 번식을 위한 꽃이며
가장 자리의 흰꽃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무성화'이다.

오전 11시53분
오솔길이 끝나고 다시 큰 길과 합쳐진다.
길 옆으로는 맑은 물이 큰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저 바라보며 귀로 물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진다.

삼각대를 지참하지 않았지만 마침 "ND 필터(Neutral Density Filter:
빛의 양을 조절해주는 필터)" 8번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낭에 의지해서 렌즈의 흔들림 보정장치를 활용하여
2.5초의 셔터속도로 물 흐름을 한 장 찍는다.
물 흐름이 부드러운 비단결처럼 느껴진다. 마음 속이 편안해진다.

비단결처럼 보이는 맑은 물이 흐르는 길가 도랑에 내려서서
시원한 물에 발목까지 잠근 채 걸음을 옮긴다.
비록 땀이 줄줄 흐르는 더운 날씨이지만 높은 산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가슴속까지 시원해질 정도로 차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보니
더위를 조금이라도 느끼게되면 시원한 물 속에 들어가 더위를 식힌다.
이미 반바지 끝단까지 물에 여러번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다.

낮 12시25분
시원한 물속으로 또 뛰어들어 한참 더위를 식힌다.
5초의 셔터 노출로 찍은 물 흐름은 비단결처럼 고와 보이지만
이 물 흐름은 두얼굴이다.
무릎 정도 높이로 흐르는 물이지만 물살이 엄청나게 거세다.
간혹 뉴스 등을 통해 계곡물에 휨쓸려 실종된 사람의 소식을 접하게되는데
이정도 물에도 한번 휩쓸리면 몸을 가누지 못함을 알아야한다.

낮 12시34분
해발고도 475m지점인 이진터(二陣址)를 지난다.
임진년(壬辰年:1592년)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 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할 당시
신립(申砬)장군이 농민 모병군(募兵軍)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결국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니 모두 장렬히 전사한 슬픈 역사를 떠올려본다.

이곳 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이르는 대략 6.5km정도의 흙길을 걷는 이들중
많은 이들이 이처럼 맨발로 걷기를 즐긴다.
발 건강에는 큰 도움이 되리라.

낮 12시45분
제2관문을 1.2km 남겨둔 지점에서 진행방향 우측의 표지판에
'색시폭포 0.3km'라 씌어 있다.
그 팻말을 보고 개울을 건너 홀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색시폭포로 향하는 급경사 오르막길에서 금년 산행중 처음으로
여름 야생화인 '비비추'를 만난다.
아직 꽃이 활짝 피지 않은 상태이지만 물기를 잔뜩 머금은 꽃봉오리가 가냘프면서도 예쁜 모습이다.
어린잎은 식용으로 쓰이는데,
어린잎을 먹을 때 잎에서 거품이 나올 때까지 손으로 비벼서 먹는다 하여
“비비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 진다.

낮 12시52분
작은 표지판에 '색시폭포'라는 글이 씌어있고,
철제 난간이 만들어져 있는 폭포아래에서 잠시 머문다.
삼각대도 없이 카메라를 손에든 채 1/3초라는 저속으로 촬영해도
흔들리지 않았음은 과거 35세로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받던날
사격 불합격 예비군들을 위해 명중 사격을 도와주었던
숨을 참고 흔들림없이 방아쇠를 격발하던 특등사수의 실력이
아직은 남아있음이리라.

어찌보면 빈약해보이기조차 하는 이 '색시폭포'라는 이름은 지난2006년 1월 발견된
얼음폭포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모 결과 채택된 결과이다.
마치 수줍음을 타는 새색시마냥 부드럽고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이다.

동쪽 방향으로는 시야가 트이며 암반으로된 봉우리가 하나 보인다.
확실치는 않으나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부봉(釜峰) 중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제6봉이 아닐까 싶다.

낮 12시56분
색시폭포 조금 아래 색시폭포보다 수량이 더욱 많은
이름 모를 작은 폭포 가까운 바위 위에서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새재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 이후 사람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폭포를 이루는 물소리뿐이다.

앞의 사진은 셔터속도 1/6초의 장노출 사진이다.
그러나 같은 폭포인데도 이 사진처럼 셔터속도 1/400 초로 찍으면
느낌이 다르다. 흰 포말이 큰 소리를 내며 맑은물을 떨어뜨린다.

오후 1시15분
마음 내키는대로 하자면 저 맑은 물이 비단결같은 폭포를 이루는 이곳에서
언제까지고 휴식을 취하며 쉬고 싶다.
물소리만이 크게 들리는 곳.
인적이 전혀없어 으시시하기 까지한 이곳이 좋다.

오후 1시24분
인적없는 색시폭포 계곡을 벗어나 다시 탐방객들이 조금씩 눈에 띄는
새재길로 돌아왔다.
길가 맑은물 속에 잠시 들어가 물장난을 한다.
여름 더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더위를 식히는 물장난만은 마음에 든다.

