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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무릇 피어나는 가을비 속 불갑사

2010년 9월11일 토요일 오전 9시47분.
아침 일찍 대전을 출발해 2시간 여를 빗속을 뚫고 달려 온 차는
불갑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
빗방울을 더욱 거세진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문의 기둥을 한줄로 해서
건물을 짓는데서 그 이름을 얻었다는 일주문(一柱門).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사찰 일주문에서 접하는 현판이 없다.

오전 9시54분.
사찰의 입구에 일주문을 세운 것은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세속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 내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에서이다.

일주문을 지나치자 만나는 육각정 앞 연못은
철이 지나 꽃이 다 져버린 수련 잎들만이 온몸으로
세찬 빗줄기를 견디고 있다.

오전 10시18분.
불갑사 경내로 본격 진입하는 금강문이 보이는 길가에서
금년 들어 처음으로 꽃무릇을 만난다.
자그마한 규모의 군락지에서 이제 막 꽃대가 분주히 올라오는 중
일찍 핀 꽃무릇의 만개한 모습을 보니 반갑다.

마치 마른 짚단만 버려져 있는 황무지 같은 땅 속에서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를 자양분 삼아 연록색 꽃대가 외로이 솟아 오른다.
그 가녀린 꽃대 끝에서 마치 불타듯 붉은 빛을 띈 꽃무릇이 피어난다.
이제 막 봉오리가 맺힌 경우가 더 많지만
그 중에서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붉은 꽃들이 한 둘 눈에 띈다.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꽃무릇을 가까이서 살펴 본다.
흔히들 이 꽃무릇을 '상상화'라고들 부르지만 잘못된 것이다.
이 꽃은 일명 '석산(石蒜)'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이며
"상사화"라는 꽃은 따로 있다.

꽃과 잎을 동시에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상사화와 공통점이 있으나
이 붉은 꽃무릇은 원산지가 일본이며 9월 중순경 꽃이 피고 진 후
비로소 잎이 돋아나와 겨울을 넘긴 후 봄철이 되면 또 다시 잎은 시들어 없어진다.
그래서 흔히들 편의상 '상사화'라 칭하는 모양이다.

금강문 앞 개울물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끌어모아 흐른다.
그 흐름이 얼핏 보면 마치 지난 여름 지리산 계곡 산행시 경험한
고산 지대의 세찬 계곡물 마냥 온몸을 짜릿하게 한다.


오전 10시22분.
사찰에서 일주문 다음의 두 번째 문인 '금강문'앞에 섰다.
문 앞, 그리고 담벼락에 꼴 사납게 걸린 비에 젖어 누더기처럼 여겨지는
현수막들을 보니 딱 한 마디 글귀가 떠 오른다.
"염불에는 관심없고 잿밥에만 눈독 들인다."

제발 절간이든 에배당이든 장사꾼 같은 꼴 사나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없어졌으면 싶다.

'금강문'을 지키는 오른쪽 역사는 '나라연금강'이고
왼쪽을 지키는 역사는 '밀적금강'이다.
금강역사는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무리를 경계하고,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불갑사 스님들은 '하안거 [夏安居]'와
'동안거 [冬安居]' 기간 동안 이런 공부는 않고 뭘 했는고?
"이 뭣꼬!" 해수욕장이나 스키장에만 다녀왔나?

사찰의 세번 째 문인 '천왕문'을 향한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진다.
당초 계획했던 이곳 불갑산 최고봉인 연실봉(해발 516m)을 거쳐
장군봉-투구봉-덫고개로 이어지는 산행은 포기해야할듯 하다.

일명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는 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광목천왕,증장천왕,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들이다.

천왕문을 지나 보물 제830호인 불갑사 대웅전을 바라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측면 모두
가운데 세 짝 문을 연화문과 국화문으로 장식했고
좌우칸에는 소슬 빗살무늬로 처리한 건물이다.
내 개인적 소견으로는 지붕 구조를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지었으면 더 안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웅전 우측에 직각 형태로 자리 잡은 일광정(一光亭)의 모습이다.
사찰 경내의 건물에 "정(亭)"이라는 글을 빌린 이유도 고개가 갸웃거리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듯 보인다.
건물을 지은 지면이 우측으로 약한 오르막 경사를 이룬다.
그러다보니 건물 기둥 높이가 좌측이 우측보다 높은 기형적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면 우리 조상들의 온돌문화의 과학적 우수성을 이해할 수 있다.
좌측 아궁에서 불을 피우면 온돌은 우측으로 오르는 경사를 따라
연기가 잘 빠지게되는 것이다.

일광정 건물에 이어 이번에는 대웅전 건물을 면밀히 관찰해 본다.
통상 대부분의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대웅전의 경우
석가모니불을 현판이 위치한 전면을 향하고 좌우로 통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신다.

그러나 이곳 불갑사의 대웅전은 전면 중앙에 불화가 걸려 있고,
불상은 사진에서 보듯이 측면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창건년대가 불확실한 이곳 불갑사.
384년(침류왕 원년)에 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인도에서 온 마라난타가 존자가
이곳 불갑사를 창건했다는 주장도 있는바 고향인 남서쪽 인도를 바라보기 위함일까?

