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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에서 평화전망대로 이어진 강화도 여행

 

2015년 5월10일 일요일 오전 9시27분.
이른 아침 대전을 출발 해 첫발을 내딛은 곳은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도로변에서부터 이어진 밭두렁 가장자리에 허물어지다 남은 성터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다는 교동읍성(喬桐邑城)의 흔적이다.

 

 

 

 

 

동,남,북쪽 세 곳에 만들었던 성문 중 아직 남아 있는 하나의 성문인 남문을 찾아 골목길을 따른다.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인 이곳 교동도는 지금은 2014년 7월 개통된
길이 3.4km의 교동대교를 이용해 차량이 통행 가능하지만
불과 1년여 전인 2014년 6월까지는 뱃길로만 이어지던 섬이었다.

더구나 한강 하류에서 이어지는 강화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불과 2km 남짓 거리의
북한과 마주한 접경지역인지라 쇠락을 거듭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인 이곳은 해방 직후 인구가 6,000여명에 달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피난민의 유입으로 1960년대 중반 한때는 인구가 12,000명을 넘기도 했으나
현재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
이와같은 수많은 폐가들이 쇠락의 실상을 대변한다.

 

 

 

 

 

3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형체가 남아있는 남문의 모습이다.
읍성을 만들 당시 저 허물어져가는 홍예문 위에 세워졌던 문루의 이름은 '유량루'였다.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지금 이런 모습이되었다 하는데,
비록 국보나 보물 등에 비해 낮은 등급인 시 기념물이기는 하지만
문화재로 등록된 1995년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조선 인조 7년(1629) 당시 삼도수군통어영과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이곳.
당시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었다 한다.
이제 남문이었던 자리에 문루는 없어지고 홍예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참고로 '홍예문(虹霓門)'이라 함은 문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같이
반원형(半圓形)이 되게 만든 문(門)을 칭함이다.

 

 

 

 

 

오전 9시47분
교동읍성을 둘러본 후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화개산을 오르기 위해 나선 길.
중도에 교동향교를 잠시 둘러본다. 입구에는 무척 키가 큰 홍살문 기둥 앞에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다.

돌로 만든 하마비의 글귀가 이채롭다. "守令邊將下馬碑(수령변장하마비)"라고 새겨있다.
수령과 변장은 말에서 내리라는 얘기인데,
우선 수령(守令)이란  고려·조선 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으로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르는 명칭이다.
또한 변장(邊將)이란 첨사(僉使), 만호(萬戶)와 권관 등 무관 벼슬을 부르는 명칭이다.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교동도에 사는 높은 벼슬아치도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곳 향교에 무척 고귀한 분의 위패를 모신듯 싶다.

 

 

 

 

 

교동향교 내부를 둘러본다.
일반적인 마을 향교에 비해 꽤 규모가 크고 넓다.
중심부에 자리한 '대성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을 본 후
입구의 "守令邊將下馬碑(수령변장하마비)"에 대해 비로소 이해를 하게된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한다.

 

 

 

 

 

교동향교를 떠나 화개산 등산로로 향하는 길
등산로 초입에 자리한 화개사까지는 아늑한 숲길이 이어진다.
초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숲길이다.

 

 

 

 

 

오전 10시5분
화개산 남쪽 자락의 화개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작은 불당이 한 채 있는 작은 절인 화개사는 고려 때 작은 암자로 지어진 것이 시초라지만
창건연대 등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옛날 무학대사 등 몇몇 이름있는 고승들이 이곳으로 공부하러 다녔다고도 하고
목은 이색이 머무르기도 했다고만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찰들이 의례 그렇듯이 이곳도 오래 전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은 곳이라 한다.

 

 

 

 

 

화개사 불당 앞에서는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그 자태를 뽐낸다.
지난 2008년 강화군 보호수로 지정된 이 소나무는
둘레가 1.6m 이고 높이는 14m 이며 나무의 수령은 200년이 넘었다 한다.

 

 

 

 

 

산길은 화개산 정상을 향해 계속 이어진다.
해발고도 1,900m를 넘는 지리산을 오를 때나 오늘처럼 260m에 불과한 화개산을 오를 때나
땀 나고 숨가쁜건 매한가지다.자연의 품에 나 자신을 맡긴다는 점 또한 다름 없다.

 

 

 

 

 

해발고도 250m 를 넘는 능선에 올라서니 남북으로 조망이 트이는 지점에
이처럼 돌로 쌓은 구조물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다는 봉수대 흔적이다.
가로 4.6m, 세로 7.2m, 높이 1.2m의 석단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곳은
화개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50m 지점이다.
고려 후기 학자였던 '목은 이색'의 시에도
 '바닷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겠네.
제사한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라는 글귀가 나온다.

