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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馬耳山] 산행기


12월14일 일요일. 수은주가 영하 7~8도 정도까지 내려간 아침 6시 40분 집을 나서

대전 태양산악회 회원들과 동행하여 마이산 아래 남부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9시 40분경.

10여분간 산행 준비를 마치고 키 작은 대숲이 우거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24분. 산행을 시작한지 30여분이 흘렀다.


저 멀리 동쪽에 전망대가 보인다. 비룡대라는 이름의 전망대가 있는 곳. 해발 527m인 나봉암이 바로 저기다.


등산객들을 위한 벤치 등이 마련된 휴식장소인 봉두봉(해발 540m) 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기를 20 여분.

동쪽 방향으로 저 멀리 숫 마이봉을 거의 가리고 있는 암 마이봉이 보인다.


그 왼편으로는 5개의 자그마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삿갓봉도 보인다.


오전 11시 23분.

중간 휴식장소이자 오늘 산행의 정상에 해당하는 봉두봉에서 바라본 서쪽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사진 우측은 20여분 지나온 나봉암의 전망대인 비룡대이고,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고금당이다. 이 고금당은 굴에 문을 달아 법당처럼 만든 곳으로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1320~1376)의 수도처로

전해오는 자연 암굴로 나옹암이라 한다.

나옹선사는 1371년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으며 여주 신륵사에 입적한바 있다.


낮 12시 6분.

봉두봉 휴식장소에서 태양산악회 회원분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김치지개를 곁들인 맛있는 점심을 마치고

다시 산행에 나섰다. 휴식장소 바로 아래 헬기 착륙장에서 내려다보는 탑영제의 물빛이 무척 맑게 느껴진다.


이곳 마이산의 이름은 신라시대 이후 여러 차례 바뀌게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었으며-높게 솟았다는 의미의 서다산(섰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湧出山)-우뚝하게 솟았다는 의미와 용맹정진할 때 특출한 산이라는 불교적 의미가 더해짐,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이성계는 마이산을 신이 내려준 금척(金尺)을 묶는 모습, 또는 오행설에 따라 그의 성(李)에 목(木)이 들어 마이산이 상극인 금(金)이어서 금이 왕성하면 목(木)성인 이씨가 해를 받기 때문에 금을 묶어 두려고 속금산(束金山)이라고 했다는 설. 로 불려오다가 조선 태종 때는 진안 성묘산에서 제사를 지내다 바라다보니 말귀와 같다 해서 마이산으로 불리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산하는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한동안 암 마이봉( 해발685m)의 독특한 모습을 계속 바라보게 된다.

동쪽의 숫 마이봉(해발 678m)은 이곳에서는 암 마이봉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암마이봉 등반로는 지난 2004년부터 10년간 자연휴식년제로 지정돼 오를 수는 없다.

마이산의 바윗덩어리는 만지면 쉽게 부스러지는 역암(礫岩)으로 이뤄져있다. 자갈 섞인 돌이란 뜻이다.

약 9천만년 전부터 1억년 전 사이 호수가 융기해 생겼다.

표면에는 동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타포니 지형이다. 타포니는 벌집모양의 자연동굴을 뜻하는 코르시카의 방언에서 유래했다.


낮 12시 32분.

약 3시간 여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이곳 마이산을 대표하는 탑사에 도착했다.

이곳 탑사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80여 개의 돌탑으로 유명하다.


이 돌탑들은 1800년대 후반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갑용 처사는 낮에 돌을 모으고 밤에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 탑들은 이제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대웅전 바로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이갑용 처사(1860~1957)의 입상이다. “탑 축조자 이갑룡 처사 존영”이라는 글귀가 뚜렷하다.


탑사 측에서는 구한말 터를 잡고 살았던 이갑룡 처사가 도력을 부려 쌓았다고 주장하지만 진안군 문화원 측의 이미 오래전부터 탑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문화원의 설명에 따르면 18세기 진안에 살았던 담락당 하립의 시에 ‘속금산(마이산)에 탑이 많은데,

붉은 단풍 속에 종소리 울리네’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이산 돌탑의 역사는 최소한 200년 이상은 될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아래에 있는 탑사 측에서 섬진강 발원지라 주장하는 약수터이다.


그러나, 이곳이 섬진강 발원지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이다. 산경표(山經表;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친 대간(大幹)과 지맥(支脈)의 분포를 기재한 것으로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하였다. 1913년 최남선(崔南善) 편으로 광문회(光文會)에서 신활자로 간행한 것이 각처에 소장되어 있다. ) , 한국의 강(이형석 저), 건설교통부 2000년 하천일람에 의하면 장수 영취산-장안산-마이산-주화산까지 63.3km의 산줄기는 남쪽은 섬진강, 북쪽은 금강의 분수령이다.

