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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도 [蓮花島] : 바다에 핀 연꽃



2009년 4월5일 일요일 오후 1시 35분.
오전에 욕지도 여행을 마치고 욕지도를 떠난 뱃길로 20분만에 도착한 연화도.
산행을 위해 걸음을 옮긴지 10여분.
1924년 5월13일 개교한 원량초등학교의 분교인 연화분교 앞을 지난다.

98년 9월 양유분교 폐교,99년3월 두미분교폐교,2008년 3월 옥동분교 폐교에 따라
현재 남은 3개 분교 중 하나이다.
현재 2개 학급 7명의 학생을 2명의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계시다.
수년 후 다시 찾을 때까지 폐교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연화분교 앞을 지나 오름막길을 오르며 연화사 앞을 지난다.
100억을 들여 새로 지었다는 연화사는 산행 말미에 들리는 코스로 잡았다.

400여년전 서울 삼각산에서 도를 닦던 연화도인이 연산군의 억불정책에의해 암자를 빼앗기고
이곳 연화봉에 실리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언에 따라 연화도사와 함께 수도하던 비구니 세 분이 그의 시신을 바다에 바다에 던지자
그 자리에서 한송이 연꽃이 떠올랐다하여 연화도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해안선 길이가 12.5km이며 크기가 욕지도의 1/4에 불과한 섬이지만
해안의 풍광은 욕지도의 그것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파도, 조류, 해류 등의 침식으로 깎여 해안에 형성된 절벽인 해식애(海蝕崖)가
욕지도에 비해 발달한 때문이리라.



오후 2시7분.
손목시계의 고도계를 보니 해발 200m정도 된다.
최고점인 연화봉이 212m정도의 작은 섬이다보니
바닷가를 떠난지 40여분만에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관광책자에는 라들달바위,대바위,중바위 등등 수많은 이름들이 나열되지만
중요한건 이름이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의 강산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속세에 찌든 때를 마음속으로부터 걷어낸다.



북동쪽으로 바라보니 해안가 절벽 바위 위에 올라선 산행객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멋져 보인다.
나도 일주일만 젊었다면 저런 자태로 멋진 사진을 한 장 찰칵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멀리 산 중턱 절벽에는 지난 2004년 11월 3일에 낙성식을 했다는 보덕암(普德庵)이 보인다.
암자 옆 동쪽 언덕의 해수관음상도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다.



서쪽편으로 보이는 풍광도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절경이다.
뾰족하게 솟은 바위 모습이 관광책자에서 본 망부석과 비슷한 모양이긴 하나
확신할 수 없으니 그냥 멋진 바위 쯤으로 기억해 두기로 한다.



칼날같은 작은 바위 위에 올라서 손을 흔드는 세분의 중년 남성들 모습을 바라보다
생뚱맞게 세명의 비구니 생각이 나는건 왜일까?
연화도라는 이름의 유래인 연화도사와 함께 수도한 이들도 성운, 성연, 성월이라는 세 명의 비구니였지만,

16세기 중반 사명대사와 함께 이곳 연화도에서 수도한 이들도 비구니 세 분이었다.
즉, 대사의 누이 임채운(승명;보운), 대사의 약혼녀였던 황현옥(승명:보련),
대사를 짝사랑하다 수도승이 된 김실정(승명;보월).



연화봉 부근에서 서쪽으로는 주위에 천년송이 자란다는 용머리가 보인다.
용머리라는 이름은 여러곳에서 혼용된다.
제주도에도 유명한 용머리 해안이 있고, 전남 화순 해수욕장 끄트머리의 용머리해안도 잘 알려진 곳이다.
우리 정통 건축의 지붕 끝부분도 용머리라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을 유난히 좋아하는듯하다.
그러나 나는 별로이다. 용띠인 마누라에게 어제밤에도 엊그제 집에 다녀간 막내아들에게
사준 생선회값이라는 명목으로 나는 구경도 못한 회값 10만원을 빼앗겼다.