 

 

 

 

 

봉수대 터를 지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작은 바위를 만난다.
지난 해 말 발견된 청동기 후기에 만들어져 기우제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철책으로 보호된채 앞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암각화는 가로 1.8m, 세로 85cm 크기의 자연 암석 위에
물줄기를 연상시키는 11개의 선과 12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구체적 정물이 아닌 선과 원으로만 구성된 '비구상형 암각화'가
한반도 남부지방 이외 지역에서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오전 10시 41분
남쪽 바다ㄹㄹ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큰 암반들과 자그마한 정자가 만들어져 있는
화개산 정상에 도착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100여 명의 인파가 모여도 수용할 정도의 넓은 정상부에는
20 여명이 모여 앉을 정도의 작은 정자 하나와
망루 하나, 그리고 나무로 만든 정상목이 세워져 있어 사방으로 조망이 탁 트이는 곳이다.

 

 

 

 

 

정상부에 서서 남서쪽으로 눈을 돌려 본다.
산 아래 조금 전 들렀던 교동읍성과 향교가 있는 읍내리 마을이 보이고
앞 바다에는 동서 방향으로 생긴 이곳 교동도와 달리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은 석모도 북단부가 손에 잡힐듯 다가온다.
바로 앞의 산봉우리는 석모도의 상주산이다.
멀리 희미한 산 능선은 강화도 본섬의 산줄기들이다.

 

 

 

 

 

눈 앞에 보이는 해발 264m 상주산 봉우리 너머를 망원렌즈로 살펴본다.
가장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대략 24km 남짓 떨어진
해발고도 472m인 강화도 마니산이다.
천연기념물 502호인 서어나무가 있는 참성단을 마니산 최고봉인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참성단이 있는 지점의 높이는 해발 468m 이고,
참성단에서 위태로운 바위능선을 따라 한참 걸어야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자태를 뽐내는
해발고도 472m인 마니산 최고봉에 도달함을 지난 2012년 3월 체험한바 있다.

 

 

 

 

 

화개산 정상목 앞에서서 북쪽으로 눈을 돌려본다.
눈 아래로 이곳이 섬지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다.
간척지로 이루어진 저 들판에 풍년이 들면 섬 주민이 10년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곳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 서해로 흘러들다 개성을 지나 흘러드는 예상강과 다시 만나는
서해 바다 너머는 북한땅이다.
현재 북한 연안군 지역은 8.15광복 당시에는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38선 이남으로서 남한의 남연백군에 속했던 곳이었으나 휴전 이후 북한땅이 되었다.

 

 

 

 

 

산 아래 동네를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저 동네가 면사무소와 교동초등학교가 있는 대룡리인데,
귀가할 때 타고 가야할 차량이 기다리는 곳이다.
잠시 후 하산을 하게되면 저 부근의 대룡시장도 들러볼 예정이다.

 

 

 

 

 

바다 건너 북한 땅을 망원렌즈로 당겨본다.
옅은 안개로 인해 시야가 흐린 점이 아쉽다.
반듯하게 가꾸어진 우리네 들판과 달리 웬지 황량한 느낌마저 든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우리 북녘땅 동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오전 11시41분
화개산 정상에서 30여분간 휴식을 취한 뒤
산을 오를 때는 화개산 남쪽에서 시작했으나 하산시에는 북쪽 방향인 고구리쪽이으로 하산길을 택했다.
 산길이 거의 끝난 지점에서 큼지막한 돌무더기를 만난다.
우리 선조들의 목욕문화를 알 수 있는 한증막이다.
이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내에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불을 지펴 온도가 높아지면 재를 꺼낸 후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내고 옆 개울에서 몸을 씻는,
오늘날의 찜질방과 같은 원리의 시설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사용했으나 지금은 유적으로만 관리되고 있다 한다.

 

 

 

 

 

하산길을 계속 이어가던 중  등산로를 벗어나 100여m 쯤 오솔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
이처럼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연산군유배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이 표지석은 지난 2007년 교동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인데,
이곳이 정확한 연산군의 유배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강화사, 교동향교지는 읍내리 부근당 252번지를 연산군 유배지로 지목하고 있는가 하면,
연려실기술 등을 근거로 화개산 앞쪽의 고구리를 지목하는 주장도 있다.
또한 연산이 읊었다는 시의 ‘인진나루 보이는 곳에’라는 구절 등을 근거로 봉소리 신곡동,
이른바 ‘신골’을 유배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3곳 모두에 ‘연산군 유배지’라는 표식이 붙어 있다. 누군가 정리를해야 할듯 하다.