따라서 금강의 발원지는 장수읍 원수분 마을 신무산 북쪽 기슭인 뜬봉샘이고, 섬진강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 마을 뒤, 천상데미 서쪽 기슭에 있는 데미샘이다.


이곳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자욱한 안개를 뚫고 나와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사와 금당사 중간에 위치한 탑영제 옆에 자리 한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인 남원부 서봉방에서 태어나 1786년 결혼한 부부시인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를 기린 부부시비와 영정을 모신 명려각(明麗閣)의 모습이다.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는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 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긴 삼의당 김씨이다.


삼의당이 소녀 시절에 쓴 작품 및 결혼 생활 중에 쓴 작품 하나 씩을 소개한다.


<가지에 만발한 꽃 (花滿枝-화만지)>

帶方城上月如眉(대방성상월여미) - 대방성의 위에 뜬달 눈썹과 같고,

帶方城下花滿枝(대방성하화만지) - 대방성의 아래 핀 꽃, 가지마다 가득하네.

生憎花開芳易歇(생증화개방이헐) - 피어난 꽃 꽃다우나 얄밉게도 쉬이 지니,

每羨月來長有期(매선월래장유기) - 오래도록 기약 있게 뜨는 달이 탐나네.


<시골 마을에 살며 읊다(村居卽事-촌거즉사)

棲鳳村中生長(서봉촌중생장)- 서봉 마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來東山下寓居(내동산하우거)- 내동산 아래에서 타향살이 살고 있네.

蕭灑數間茅屋(소쇄수간모옥)- 몇칸의 초라한 띠 집을 깨끗이 쓸고 앉아,

好讀一床詩書(호독일상시서)- 詩書 읽는 즐거움으로 날을 보내오.


마이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이 탑영제를 이루었다.

암마이봉과 나도산 봉두굴이 유연한 자태로 탑영제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방생의 최적지로 꼽힌다.


바로 옆 부부시비의 초야창화와 화답의 노래인 글귀를 다시 음미해 본다.

담락당 하립이 삼의당을 위해 지은 시


서로 만나다 보니

달나라의 선녀이구려

전생의 인연으로

분명 이 밤 가져온 걸

속세의 중매란 분분할 뿐

우린 천정의 배필이여



삼의당의 화답시


신랑과 선녀

한 날 한 시 한마을에 나서

다시 화촉의 인연을 맞았거늘

어찌 다

이 밤의 기쁨이

한낱 우연이리오


탐영제를 지나 10여분 남부주차장으로 향하면 신라 헌강왕 2년(876년) 혜감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금당사(金塘寺) 가 나타난다.

이 금당사는 당초 현재 고금당이 자리한 나옹암에 있던 절이라 한다. 이날도 사찰 경내에서는 각종 공사가 진행되고 잇엇다.


이곳 극락전에는 수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깎아서 만든 금당사목불좌상(지방유형문화제 18호)과 가로 5m, 세로 9m 크기의 괘불탱화(보물 1266호)가 있다. 이 괘불탱화는 단독의 관음보살입 상이 그려져 있으며 표현양식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으로 통 도사의 관음보살 괘불탱화나 무량사의 미륵보살 괘불탱화 등과 함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금당사 3층석탑(지방문화제자료 122호)이 연못 안에 놓여 있다.

그 연못 주위에서 부처님께 무언가를 기원하는 한 쌍의 남녀의 모습이 정겹다.


나 자신은 저 두 분의 소원을 들어주시라는 기원을 해 본다.


오후 1시 31분.

처음 출발한 주차장에 출발한지 4시간 남짓 만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날 짧은 산행이었지만, 무척 상쾌하고 몸도 가뿐하다.


일찍 도착한 산악회장님과 여러 회원들이 오늘 산행에 참여한 30여명 회원들을 위해

뜨거운 찌개를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멀리 오전에 올랐던 나봉암의 전망대를 바라보며 뜨거운 찌개에 따뜻한 밥을 말아 먹으며

태양산악회 회원들의 따뜻한 정을 느낀다. 반주로 마신 소주 한 잔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준다.


조선조 때 붙여진 이 고을 이름 진안(鎭安)도 백제 유민들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의미다.

백제 때 진안의 옛 이름은 난진아(難珍阿)였다. 고원에 있는 고을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