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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대첩”과 “한산 대첩”


8월 24일 일요일 낮 소매물도를 둘러보고 한산도로 향할 선박 탑승 시간에 여유가 있어

통영 시내 당동에 잠시 멈추어 해저 터널을 둘러 보았다.

통영 시내의 당동과 미륵도의 미수동을 잇는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의

해저 터널은 1932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터널최고 깊이가 평균 해수면 기준 10m아래이며,

동양 최초의 해저 터널로 알려져 있다.

해저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미륵도에 닿게 되는데, 1967년 충무교가 개통되면서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지금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북쪽인 당동과 남쪽인 미수동 양쪽 터널 입구에 이와 같은 문이 똑 같이 서 있다. 이 사진의 문은 남쪽 미수동 쪽이다.

문 위에 「용문달양 (龍門達陽)」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는데 이는 "용문(중국고사에 나오는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잉어가 여기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고 함)을 거쳐 산양(山陽)에 통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양은 바로 미륵도이다.

본래 해저 터널이 지나는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순신장군에 의해서 많은 왜구들이 수장을 당한 곳이어서 일본인들이 바다를 파 버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오후 2시 15분 바다 위에서 바라 본 소매물도 부속섬인 등대섬의 모습이다.

오후 2시에 통영항을 떠난 유람선이 거친 파도를 헤치며 1시간 여 달려 도착한 곳은 소매물도 부근. 날씨는 맑고 상쾌했으나 파도가 무척 높은 날이었다.

지난 6월 소매물도에서 2시간 여 동안 머무는 동안 망태봉 정상에서 이 등대섬을 사진으로 담으며 절경에 감탄한바 있는데

바다에서 바라보는 등대섬의 모습은 또 다른 감흥을 안겨 준다.


매물도와 소매물도 일대의 절경을 배 위에서 감상한 후 오후 4시경 한산도 선착장에 도착하여 제승당과 충무사가 있는 사적 제 113호인 이충무공 유적지에 도착했다.

입구 매표소를 지나 맑고 푸른 해변을 따라 10여분 걸음을 옮겨 마주친 대첩문 모습이다. 이 대첩문을 지나야 제승당으로 갈 수 있다.

1592년(선조25년) 7월 초순의 한산대첩은 살라미르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카 해전과 함께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 4대해전 중의 하나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장군께서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를 읊으신 수루(戍樓)의 모습이다.

일종의 망루 역할을 하는 이 수루에 임진왜란 당시 자주 오르셨던 장군께서는 왜적의 동태를 살피시는 외에도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며, 그 마음을 시로 읊으시곤 하셨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은 후 수루에 올라서 멀리 한산만 쪽 바다를 바라 보았다. 한산만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뒷쪽에 망산을 등지고 오른쪽은 고동산, 왼쪽은 미륵산이다.

확 트인 한산만을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학익진을 구상하여 세계4대 해전에 남을 만한 한산대첩이라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후 처음으로 왜군에 대해 수군의 우위를 확보하는 임진왜란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 한 장군의 모습과

베이징에서 일본을 두차례 격파한 우리 야구팀의 쾌거가 내 머리속에서 오버랩 된다.

잠시 수루의 깨끗한 마루에 앉아 한산도가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시원한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여유를 가져 보았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우리 전통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팔작 지붕으로 지어진 제승당(制勝堂)의 모습이다.

제승당이란 이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승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뜻이며 오늘날의 용어로 얘기하면 해군작전사령관실쯤으로 부를 수 있으리라.

장군께서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16일. 한양으로 붙잡혀 가시기까지

군무를 관장하던 곳이다.

총1491일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분의 일기가 여기서 쓰여졌다.

충무공이 떠난 뒤 폐허가 되었으나 1739년(영조 15년) 통제사 조경이 중건한바 있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인 1976년에 다시 세워졌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입구의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사당 입구에 홍살문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우리 고유의 전통이다.

이제 경건한 마음을 가다듬고 장군의 곁으로 다가갈 준비를 한다.

장군께 꼭 전해드릴 말씀 중 하나는 베이징에서 우리 야구팀이 왜적을 두번 씩이나 통쾌하게 물리친 베이징 대첩에 대한 보고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충무사 (忠武祠)를 참배하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려 있다.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내부에는 종2품 통제사의 관복 차림을 한 장군의 영정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이 영정은 1978년에 사적을 정화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매년 봄,가을에 통영시민들이 제승당과 함께 제사를 지내며,

8월14일에는 해군사령관과 해사생도들이 참배하고 한산대첩제를 거행하여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간다.

*참고로 충무사는 이곳 한산도 외에도 우리나라에 여러 곳 있다.

내가 아는 곳은 아래와 같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이순신 장군의 가묘터.

*전남 해남군 문내면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데승한 공을 기려 만든곳.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이순신(李舜臣:1545∼1598), 정운(鄭運:1543∼1592), 송희립(宋希立)을 제향하고 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100년 후 왜인의 악귀가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불안해진 주민들이 1697년경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오고 있음

*고흥군 도화면

선조13년(1580) 7월 이순신 장군이 36세 때 이 곳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선조 15년(1582) 1월까지 모함을 받아 파면되기까지 18개월간 재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오후 4시 42분.

이곳 한산섬의 수루,제승당,충무사 등을 둘러보고 통영행 선착장으로 향하는 내 발길이 무척 가벼워졌다.

아마 충무공께서도 오늘은 무척 기쁜날이셨을게다.

일본 야구를 두 번씩 통쾌하게 격파한 베이징 대첩을 장군께 알려 드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한산섬을 떠나는 내 마음 또한 한없이 가볍고 상쾌하다.

이곳 한산섬은 일반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인구가 1,500여명(2004년 기준)에 달하는 큰 섬이다.

통영을 오가는 카페리를 이용한 행락객들의 차량이 수시로 왕래를 하는 곳이다.

아름답고 깨끗한 한려수도의 중심인 이곳 통영 앞바다는 우리나라 해상 스포츠의 중심이며 바다낚시를 비롯한 해상레포츠의 중심이기도하다.

오래 전부터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울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듯 투명한 바다 색깔이 눈부시다.

오후 5시 35분.

이제 동백꽃과 갈매기로 대표되는 통영을 떠날 시간이다.

금년에만도 봄부터 여름까지 이곳 통영을 찾은 횟수가 대여섯 차례 이상 되지만 항상 새로운 느낌을 나에게 전해 주는 곳이 통영이다.

통영이란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이다.

선조37(1604)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통영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충무시(忠武市)의 본 지명은 통영군이고, 통영군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라 하였으며, 그 후 시.,군 통폐합 과정에서 다시 통영시라는 명칭으로 환원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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