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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인 `위도(蝟島)`를 찾아서

2010년 6월19일 토요일 오전 10시 9분.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거론되는 고슴도치를 닮았다하여
'고슴도치 위(蝟)'자를 써서 그 이름이 붙은
위도(蝟島)행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전북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격포항.

오전 10시20분에 출항할 위도행 카페리가 승객과 차량을
기다리며 잔잔한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다.
짙은 안개로 방파제마저 희미하게 보일 정도이다.

오전 10시57분.
10시20분에 격포항을 떠난 배는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물살을 가른다.
출항한지 40여분이 가까워 오지만 마치 지난 겨울 다녀온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인 순천만 유역의
'대대포구'에서 만난 짙은 안개가 망막을 가르며 오버랩될 정도이다.

오전 11시8분.
짙은 안개속을 조심스레 내달려온 카페리는
50여분에 걸친 항해 끝에 15km 정도의 바닷길을 달려온 후
위도의 관문인 '파장금'항 방파제를 통과 한다.

오전 11시26분.
위도의 최고봉인 해발 255m의 망월봉에 오르기 전
해안선 길이 36km에 불과한 작은 섬 위도에 단 1대 있는
공영버스를 타고 해안 일주를 시작한지 15분 남짓.
서쪽 깊은금 마을 부근 해안가를 달리는 중 차창밖으로
물개바위가 멋진 자태를 뽐낸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도 물개는 있다.
지난 1950년대 이전까지는 독도 '강치'라고 불리는
바다사자가 집단서식했었다. 또한 백령도 부근에서도..
요즈음도 간혹 독도 부근에서 물개가 한 두마리씩
관찰되기는 하지만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물개가
많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일까? "물개바위"라는 이름의 바위는 독도,백령도에도 있다.
더구나 서울 인근의 삼각산,도봉산,수락산에도 '물개바위'는 있다.

오전 11시55분.
버스를 이용한 해안 일주 관광을 끝내고 망월봉 산행을 위해
파장금 선착장과 위도의 면소재지인 진리마을 중간 지점
북쪽 해안가에 자리한 "서해훼리호참사위령탑"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을 말 그대로 홀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호젓이 걸어 들어간다.

위령탑 입구 도로에서 내린 수십명의 산행객들 중 어느 누구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 마치 뒷꽁무니에 불난듯
왁자지껄 떠들며 산행로를 향해 달음박질 친다.
몰상식한 인간들 같으니....
속으로 울화가 치밀지만 꾹 참는다.

오전 11시58분.
짙은 안개로 바다 건너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위령탑 입구에서
292명의 명복을 빌며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마음이 숙연해지며 코끝이 찡해진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지난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10분경.
이곳 위도에서 동쪽으로 4km남짓 떨어진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한 110톤급 서해훼리호에 타고 있던 362명 중 70명만이 구조되고
292명이 사망한 엄청난 해난사고의 상처를 기억하기 위한 위령탑이다.

위령탑 뒷면의 모습이다.
"그대는 아는가 저 바다 우는 소리를! 파도를 헤치고 들려오는
슬픔과 절망의 통곡소리는 아직도 우리 곁에 전율과 회한의 눈물을
마르지 않게 하고 있다.------" 로 시작되는 "추도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글귀 아래에는 참사자 292명의 이름이 돌에 새겨져 있다.

참사가 있었던 날로부터 2년 후인 1995년 10월10일에 만들어 진 것이다.
위도주민 58명을 포함하여 전북도민이 143명으로 절만 가까운 희생자를 냈으며,
서울시민 73명,충북도민 36명, 경기도민 13명, 대전시민 11명. 기타 16명 등의
명복을 멀리 보이는 망월봉 정상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빌어 본다.

안개 낀 위령탑 북쪽 바다의 이끼 낀 작은 바위섬.
그 위에 앉은 두 마리 물새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292명 영령들의 영혼을 지키기라도 하듯.

낮 12시7분.
위령탑을 떠나 망월봉 산행길로 들어선다.
산행 들머리부터 울창한 숲길이 짙은 풀냄새를 쏟아 낸다.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등의 저서를 남기신
고려시대 문신이며 명문장가였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李奎報, 1168~1241]"가
63세 되던 1230년 이곳 위도에 유배되어 8개월의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곳 망월봉을 오르던 족적을 되짚는 것이라
여기는 즐거움으로 걸음을 옮긴다.

낮12시18분.
잠시 걷혔던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한다.
안개로 인해 조망이 막힐까 두려워 부지런히 조망 좋을듯한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서쪽으로 이곳 위도의 면소재지인 '진리'가 내려다 보인다.

진리에는 과거 위도관아가 있었는데 수군진영이 있다하여
“진말”(진마을)로 불리어 오다가 일제때 진리라 칭했다고 한다.
현재 진리에는 위도중학교와 위도고등학교 및 우체국, 농협,
농협하나로마트, 위도보건지소등과 같은 주요 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짙은 안개로 절반쯤 가려진 정금도가 눈에 들어 온다.
정금(井金) 이라는 이름은 원래 지형상으로 볼 때 형체가 솥뚜껑과 같다하여
솥 정(鼎)자를 붙이고 이곳에 금이 나왔다 하여 금자를 붙여 정금이라 칭하였다고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마을에 물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우물 정(井)자로 바뀌었다 한다.