큰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귀틀집'을 잠시 둘러본다.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삼은 집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두 개의 방만 귀틀로 짜고 정지나 외양 등의 부속 공간은 널벽으로 마감하는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문화재로 지정된 몇 채가 남아 있다 한다.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미대륙의 원주민 거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라는 귀절이 나온다.

귀틀집 맞은편 작은 개울 건너에 있는 '바위굴'의 모습이다.
옛날 이곳 새재를 지나다 갑작스런 소나기(새재우:雨)를 만난 남녀가
저 굴속으로 몸을 피했다가 처녀가 아이를 낳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 바위굴의 경우는 해피 엔딩이다.
청춘남녀가 이곳에는 들러가도 괜찮을듯 싶다.

바위굴을 벗어나니 또 더워진다.
다시 물속에 발을 담근다.
이곳 문경새재길을 여름에 탐방하는 분들에게는 반바지와 물에들어갈 수 있는
신발을 착용하기를 권한다.
더위를 식히며 편안한 탐방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복장이기 때문이다.

오후 1시39분
주위에 키 큰 적송이 유난히 많은 물가 공터를 지나며 눈 앞에 영남제2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1966년 3월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이곳 문경새재 제1,2,3관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이 이곳 제2관인데,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守門將)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물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여 이루어놓은 것이라 한다.

제2관을 지나 조곡교를 건너 새재길을 따라 계속 남으로 걸음을 이어 간다.
문루 남쪽에 붙은 현판에는 '조곡관(鳥谷關)'이라 표기되어 있다.
제1관이나 제3관이 있는 자리에 비해 계곡이 좁고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

숙종 때에 성을 개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으나 그 후 불에 타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380m이며,제1관인 주흘관까지의 남은 거리는 이제 3km이다.

오후 1시48분
조곡관을 지나자마자 넓은 새재길가에 아담한 폭포가 나타난다.
높이 20여m의 3단폭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한참을 기다려 사진을 몇장 찍는다.

대부분 지역의 폭포들은 지나는 길 또는 등산로에서 조금 들어가야 볼 수 있는데 반해
이곳 조곡폭포는 특이하게도 바로 길가에 있어 사람이 붐비는 편이다.
다만 흘러 내리는 물의 양이 너무 적은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선채로 셔터속도 1/2초로 이 사진을 찍는다.
오전보다 사진찍기가 좀 편해진듯하다.
무슨 일이든 연습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길 옆 도랑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모아 이처럼 물레방아를 돌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물레방아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경남 함양이다.
조선말기 실학자이자 안의(현재 함양군 안의면)현감(1792년 부임)을 지냈던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문물을 둘러보고 온 후 조선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든곳이 함양이다.
물레방아의 이용은 이용후생 [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라는 현실개혁의 실학사상이 깃들어 있는
조선시대 농경문화 변혁의 시발점이기도하다.

오후 1시54분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산불됴심'표석 앞을 지난다.
화강암 자연석으로 음각된 비석은 조선 후기때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고어(古語)'로 된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비석이라는 것이 문경시측의 주장이다.

'소원성취탑' 앞을 지난다.
오랜 기간 수많은 길손들이 작은 돌 하나하나를 올려 만든 정성이 깃든 탑이다.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는 장원급제를, 몸이 아픈 이는 쾌차를,
상인은 장사가 잘 되기를, 아이를 낳고 싶은 여인은 수태를 빌었으리라.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큰 내를 이룬다.
어찌보면 물 색깔만으로는 더욱 맑은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1994년 마지막 탄광이 문을 닫을 때까지만 해도 문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석탄 생산지로,
도시는 늘 검은 석탄 가루에 뒤덮여 있었다. 이 물도 당시에는 검은 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4년 이후 광산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며 생업을 잃게 된 이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아
오늘과 같은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을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이곳 문경새재 과거길에만 1년에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오후 2시14분
조선시대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 받던
교인처(交印處) 자리에 세워진 교귀정 [交龜亭] 앞을 지난다.
교귀정 남측의 오래된 이 소나무는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는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게 남쪽으로 향해 있으며,
전체적인 나무의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이 춤을 추는듯한 멋진 자태이다.

주막집 앞을 지난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이곳 문경새재 길목에는 관원이 머물던 ‘조령원터’가 있는가하면
이처럼 민간이 숙식하는 숙촌가(宿村家)도 있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손두부와 좁쌀 토종 동동주'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길손들을 반긴다.
아마도 옛날 과거길에서도 이곳 주모의 미모에 혹해 주색으로 소일하다 과거를 망친
못난 선비들도 간혹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오후 2시20분
오전에 이어 또 상처난 소나무를 몇그루 만난다.
영어 V자 모양의 상처를 간직한 이 소나무들은
일제말기(1943~45)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연료로 쓰기 위한 송진을 채취했던 자국으로
반세기 이상 지난 현재까지도 아픈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길가에서 10여m 떨어진 곳의 작은 타원형 바위.
한쪽 길이 4~5m 정도의 작은 바위에도 '마당바위'라는 이름과함께
큰 안내판을 붙여놓은 문경시 당국의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도적들이 숨어있다가 길손들을 덮치곤 했던 곳이라 한다.

