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소설 「부석사」에 등장하는 두 남녀는 어느 겨울 날 부석사를 향해 국도를 따라가지만
부석사에 가지 못한다. 그들은 중간에 낭떠러지로 향한다.
그러나, 나는 무척 더운 여름날 부석사로 향했다. 그리고 무사히 도착했다.
7월 5일 토요일 오전 11시 41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처음 내 눈에 띈 것은
아담한 연못이다. 무지개연못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맑은 날에는 간헐적으로 내뿜는 가장자리의 분무에 의해 무지개가 만들어지기 때문일게다.
올망졸망한 은행나무 숲을 잠깐 걸어 오르면 나타나는 부석사의 일주문이다.
분명 주차비 영수증에도 '소백산 국립공원관리소'라는 글귀가 나오건만 현판 글씨는
소백산이 아닌 "태백산 부석사"이다.
의상조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소백,태백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다한다.
부석사가 있는 이곳은 태백,소백산의 중간 지점인 봉황산(鳳凰山) 이다.
또한 중국화엄종 종찰인 종남산에 있는 지상사를 보고 부석사를 지었는데,
한국의 종남산에 해당하는 태백산 꼬리 부분에 사찰을 지은 것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해지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 라고 기록되어 있다.
범종각과 안양문을 지나며 108계단을 거쳐 다다르는 곳이 이곳 부석사의 본전인 국보 제18호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우리가 익히 보아 온 바로는 대부분의 사찰의 본전에 걸린 편액에는 "대웅전" , "대웅보전"이 아니면
해인사나 마곡사에서처럼 "대적광전"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그러나 이곳 부석사의 주불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무량수전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극락전이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량수전 서편 마당에 자리 잡은 "부석(浮石)"에는 명확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석을 한자 글대로 해석하면 "떠 있는 돌'이다.
부석과 관련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잠시 머물게 된 집주인의 딸이 바로 선묘낭자이다.
선묘는 의상대사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했고, 의상대사를 위해 법복을 직접 지으며 사랑을 키웠다.
의상대사가 귀국하던 날, 선묘는 의상대사의 귀국 소식을 뒤는게 듣고는,
의상대사에게 줄 법복을 들고 바닷가로 급하게 나가 보았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결국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배를 지키겠다고 결심하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이 세상을 하직한다.
후에 의상이 본국으로 돌아가 현재의 영주지역에 부석사를 세우려 할 때 잡귀들이 의상을 방해하여 절을 세울 수 없게 되자,
선묘룡이 의상을 위하여 큰 돌을 들어 잡귀들을 물리쳤다. 선묘가 '부석'을 세 번 들어 잡귀를 물리쳤다고도 하고,
선묘가 직접 돌이 되어 지금의 '부석'자리에 내려 앉아 있다고도 한다.
1723년 부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 "택리지"의 저자로 유명한 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실을 넣어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막힌데가 없으니 신기하다." 부석이 공중에 떠 있음을 표현한 문구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시고 20 여년전 타계하신 고고미술의 대가 고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수십번 읽은들 어디 한 번 눈으로 본 사람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구조상의 안정감을 주고,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베흘림 기둥만이 아니라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 등등 고도의 기법을 사용한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내 마음 같아서는 이 무량수전 바로 옆에는 유인 경비 초소를 만들어 24시간 감시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무량수전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소조기법으로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이 모셔져 있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화엄종의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사찰 건축 방식과는 다른 점이다.
아미타여래 좌상은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사이 좁은 마당에 작은 석등이 하나 보인다.
국보 제17호인 부석사 석등은 무량수전 중심 앞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안양루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배례석(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의상(義湘 ; 625~7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법등(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신림(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화엄종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한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국보 제19호 "조사당 (祖師堂)"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조사당 건물 앞 우측의 철망 속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자랐다고 전해지는 "선비화"가
자라고 있다.
이 선비화는 골담초(骨擔草)란 속명을 가진 식물이며, 학명이 Caragana sinica (Buc'hoz) Rehder로서
우리나라 중부이북 지역과 중국 동북부 및 몽고지역에 분포하는 낙엽관목이다....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돋은 것인지 여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수령 500년 이상된 나무이며
골담초 연구를 위한 학술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고 한다.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입구에 자리 잡은 안양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곳 부석사의 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 내부에는 방랑시인 김삿갓(金笠)의 글귀도 남아 있다.
내용은 "百年 幾得看勝景(평생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또, "江山似畵東南列 天地如萍日夜浮 :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고나.)”
안양문 누각을 멀리서(보장각과 범종각 사이에서) 유심히 살펴 보면 수많은 불상이 보인다.
건축가의 재치와 기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공포불상(拱包佛像)이라 부른다. 공포란 지붕 및 처마를 일컬음이다.
천왕문 바깥에 있는 화장실도 부석사의 전체적 조화를 위해 목조 건물로 만들어져 있다.
더구나 눈가림식 목조 건물이 아니라 수세식 화장실 내부 바닥까지도 목조로 만드는 세심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동안 경북 영주시를 업무상 수십번 지나다닌 것은 물론이려니와 부석사 입구까지 왔던 것이 여러번이었으나
업무상의 볼일이라 부석사 경내를 둘러보지 못했던 소원을 성취함은 물론 우리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한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후 2시 37분. 주차장에 차를 세운지 약 3시간 만에 다시 만난, 지난 11년간 나의 발 노릇을 하며
16만 km를 주행한 내 차를 누군가 망쳐 놓고 사라졌다. 칠만 벗겨진게 아니라 조금 요철이 생긴 곳도 있다.
평소 휴일에는 거의 시외버스,기차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던 내가 고유가 시대에 자가운전을 한 죄를 받은 것이겠거늘
여기며, 오래전부터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락카 페인트(붓으로된 것) 2통으로 정성들여 상처 부위에 칠을 하느라
40여분을 소비했다. 그리고, 훌훌 털어버렸다. 정신 건강을 위해.
귀가하는 길에는 부석사에서 10여분 남짓 거리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들러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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