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토요일
행정구역상 충북 괴산군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10여분 정도의 거리인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구를 거쳐 40여분 정도 큼지막한 돌을 깔아 만든 산책 길을 오르니 문경새재 과거길의 정상 부분인 영남제3관이 눈 앞에 나타난다.
현판에 ‘조령관’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보인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관문을 지나 남쪽인 문경 쪽에서 바라보니 ‘영남제3관’이라는 글씨가 새겨있다.
이제부터 제1관문까지 약 6.8km는 황토가 섞인 흙 길을 내려 가야 한다.
문경새재는 조선태종 14년(1414년)개통된 관도(官道)즉 벼슬길이다.
영남지방(낙동강 유역 권)과 기호지방(한강 유역 권)을 잇는 조선시대 대표적인도로로 과거 길은 물론 보부상들의 생계를 위한 고난의 길 이기도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 걷기를 시작한다.
울창한 숲길에서 산림욕을 즐기며 황토 길을 맨발로 걷는다면 건강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옛날 과거길에 나선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추풍령과 죽령을 마다하고 돌고 돌아가는 길에다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힘든 고개인 鳥嶺(새재)를 넘어간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한자어인 문경(聞慶)의 고을 지명과함께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추풍령’과 쭉쭉 미끄러진다는 ‘죽령’을피해 갔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는 곳이 바로 문경새재다.
제3관문을 지나 옆으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울창한 숲 속의 훍길을 따라 한 시간여를 걷느라 목덜미에 땀이 차 오를 때쯤 눈 앞에 ‘영남제2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남쪽 문경쪽에서 바라보면 ‘조곡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장원급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비들이 기쁜 소식을 최대한 빨리 전하기 위해 택한 길도 바로 이 문경새재길이다. 이 지역에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곳’이라는 뜻의 ‘문경(聞慶)’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선비들은 어떤 길을 이용했을까?
이들이 택한 길은 가장 멀리 돌아 집에 도착하는 추풍령이었다는 얘기다. 합격하지 못한 죄스러움에 조금이라도 늦게 돌아가고자 했던 이들이 추풍령 길을 택한 까닭에 ‘추풍낙엽’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제2관문을 지나면서부터는 길 옆 개울이 더 넓어지며 수량도 많아 진다.
주흘산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다.
그러나, 지난 94년 마지막 탄광이 문을 닫을 때까지만 해도 문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석탄 생산지로, 도시는 늘 검은 석탄 가루에 뒤덮여 있었다. 이 물도 당시에는 검은 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94년 이후 광산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며 생업을 잃게 된 이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아 오늘과 같은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을 만든 것이다.
교귀정 앞을 지난다.
교귀정이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 인계,인수를 하던 교민처로
성종 때(1465~1487) 건립된 후 유지만 남은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99년에 중창한 곳이다.
이곳 문경새재 길목에는 관원이 머물던 ‘조령원터’가 있는가하면 이처럼 민간이 숙식하는 숙촌가도 있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손두부와 좁쌀 토종 동동주'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길손들을 반긴다.
아마도 옛날 과거길에서도 이곳 주모의 미모에 혹해 주색으로 소일하다 과거를 망친 못난 선비들도 간혹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제 1관문 조금 못 미친 곳에 KBS에서 사극 촬영을 위해 건립한 촬영장에 잠시 들렀다.
지난 200년 2월에 건립한 이곳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촬영을 위해 마련했던 곳 이라 한다.
이곳 문경새재를 둘러싼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 송악산과 흡사할 뿐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가장 최근에는 ‘대왕세종’의 촬영이 이곳에서 진행되는 모양이다.
왕궁,기와집, 초가집 등으로 이루어진 당시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촬영장이었다 한다.
문경새재의 시발점이며, 종착점인 영남제1관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위치에 이처럼 발 씻는 곳이 마련되어있다. 제3관에서부터 이곳까지 2시간 여 동안 흙 길을 걸어온 이들은 이곳에서 맑고 깨끗한 물로 자신의 건강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자신의 두 발을 정성스레 닦아 낸다.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기쁨을 만끽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러운 순간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걷기 시작한지 3시간여 만에 드디어 오늘 문경새재 과거길 걷기의 종착점인 ‘제1관”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판 글씨는 ‘영남제1관’이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다.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한다.
관문을 지나 남쪽 문경 쪽에서 바라본 ‘제1관’의 전경이다. 현판에는 ‘주흘관’ 이라 씌어있다.
이곳 문경지방의 전통민요인 “문경새재아리랑”의 가사가 생각난다.
문경아새재에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다나가네
홍두깨방망이는팔자가좋아
큰애기손질로놀아나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날넘겨주소
문경아새재고개는왠고갠지
구부야구부구부가눈물이나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나를넘겨주소
2일간 개최되는 오미자 축제장이 있는 문경시 동로면에 도착할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장터국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 후 동로초등학교에 마련된 축제 주 행사장에 들어설 무렵에는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때마침 야외무대에서 진행되는 ‘국악공연’등을 진행하는 주최측과 관람객 모두 큰 불편을 겪는다. 그러나,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원망할 수만은 없는 것이 농민들의 심정이다.
계속 내리는 굵은 빗줄기 때문에 오미자 따기 체험을 포기한 채 가까운 오미자 밭을 찾아 마지막 수확에 바쁜 농부의 모습을 담았다.
껍질은 시고(酸), 살은 달고(甘), 씨는 맵고(辛) 쓰며(苦) 전체는 짠맛(鹹)이 있어 五味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오미자는 시고, 달고, 맵고, 쓰고, 짠, 다섯 가지 맛을 갖고 있는 영약으로 거담, 진해, 정천(가쁜 숨을 바로 잡는다), 청혈(피를 맑게), 검한(식은땀을 거두게), 생진지갈(갈증을 없앤다), 보신(콩팥을 보하고), 견근골, 양오장(오장을 튼튼하게), 요유정(몽정을 없앤다), 강음강정(남녀간에 정력을 강하게), 부녀음냉(여자의 냉을 없앤다)으로 되어있다.
문경 오미자는 태백산, 지리산, 소백산 등 깊은 산중에서 야생으로 자생하는 오미자를 옮겨와 재배하게 되었으며, 자생지의 주요 환경특성이 해발고 500~700m의 준고냉지 계곡이나 산중으로 습도가 높고 배수가 용이한 지역이라는 점이 이곳 문경의 자연과 잘 맞는다는 얘기이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과 산허리의 구름을 바라보며 오늘 일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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