만조시에는 위도와 떨어진 섬마을 이지만 간조시에는 저 다리 위를 걸어서 섬을 내왕할수 있다.

북쪽 아래로는 조금 전 들렀던 위령탑이 내려다 보인다.

오늘처럼 안개가 많은 날은 짙은 안개가 파도소리를 묻어버려
292명의 영혼들이 좀 더 조용한 잠을 이룰 수 있기를...

매년 여름 산행에서 자주 만나는 까치수염이
이곳 망월봉까지 오르는 산행길에서 유난히 많이 보인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잘 자라는 이 까치수염꽃을 보게되면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게되고, 또한 이꽃이 지기 시작하면
8월이 끝나면서 가을이 옴을 알게 된다.

키 작은 소나무 가지 끝에서 천진난만하게 지저귀는
작은 새를 만난다.
확실치는 않으나 크기나 색깔을 보아서
우리나라 텃새 중 한 종류인 곤줄박이가 아닌가 싶다.

낮12시33분.
한동안 주변 경치를 살펴보며, 야생화를 보며,
새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멈춘동안 짙은 안개가 앞을 가린다.
10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속.
30분 이상 인적도 끊어진 호젓한 길.
조용해서 좋다.

낮12시47분.
이곳 위도의 최고봉인 '망월봉'정상석 앞에 섰다.
산행객들이 쉴 수 있도록 조그만 정자를 만들어 두었다.
고슴도치 형상의 구조물도 만든지 오래지 않은듯하다.

짙은 안개로 사방을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자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산행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 또한 잠시 준비힌 점심을 들며 휴식을 취한다.

오후 1시17분.
1km남짓 떨어진 시름교쪽으로 하산을 하기 위해
동쪽 방향으로 난 능선길로 발길을 옮긴다.
정자에서 쉬던 산행객들이 떠난지 오랜 시간.
인적 없는 길을 혼자 걷는 오늘과 같은 산행길의
행복을 느끼는 것도 1년 중 몇번 접하기 어려운 행운이다.
바위 능선길을 걸으며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작은 배를 무심코 바라보는 것 머릿속이 맑아진다.

7,8월에 꽃이 피는 대표적인 여름 야생화인 원추리를
금년 들어 처음으로 만난다.

지난 여름 우리나라 우주기지가 세워진 전남 고흥 외나로도
산행시 짬을 내어 탔던 유람선에서 바라본 외나로도 해변 바위벽에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던 아름다운 원추리 꽃이 머릿속에 떠 오른다.

오후 1시38분.
이곳 위도의 동쪽 끝부분의 봉우리인 파장봉 아래 절벽을 가로 지른
도로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인 시름교의 파란 빛깔이 선명하게 보인다.
오후가 되면서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혀 간다.

오후 1시48분.
길이 35m,폭 2.5m인 시름교를 건너 간다.
2차선 도로에도 오랜시간 지나가는 차량도 없고,
주위에 사람도 없다.
괜히 즐거워져서 배낭을 벗어 놓고 다리 위를 여러차례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내 본다.
이런 기분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지난 200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 9월에 완공된 '시름교'.
옆에서 바라 보면 산 허리를 잘라 그 위를 가로지른 다리가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당시 준공검사를 했던 부안군청 수산과 직원이
직무 수행을 충실히 했으리라 믿어 보기로 한다.

오후 2시10분.
시름교를 떠나 파장금 선착장으로 가는 해안도로와 연결된
시름 마을로 향하는 길가에서 이곳 위도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보는
넓은 논 옆을 지난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 논물이 가득한 것을 보니
기분으로는 풍년을 맞은듯하다.

오후 2시16분.
전형적인 갯마을인 시름마을을 지난다.
시름금, 시루금, 시루구미 등으로 불리는 이 마을은
면 소재지인 진말의 동북쪽 후미에 자리 한 마을이다.

시름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떡시루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시루”로 불리워오다가
지금은 “시름”이라고 불린다.
위도전체의 전기를 공급하는 위도내연발전소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시름 마을을 벗어나며 깊 옆 나무숲에 사는 새 무리를 만난다.
날아다니는 모습으로는 백로,두루미,왜가리와 비슷한데..
왜가리나 두루미는 아니고 백로와 비슷하지만
나 자신 무지몽매한 탓에 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
지난 해 야생화책과 나무에 관한 책을 샀으니
조만간 조류에 관한 책을 사서 또 공부를 해야할 모양이다.

오후 2시26분.
오전에 출발한 파장금항으로 돌아왔다.
바로 앞의 정금도 모습이 거의 보일 정도이니 안개는 많이
걷혔지만 시계가 불량함이 조금은 아쉽다.
수일전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가 올것이라 예보한 탓인지
격포항으로 향하는 페리호에 승객이 거의 없다.

