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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도(欲知島) : 알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섬.



2009년 4월5일 오전 6시 37분.
오전 3시 대전을 출발한 27인승 우등버스가 새벽을 가르며 달려온 동양의 나폴리 통영.
오전 6시8분 일출시각 전인 5시50분 경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를 움켜 쥐고 바닷가로 내달려 동쪽 하늘만 응시한지 40분 이상 지난 시각이다.

야속하기만 하던 짙은 구름 사이로 이제야 햇살이 고개를 내민다.
6시 50분 출항하는 욕지도행 배를 타기위해서는 이제 자리를 뜰 수 밖에 없다.
오늘도 수평선을 박차고 붉게 타오르는 일출은 보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7시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지 10여분이 지났다.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잔잔한 바다와 그 위를 가르며 고기잡이에 나서는
작은 어선을 보며 털어버린다.

그래! 욕심을 버리자. 지난 해 1년 동안에도 제대로 된 일출은 여름이 물러 가던 8월에
정동진에서 만난 것이 유일무이하지 않았나?



오전 7시 36분.
바람이 심한 날에도 잔잔한 바다로 여행객들을 맞아주는 통영만 내해를 벗어나
비진도를 지난지도 꽤 시간이 지났건만 바다는 너무나 잔잔하고 따듯하다.

소매물도와 욕지도를 수차례 다녀오며 이처럼 잔잔한 바다를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오늘의 섬 산행이 즐거울 것이라는 조짐으로 여겨진다.
잔잔한 바다와 작은 낚싯배, 갯바위의 낚시꾼들의 모습이 어우러진 편안한 정경이다.



오전 7시 59분.
욕지면 소재지인 욕지도의 1/10 정도의 인구가 사는 욕지면 12개의 유인도 중 하나인
연화도 입항을 위해 246톤의 크기에 최대 승객 290명, 33대의 승용차를 싣고
16.5노트의 속도로 달리는 욕지고속 카페리호가 속도를 줄인다.

이제 욕지도까지는 20여분 남짓 남은 시간.
욕지도 산행을 마친 후 오후에 이곳 연화도 산행을 할 계획인지라
바다에 핀 연꽃이라는 연화도와 정겨운 눈인사를 나눈다.



오전 8시 43분.
욕지도에 발을 들여 놓은지 20여분.
대기봉,천왕봉으로 향하는 산행을 위해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근래 들어 급격히 쇠락해 가는 여타 농어촌과 달리 지난 1999년 인구 2,355명에서
금년인 2009년 3월의 인구가 2,335명으로 큰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이곳 욕지도는
그나마 사람 살기에 좋은 고장인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도시에서 느끼는 불황의 그늘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곳 욕지도의 인구도 지난 2003년 3월의 2,760명 보다는 조금 줄어 들긴 했다.



오전 8시 58분.
대기봉,천왕봉으로 향하는 혼곡 부근 능선에서 바라 본 동쪽 바다 색깔이 쪽빛이다.
지난 3월 다녀온 광양 매화축제장 뒷산인 쫓비산의 이름의 유래인
쪽빛(옥색)의 섬진강 물색과 흡사할 정도로 맑고 깨끗함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한려수도해상국립공원 최남단인 이곳만큼 더 맑은 바다가 어디 있으랴!



오전 9시45분.
해발 355m인 대기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려다 보이는 욕지 선착장의 아늑한 모습이 어머니의 자궁 속같은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거센 태풍이 몰아쳐도 끄덕없을 것 같은 자연에 의한 천연 요새처럼 보인다.



오전 10시 9분.
대기봉에서 내려다본 욕지도 북동쪽의 전망이 한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전 내내 이어지는 옅은 연무가 걷히지 않아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점이다.
지난해 9월21일 방문시에는 멀리 바다위의 작은 섬들도 보일 정도로 시계가 좋았었는데..



(2008년 9월21일 오후 2시 15분)
옅은 연무로 인해 수평선 부근이 잘 보이지 않기에
지난해 9월21일 이곳 욕지도 방문시 찍은 사진을 다시 한 번 꺼내 본다.
남쪽 해안에서 동쪽으로 바라 본 풍경이다.

바로 앞에 삼여도가 보인다.
용왕의 세딸이 900년 묵은 이무기로 변한 젊은 총각을 사모하게 되자
용왕이 세 딸을 바위로 만들었고, 총각은 용왕이 미워 산을 밀어내어
두개의 섬으로 바다를 막아버렸다는 전설 속에 세 여인이란 뜻으로 삼여도라 불린다고 전해진다.



오전 10시 33분.
이곳 욕지도의 최고점인 해발 392m천왕봉 아래 억새밭 부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조선시대에는 통제영 수군들이 사슴을 수렵하여 녹용(鹿茸)을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다 하여
녹도(鹿島)도 불리기도 했던 이곳 욕지도.

100 여 년 전 노승이 시자승을 데리고 연화도의 연화봉에 올랐을 때
“어떤 것이 도 입니까?” 라는 시자승의 물음에 대해
“욕지도 관세존도(欲知島觀世尊島:욕지도가 세존도를 바라본다.
즉 알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면 석가세존을 본받으라는 뜻)”
라 대답하며 욕지도를 가리킨 것이 이 섬 이름의 유래라는 설이 전해 지기도 한다.



오전 11시 8분.
산행을 마치고 다시 욕지항으로 돌아왔다.
점심식사를 위해 욕지 짬뽕,짜장면으로 유명하다는 한양식당으로 가는 동네 어귀
활짝 핀 동백나무에서 선혈처럼 붉은 동백꽃을 폰카에 담는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내 자신 마음 속 나이가 갓 피어나는 스무 살이듯 저 여인의 마음도 이팔 청춘이리라.



골목 한 귀퉁이 텃밭에서는 밀이 봄 햇살과 미풍에 살랑거린다.
BC 1만∼1만 5000년경에 재배되기 시작한 가장 오래된 작물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평안남도 대동군 미림리에서 발견된 밀은 BC 200∼1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반월성지, 부여의 부소산 백제 군량창고의 유적에서도 밀이 발견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40여년간 이어졌던 미,소간의 냉전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이 우위를 확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핵무기도 병력 수에 근거한 재래식 무기의 확보 여부도 아닌 바로 밀 수확량이었다.
세계 3대 밀 수출국인 미국,캐나다,호주 3국의 밀 수출 통제권을 손아귀에 쥔 미국에게
상습적인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구 소련권은 말 그대로 한낱 부처님 손바닥에서 근두운으로
잔 재주를 부리던 손오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주식인 쌀 농사만은 자급자족을 해야하지 않을까?



오전 11시38분.
허름한 건물의 낡고 소박한 한양식당 탁자 위에 유명하다는 욕지도 해물짬뽕이 놓여진다.
반찬은 단무지와 양파.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長崎]에서 화교들이 개발한 야채와 해물을 기름에 볶아 고추기름과 육수를 넣고 끓인 중국요리.
차오마몐 [炒馬麵(초마면)]이다.
산행을 마친 후 허기진 나의 뱃속 때문인지? 아니면 싱싱한 해물 때문인지?
평소 중국요리를 즐기지 않는 나의 식성이지만 먹고 난 후 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나왔던 '함포고복 [含哺鼓腹]'이라는 말을 떠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