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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800리 옛길 걷기-제2구간(1)



2009년 5월5일 오전 9시 55분.

지리산 옛길걷기를 위해 지난 4월 1차로 열린 총 20여km의 1,2구간 중
2구간을 걷기 위한 첫발을 내 딛는다.

지난 2007년부터 시작하여 5년간에 걸쳐 완성될 총 300여 km구간의
극히 일부이지만 시작이라는 의미는 내게 남다르게 다가온다.
지리산길이라는 아담한 나무 팻말이 정겨운 의탄교를 지나며
지리산길을 향한 내 발걸음이 시작된다.



오전 9시53분.
도도히 흐르던 지난 여름의 큰 물줄기에 비해 가뭄 때문인지 유난히 줄어든
엄천강 위를 천천히 걸어 해발 250m정도인 의중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 당산목이 길손을 반가이 맞아 준다.

지난 197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둘레 6.4m에
높이가 22m였던 이나무는 당시 수령이 620년이었으니
이제는 650년을 훌쩍 지나 700년에 가까워 진다.

보호수 주위를 어지러이 얽혀 지나는 각종 전선들로 인해
경관을 해치는 점이 안타깝다.



오전 10시 7분.
의중마을 한켠의 가파른 경사길에 만들어진 정감어린
나무계단을 밟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언덕을 오르자 대나무 숲이 우거진
숲길이 나타난다.

그리고 숲길이 끝나면서 낙엽수들과 경쾌한 새 소리가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는다.
앞으로 지리산길을 자주 찾으려면 새에 대한 공부도 필요할 것 같다.



오전 10시 19분.
울창한 나뭇잎들로 인해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숲길을 지나
햇빛이 드는 양지가 잠시 나타나는가 했더니
길가 나뭇가지에 걸린 벌통이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나무 상자를 잘라 만들고 우리 주위에 흔한 폴리 끈으로 나무에 동여맨
어찌 보면 어설픈듯한 벌통이지만 꿀벌들이 쉴새없이 드나들며 꿀을 모은다.



오전 10시 28분.
벽송사와 서암정사가 있는 추성마을 쪽으로 향하는 오르막 경사의
이 능선 길은 조금 전 지나온 의중마을 부근에 비해 나뭇잎이 아직 옅은 색이다.
남향하여 햇빛을 많이 받는 의중마을 부근에 비해 남서쪽 사면인지라
아무래도 따뜻한 봄 햇살이 좀 약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간혹 울창한 나무들이 좀 뜸하여 햇빛을 많이 받는 양지에는
이처럼 예쁜 각양각색의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산행중 맞는 가장 큰 피로회복제인 것 같다.



오전 10시37분.
의중마을에서 의암정사와 벽송사를 이어주는 삼거리까지는
남서쪽을 향한 완만한 오르막이다.
해발 300m를 넘어 400m에 가까워지면서 이처럼 산죽이 터널을 이루는곳을
자주 만난다. 어떤 지점은 마치 밤이 찾아온 것처럼 심히 어둡기까지 하다.



오전 11시2분.
서암정사 [西庵亭寺] 의 특이하게 만들어진 입구로 들어선다.
벽송사 주지였던 원응(元應)이 1989년부터 10여 년간 불사를 일으킨 곳으로
당초에는 벽송사의 부속암자였으나 근래들어 벽송사와 같은 반열인 합찬 해인사의
말사로 자리 잡음은 물론 이제는 탐방객 수에서 벽송사를 능가하는 유명 사찰이 되었다.



이곳 서암정사는 원응 스님이 자연 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하고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그린 조각법당을 10여 년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사찰 안에는 대방광문, 석굴 법당, 광명운대, 사자굴 등이 있다.

이들 모두는 자연의 암반에다 굴을 파고 조각을 함으로써
불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칠선계곡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신도와 관광객들이 찾는다.



오전 11시49분.
서암정사에서 독특한 한약차를 마시는 등 30여분을 아름다운 비경에 젖은 후
해발 530여m에 위치한 벽송사를 찾으니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 2기가 나를 반긴다.
왼쪽이 여장군인 금호장군(禁護將軍),
오른쪽이 남장군인 호법대장군(護法大將軍)이고 재질은 밤나무이다.
왼쪽 금호장군은 1969년에 일어난 산불로 머리가 파손되었다.



생각보다는 상당히 넓은 절터를 가진 이곳 벽송사는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사적기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520년(조선 중종 15) 벽송(碧松) 지엄(智嚴:1464∼1534)이 중창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영관·원오·일선 등이 이곳에서 선을 배웠다고 한다.

그 후 6.26동란 당시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면서 전쟁의 와중에서
전소되어 폐허로 남았던 것을 전술한 원응 스님이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한다.



일반적인 사찰의 석탑은 법당 앞에 자리잡는게 보통이나
보물 제474호인 이 삼층석탑은 특이하게도 벽송사 뒷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전 예습을 하지 않고 무작정 길을 나서는 많은 탐방객들이
이 석탑의 존재를 모르고 지나간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3.5m의 이 석탑은 또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낮12시6분.
벽송사를 떠나 동쪽 방향으로 해발 700m이상의 능선으로 길게 이어지는
산길 입구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 루트를 만난다.

민족의 영산인 이곳 지리산은 한편 우리 근대사에 있어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빨치산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빨치산들이 토벌대의 추적을 피해 산죽,낙엽,바위,굴 등을 이용하여 은신하던 루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