오후 3시24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며 방파제 끝까지 왕복하는 등
지난 1주일간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지친 머릿속을 맑은 갯내음으로 맑게 한다.
그에 따라 하늘도 점점 맑아지는듯하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강원도 인제의
해발 1,444m방태산 산행을 떠나야 하니
심신의 피로도 풀어야겠지만 날씨도 좋아야할테니..

오후 4시6분.
4시 정각에 출항한 격포행 페리호가 파장금항 방파제를 벗어나 동으로
방향을 돌린다.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향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 위도라고 하는
얘기가 제기되는 이곳 위도.
파장금이라는 이름은 칠산어장을 끼고있어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고
폭풍이 몰아치면 어선들이 대피하는 마을이며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이는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은 파도가 길게치면 금(金) 즉 돈이 몰려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후 4시26분.
오전에 위도로 향할 때는 짙은 안개로 보이지 않던 '임수도' 뒤로
위도가 멀어져 간다.
바로 이곳이 지난 1993년 10월10일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부근이다.

임수도 바로 옆의 작은 바위섬인 '촛대바위'도 그 모습을 선연히 드러 낸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심청전'에서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바로 이곳 임수도 부근 해역이라 한다.

심청은 실존 인물로 1천7백여 년 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에서 태어났다.
심청은 어부들과 함께 섬진강을 따라 승주 낙안포, 남해의 금일도,
부안의 소래포(내소사 앞 포구)를 거쳐 위도 부근의 임수도 해역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도경 등 문헌에 의하면 임수도는 한반도와 중국 절강성,
복건성을 오가던 교역선이 주로 이용했던 해로상의 요충지다.
또 구전에 의하면 임수도는 변산반도 격포와 위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무인도로
원래는‘인수도’라 불렸다.

촛대바위섬을 300m망원으로 당겨 보니 갯바위에 낚시꾼들이 그득하다.
이곳 촛재바위 섬은 바다낚시꾼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농어 낚시터이기 때문이다.

오후 4시46분.
50분 가까운 뱃길이 끝나고 페리호는 격포항 방파제로 들어선다.
눈 앞으로 채석강 위 봉우리인 '닭이봉(鷄峰)'이 보이고
그 정상에 자리한 정자도 뚜렷이 눈에 들어 온다.
빨리 배에서 내려 저곳으로 올라가고픈 생각으로 조급해 진다.

오후 5시10분.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쉬지 않고 내달려
닭이봉 정상의 정자에 당도했다.
이곳이 초행길이 아닌지라 정자 내에 위치한 휴게소에서
시원한 음료 한 잔으로 분위기를 잡으려했으나
웬일인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장마가 시작된 때문에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자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채석강과 이어진 자그마한
격포해수욕장이 보이고 ,
해수욕장 좌측 끝부분 너머로는 이른바 적벽강이라는
또 하나의 경승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격포항 일대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수산시장과 회센타 건물, 그리고 음식점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선착장에는 방금 내가 타고 온 페리호가
오늘 운항을 끝내고 내일을 위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 격포항은 옛 수군(水軍)의 근거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이 있던 곳이다.

오후 5시25분.
닭이봉을 떠나 채석강으로 내려왔다.
채석강 [彩石江] 이라 함은 바로 이 해식절벽과 바닷가를
통틀어 이름이다.

이곳 채석강의 지형은 선캄브리아대(지구가 탄생한 약 45억 6천만 년 전부터
최초로 눈으로 보일 정도의 껍질을 가진 생물(Small Shelly Fossil)의 출현으로 시작된 캄브리아기,
즉 5억 4천만 년 까지의 시기로서 지구 전체 역사의 86%를 차지하는 긴 시기)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채석강은 원래 ‘살깨미’라고 불리었는데,
파도와 흐르는 물에 씻겨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은 것처럼 신비로운
절벽과 바다가 이루는 절경이 마치 중국 시성 이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가
강물에 뜬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뛰어들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살깨미"를 나름대로 풀어보자면
"살"은 우리 옛말로 '푸르다'는 의미일 것이고,
"개"는 '물가' 또는 "포구"를 말함이며
"미"는 '메'에서 파생한 말로 추측되는바 이는
'산' 또는 '언덕'을 뜻하는게 아닐까?
"살깨미"라는 우리말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채석강'이라는 이름 대신
옛 이름이 정겨운 "살깨미"라고 부르고픈 내 심정이다.

오후5시32분.
자그마한 격포해수욕장 북쪽 끝 바닷가 바위 위에는
해넘이 채화대가 만들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돌조각으로 만든 '노을공주'상이 서 있다.
주말 오후 가족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관광객들과
행복감을 공유하며 주말 하루 일정을 마감하고 귀가 길에 오른다.

찹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12월26일 오후 '노을공주'상을 바로 옆에서 찍은 것이다.
석상 바로 옆 바닥에 새겨 놓은 명판에 '노을공주'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인어공주'라고 불러야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