오전 10시45분.
불갑사 경내를 벗어나 뒷편 언덕의 저수지가에서
온몸으로 세찬 비바람을 맞아 본다.
멀리 산정을 휘감아 도는 비구름과
저수지 수면을 때리는 굵은 빗방울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본다.
오직 귓전에 울리는 소리는 빗소리뿐. 마음이 평온해 진다.

저수지 제방을 따라 옥잠화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다.
45도 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사면을 따라 흰빛을 뽐낸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불갑사를 찾은 여행객들은
삼삼오오 옥잠화 군락 속에 뛰어 들어 사진으로 여행 추억을 남기기 위해 분주하다.
한참을 기다려 사람들을 피해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중국 원산으로 ‘추억'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 옥잠화는
'옥비녀꽃'이라고도 불리는데, "옥잠화(玉簪化)"가 바로 옥비녀꽃이라는 말인데,
꽃피기 전의 봉오리의 모습이 옥비녀를 닮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 옥잠화는 낮에는 오므라 들고 밤이 되면 활짝 핀다.

옥잠화 군락과 이웃하여 이제 끝물인 "상사화"도 군락을 이룬다.
우리가 쉬이 접할 수 있는 상사화는 분홍빛인데 비해 이 꽃은 노란색 상사화이다.
여름 꽃인 상사화인지라 이제 지기 시작하는 고로 그리 싱싱하지는 않지만
빗물을 머금은 모습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이 꽃이 바로 우리나라가 원산인 "상사화[相思花]"이다.
앞서 얘기한 '꽃무릇'과 같은 백합과이지만
'꽃무릇'이 꽃이 피고 진 후 잎이 나는데 반해
이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났다가 6~7월에 잎이 진 후
8월에 꽃대가 외로이 솟아 올라 꽃이 핀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하여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전 10시56분.
저수지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주변 산자락은 온통 꽃무릇 군락지이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붉은 꽃을 피우기 위한 외로운 꽃대가 속속 자란다.
아마도 일주일 내지 열흘 후면 이 일대가 온통 꽃무릇의 붉은 빛으로
환하게 보이리라.

주위의 다른 야생화들 사이를 비집고 솟아 올라 오는 가녀린 꽃대들.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연약해 보이지만
억센 야생화 잎들 사이로 비집고 올라와 마치도 실낱같은
특이한 형태의 꽃을 피우는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

하나의 꽃대 끝에 여섯 송이의 꽃을 활짝 피운
꽃무릇의 모습을 바로 위에서 자세히 살펴 본다.
꽃잎은 뒤로 말리고 수술이 유난히 길게 튀어 아논 모습이
너무나 특이한 꽃이다.
선이 굵고 투박한듯한 우리네 정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극히 일본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꽃임은 분명해 보인다.

너무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산행을 포기하고
관광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대부분 저수지 주위를 산책한다.
등산 배낭을 벗어두고 등산화 차림으로 산책을 즐기는 이들도
이제 꽃대가 솟아나기 시작하는 꽃무릎 군락지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연발한다.

아름다운 서해바다 조망과 꽃무릇 감상을 곁들여 산행을 계획한 이들에게는
실망스런 궂은 가을비 내리는 오늘이지만 꽃과 꽃잎이 서로를 사모하기만할뿐
운명적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는 꽃무릇이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빨리
꽃을 피우게 해주는 고마운 가을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활처럼 뒤로 휘어진 꽃잎과 길고 가녀린 수술대에도
작은 물방울들이 촘촘이 맺혀 간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바로 옆 봉오리에게 뽐내듯
활짝 핀 꽃이 교만한 웃음을 짓는듯 하다.

오전 11시23분.
평소 조금씩 흐르던 사찰을 휘감아 도는 개천의 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게 흐른다.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 내리는 물줄기가
거대한 폭포를 이루는 곳도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한다.

낮 12시28분.
불갑사 경내와 주위 관광을 마치고 주차장 부근 작은 정자로 돌아와서
잠시 점심 전의 휴식을 취한다.
빗물을 머금은 단풍잎들마다 생기가 넘친다.

아직 우리의 일상은 여름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지만
가까이에서 살펴 보는 단풍나무에서는
잎색깔이 변해가는 모습에서 가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오후 2시4분.
점심을 끝낸 후 오랫동안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동행한 일행들 중 우의 등으로 단단히 무장한 후 우중산행을 강행한
몇몇 억척산꾼들 덕분이다.
항상 산행으로 주말이나 휴일 하루 일정을 보내는 나에게도
오랫만의 여유로운 휴식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자주 대면을 하면서도 오랜시간 여류롭게 담소를 나누지 못하던 이들과도
즐거운 우중담소(雨中談笑)로 얼굴의 주름이 몇가닥 늘어난듯하다.
멀리 보이는 불갑산 자락을 휘감아도는 구름의 움직임도 여유롭게 느껴진다.

오후 4시
귀가 길에 들린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올라 있는
영광백수해안도로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칠산정'이라는 이름의 정자 아래 바닷가 전망대에서
드넓게 펼쳐진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휴일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이 전망대 우측으로는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818-3
영광 정유재란열부순절지[靈光丁酉再亂烈婦殉節地]가 있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거주하던
동래정씨(東萊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 문중의 9명의 부인들이
왜란을 피해 지금의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墨防浦)까지 피신하다가
왜적들에게 잡히자 대마도를 향해 항해하던 도중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남해 앞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