이곳 연화도는 면소재지인 욕지도에 비해 인구는 1/10이지만 사람이 거주를 시작한 역사는 더 오래된 곳이다.
또한 불교성지순례지 목록에도 올라 있을 정도로 불교신자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앞에서 거론한 보운, 보련, 보월 세 명의 비구니 스님은 사명대사께서 연화도를 떠난 후에도 그대로 섬에 남았다 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들 세 스님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해전 현장을 따라다니며
전법을 알려주고 거북선 건조법을 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가사를 걸치고 바다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왜군을 무찌르는 것이 마치 붉은 구름이 피어나는 것 같다하여
이들을 자운선사(紫雲禪師)라 불렀다 한다.



오후3시 56분.
하산길에 들른 연화사 담 옆에 핀 벚꽃이 이채롭다.
벚꽃이 귀한 연화도이어서인지 더욱 돋보인다.

담 위에 얹은 기와의 부막새에 새겨진 연꽃 문양이 뚜렷하다.



100억원 이상을 들여 새로 지었다는 연화사의 주 불전인 대웅전 모습이다.
대부분 사찰의 대웅전은 직사각형 형태로 전면의 폭이 넒은데 비해 이곳 대웅전은
차라리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띄는 팔작지붕이다.

기초 부분은 송광사 관음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 같은 방식인 장대석 기단인듯 하고
단청은 도리,보,서까래 등 전체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사찰 단청에 적용되는 금단청인듯하다.
공포 형식은 기둥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점으로 보아 다포계인듯하다.

그러나,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나의 지식의 터무니 없이 얕음을 또 절감한다.
다음에 사찰 방문시는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와야겠다.



연화사를 나서며 귀한 손님을 만났다.
다름 아닌 노고초(老姑草)·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불리는 할미꽃이다.

초등학교 시절 부르던 동요 가사가 생각난다.
"싹 날 때에 늙었나? 꼬부라진 할미꽃.."

그러나, 꼬부라져서 할미꽃이 아니라 흰 털로 덮인 열매의 덩어리가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같이 보이기 때문에 할미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손녀의 집을 눈앞에 두고 쓰러져 죽은 할머니의 넋이 산골짜기에 핀 꽃이라는 전설도 전해 진다.



오후 5시 16분.
산행을 마치고 부둣가 횟집에서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배를 불린 후
부둣가에 피곤한 다리를 펴고 편히 앉았다.
한가로이 노니는 갈매기떼와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니
불현듯 무념무상 [無念無想]이라는 불교 용어가 머릿 속에 떠오른다.



부둣가에서 생선을 다듬는 노부부가 바다로 던지는 내장 등을 노리는 갈매기의 눈매가 매섭다.
요즈음 대도시의 비둘기들이 사람이 주는 먹이만 받아 먹고 살아서인지
피둥피둥 살만 쪘다고해서 '닭둘기'라고 불린다는데,
이곳 갈매기도 "닭매기"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피둥피둥 살이 올랐다.



오후 6시3분.
일몰 시각이 가까워 지면서 고깃배도 한 척씩 돌아온다.
저 고깃배들이 모두 만선의 기쁨을 누리고 오는 중이라면 그보다 더 기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희망만이라도 가져 본다.
이렇게 돌아오는 이들이 있으면 나처럼 떠나는 이들도 있기 마련.
섬을 떠날 채비를 서두를 시간이다.



오후 6시27분.
나를 태운 배가 연화도를 떠나 통영항을 향해 출항한지 10여 분이 지난 시점.
18시 50분인 일몰 시각에 맞춰 멋진 일몰 사진을 찍으려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하루 종일 구름 구경도 못하던 하늘이건만 수평선에 길게 가로 누운 짙은 구름 속으로
저녁 햇살이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기 직전이다.

이제 카메라를 배낭 속에 잘 챙겨 넣고 통영까지 한 시간 남짓 남은 시간동안
잠깐 눈이라도 붙이기 위해 선실로 발길을 돌린다.
즐겁고 행복했던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