마당바위 건너편 숲속에는 마당바위보다 월씬 큰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바위의 이름은 '무주암'이다.
누구든지 올라가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라서 얻은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주점이 있어 길손들은 누구나 바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즐기며
한 잔 술과 안주로 갈증과 허기를 메운 후 술값을 함에 넣고 갔다한다.
새재골의 넉넉한 인심을 요량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후 2시30분
새재길과 나란히 맞닿은 서쪽 담 길이가 53m인 조령원터(鳥嶺院址) 앞에 다다랐다.
1,980㎡(약 600평) 규모의 직사각형 터에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며 돌담장과 석축,
4개의 건물지로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인 '조령원터'.
담장의 길이가 동측 57.6m, 서측 53.0m, 남측 38.9m, 북측 37.7m로
대칭되는 변의 길이가 모두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길손이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령원터 외에도 동화원, 신혜원의 원터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을 했으며 물물 교환 등 시장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사진에서처럼 서쪽 돌담 중간에 이처럼 문지가 남아있다.
돌담을 성벽의 육축 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주를 문설주로 세웠다.
이제 제1관까지 남은 거리는 1.2km이고, 해발고도는 이제 280m까지 내려왔다.

오후 2시35분
진행방향 좌측 새재길 바로 옆에 있는 독특한 생김새의 이 바위에 붙은 이름은 "지름틀바우"이다.
'기름틀바위'의 경상도 사투리 표기이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 깨를 올려 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 내리게 된다.
기름틀의 누름틀을 닮았다하여 얻은 이름이다.

오후 2시44분
KBS에서 사극 촬영을 위해 건립한 촬영장 앞을 지난다.
지난 2000년 2월에 드라마 '왕건'촬영을 위해 건립한 이곳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촬영을 위해 마련했던 곳이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경복궁,창경궁 등 조선시대의 건물구조와는 좀 다른 양식의 건물이므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나 영화 촬영시에 간혹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촬영장 내부 방문은 이번에는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이 사진은 지난 2008년 9월20일 낮 12시30분 방문시 찍은 내부 모습 중 한 장면이다.

오후 2시47분
제1관이 멀리 눈 앞에 보이는 지점에 이처럼 발 씻는 곳을 마련해 두었다.
새재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다.
맨발로 걷지 않은 사람들도 이곳에서 양말을 벗고 시원한 물로 발찜질을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오후 2시 53분
새재길 좌측에 만들어 놓은 경상북도 개도 100주년 타임캡슐을 둘러 본 후
'영남제1관'을 바라보며 걸음을 이어간다.
파란 하늘에 떠 다니는 흰 뭉게구름을 보며 초가을의 하늘을 연상하는 내 마음은
아마도 결실의 계절 가을을 빨리 기다리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1관의 높이 3.6m, 너비 3.4m 홍예문을 지나면 지금까지의 우거진 나무숲들이 아닌
넓은 평지가 펼쳐지는 다른 경치가 눈 앞에 다가온다.
멀리 보이는 산 봉우리들은 아마도 황학산이나 백화산쯤 될듯 싶다.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 구조인
주흘관(主屹關)을 뒤로하고 걸음을 이어 간다.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다.
또한 좌우에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의 석성을 축조했고,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까지 있는 이 주흘관은
문경새재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관문을 지나 문경쪽에서 뒷쪽인 북쪽을 바라다 본다.
예전 과거시험을 위해 짚신을 매단 괴나리봇짐을 매고
한양으로 떠나던 선비들의 불안한 심정을 가늠해본다.

경상북도 문경시인 이곳 "문경(聞慶)"이라는 이름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곳' 이라는 뜻의 한자어인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유래하여 얻은 이름이다.

오후 3시15분
지난 1997년 4월에 개관하여 문경시에서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인
'옛길박물관'앞을 지나며 5시간 여에 걸친 문경새재 옛길 걷기를 마친다.
그냥 걷기만 할 경우 3시간이면 충분할 거리이지만,
우리 역사는 물론 각종 볼거리를 두루 살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후 3시54분
귀가 차량이 기다리는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장 옆 물가로 나가 본다.
늦게 도착하는 일행들을 기다리며 깨끗한 물에서 물놀이로 더위를 말끔히 씻어낸다.
지루한 장마가 끝난 후 오랫만에 파란 하늘 아래서 행복하게 보낸 주말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위 지도상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오늘 도보로 이동한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