 

 

 

 

 

표지석에는 작은 글씨로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글귀가 새겨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친다.
위리안치란 유배자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울타리를 치거나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막아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높은 벼슬아치들의 유배지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전라도 산골 또는 섬지방이었으나,
왕권에 위협이되는 왕족들은 일반인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동정을 지척에서 살펴야했기에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도는 왕족들의 유배지로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낮 12시8분
화개산 산행을 마치고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있는 대룡리의 대룡시장을 둘러본다.
70년대 도시 변두리의 재래시장을 그대로 보존한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사진작가들도 많이들 찾아오곤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양철지붕의 야트막한 단층건물들, 민욱이네(구멍가게), 교동떡방앗간, 동산약방,
제일다방,궁전다방 등등..추억이 깃든 이름들.
그 야트막한 건물 처마 밑에는 유난히 제비집이 많다.

 

 

 

 

 

인파의 소음에 놀란 어미 제비가 제 집에서 나와 지붕 위로 피신한채 불안해 한다.
헹여나 새끼에게 해가되는 일은 없을까 걱정하는 모성애가 느껴진다.
조용히 처마 밑을 벗어난다.

 

 

 

 

 

영업중이라는 자그마한 아크릴 안내판,
서툰 글씨로 써 붙여놓은 "옛날 쌍화차 있읍니다.",
"따끈따끈 직접 구운 계란 있읍니다." 라는 철자 틀린 글귀에
미소를 머금은채 대룡시장을 벗어난다.

 

 

 

 

 

귀가 차량이 기다리는 곳은 교동초등학교 바로 옆 공터이다.
넓은 운동장을 가진 학교 정원 한켠에 개교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보면
역사가 꽤 오래된 학교이다.
1906년 5월5일에 화개농업학교로 시작했고 1912년 교동공립학교로 변신하면서
본격적인 초등학교 체제로 들어갔다고 하는 유서깊은 이 학교에서
현재는 초등학교 35명,유치원 14명의 아이들이
총 30명 교직원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고 있다.
대도시 아이들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공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오후 1시25분
교동도를 떠나 귀가길에 머문곳은 교동초등학교에서 18km 정도 떨어진
강화도 본섬 북단에 위치한 평화전망대이다.
행정구역상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인 이곳에서는 바다 건너 북한땅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우리네 농촌 풍경과 그리 다를게 없는 우리 땅. 불과 2km 남짓 거리.
60년 이상 남북으로 갈라진채 서로 오갈수 없는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진 후 다시 예성강과 만나 서해로 흐르는 이곳.
강이라 해야할지? 바다라 해야할지?
강의 최대 폭은 2.3km이고 좁은 곳은 불과 700m 라 한다.

 

 

 

 

 

북쪽 땅을 가까이 살펴본다.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과 밭이 보이고
논밭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도 몇몇 눈에 띈다.
마을 중심부에는 주체사상탑도 보인다.
손에 닿을듯 가깝지만 갈 수 없는 곳이다.

 

 

 

 

 

조금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헐벗은 산 마루금 너머 멀리 바위 능선이 보인다.
제일 뒤의 높은 바위 봉우리가 해발 488m인 개성 송악산이다.
이 지점에서 송악산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14~5km 정도로 추정된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임에 놀라게된다.
사진 좌측 아래쪽에 보이는 돌무더기는 황강리 채석장이다.

 

 

 

 

 

한강,임진강,예성강의 강물이 모두 모여 흐르는 이곳.
오랫동안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다 건너편 북녘땅을 바라보기를 반복한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 그냥 마음이 착잡하다.

 

 

 

 

 

우측 끝 봉우리의 이름이 백마산이라고 안내 간판에 쓰여있다.
망원렌즈로 백마산 정상부를 살펴본다.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다.
남북을 가로막은 철책선이 없어지면 저곳에 나무를 심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전망대 옆 공터에 만들어 놓은 망배단 앞에서 북녘땅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귀가할 채비를 한다.
바로 옆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에서는
강화 출신 음악인들인 고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인 가곡 '그리운 금강산'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프라노 조수미인 듯하다.

 

 

 

 

 

오후 1시 51분
이곳 평화전망대에는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이유는 전망대가 세워진 봉우리 이름이 제적봉(制赤峰)이기 때문이다.
빨갱이를 제압한다는 뜻인데,
1966년 당시 민주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글씨를 쓰고 제적봉 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한다.
이곳을 지키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용맹을 믿으며 휴일 하루 일정을 마치고 귀가 길에 오른다.

 

 

 

 

 

교동도와 평화전망대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지도를 첨부한다.
지도에서 C로 표기된 부분이 강화평화전망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