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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에서 코스모스역으로 이어진 이명산 산행

2010년 9월18일 토요일 오전 10시10분.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에 자리한 1,500년 고찰
다솔사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 발걸음이 십 여분을 경과하자
온몸에는 늦더위로 인한 땀이 솟기 시작하지만
울창한 소나무숲에서 뿜어나오는 공기는 무척이나 신선하게 여겨진다.

오전 10시14분.
도로변 울창한 솔숲에 둘러싸인 널찍한 풀밭.
우매한 내가 보기에도 첫 눈에 멋진 장소로 보인다.
중앙부에 버티고 앉은 반원형 돌을 자세히 살펴 본다.

"御禁穴封表(어금혈봉표)"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이곳이 ‘봉황이 우는 터’라고 불린 명당이어서
임금이 직접 어명을 내려 소위 말하는 세도가들이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좌측에 부기된 글에는 '광해 12년 을유 9월'이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1585년에 만들어졌다는 얘기인가?
대부분의 산행객들이 이 돌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난다.
그들의 역사 의식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전 10시20분
이곳 다솔사의 주불전 역할을 하는 적멸보궁(寂滅寶宮)앞에 당도했다.

적멸보궁이라함은 법당 내에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가리킨다.
이곳 다솔사의 적멸보궁은 당초 석가모나불을 모신 '대웅전'이었으나
지난 1978년 이곳에서 '사리'가 발견된 후 현판을 고쳐 달았다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오대적멸보궁은
①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중대(中臺) 상원사(上院寺)의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의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을 말한다.

적멸 이라는 뜻 자체가 고요할 적 , 다할 멸.
즉,고요함조차도 다하였거나, 고요함조차도 잊었다하는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적멸보궁은 그렇게 고요함조차 뛰어넘은 보물궁전 이라는 뜻이되므로
그러한 높은 경지의 분이 계신 처소를 적멸보궁이라고도 하고,
그러한 경지로 이끌만한 좋은 처소를 의미하기도 하는 뜻이다.

특이하게도 이곳 다솔사 적멸보궁은 불단 위에 와불을 모셔두었다.
그 와불 너머 창밖으로 사리탑이 보인다.

건물 뒷편 사리탑 앞에 가서 잠시 경건한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비록 나 자신 믿는 종교는 없으나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본 정신은 우리의 삶의 길잡이가 되리라.
더구나 이곳 다솔사에서 독립선언문을 초안한 만해 한용운이 머물른적이 있고,
소설가 김동리가 '등신불'을 이곳에서 집필했음을 상기시킨다.

오전 10시25분
다솔사를 떠나 본격적인 봉명산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들머리에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뿜어 내는 소나무과의 나무 중에서도
피톤치드 발생량이 으뜸이라는 '편백나무(일본명-히노끼)'군락이 잠시 이어진다.

이곳 다솔사를 찾기 전 읽은 글 중에 기억 나는 귀절을 마음 속으로 다시 음미해 본다.
"다솔사는 다섯 개 멋진 밭을 갖고 있다.
솔밭, 차밭, 대밭, 그리고 항상 일렁이는 바람밭,
마지막으로 다솔사를 찾은 그대 가슴에 안겨주는 생애 대한 그리움의 밭이다."

오전 10시43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지 20여분 동안 소나무 숲이 계속 이어진다.
'다솔사'라는 이름을 잘못 이해한 어느 사람이 소나무가 많아서 '다솔사'라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한적도 있다.

그러나, "다솔사(多率寺)"라는 이름의 의미는
‘많은 불심을 거느린다’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의미아다.
그래서 이 절에서 무슨 일을 도모하면 반드시 일이 성취된다는 말도 있다.

오전 10시55분.
봉명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봉명정'앞에 당도했다.
소나무 숲이 조망을 방해함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망루처럼 만든 특이한 정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한 연무로 인해 남해 바다의 조망이 불량한 날씨이다.

봉명산 정상석에는 높이 408m로 표기되어 있다.
지난 1983년 사천시가 사천군이던 시절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던 봉명산은
방장산(方丈山) 또는 주산(主山)이라고도 불리었었다.
풍수지리학상으로 봉(鳳)이 우는(鳴) 형국이라 하여
봉명산(鳳鳴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기에 범부인 내 머리로 상상의 영물인
봉황을 그려보지만 지식의 한계를 느낀다.
과거 가까이 있는 이명산(理明山:570m) 봉우리와 이어져
이명산에서 시작된 무고천이 이곳 봉명산을 거쳐 흘렀었다.

오전 11시30분
봉명산 정상에서 한동안 땀을 식힌 후
오늘 산행 여정 중 최고봉인 이명산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전형적인 육산인 산행로 중 나타나는 너덜지대에서 5~6기에 달하는 돌탑군을 만난다.
이 많은 돌들은 아마도 이맹산(理盲山)이 이명산(理明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이무기와 얽힌 전설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낮 11시41분.
봉명산과 이명산 사이의 깨사리고개로 향하는 내리막 길은
한동안 이와같은 숲길이 이어진다.
비릿한듯한 풀냄새가 신선한 느낌을 전해 준다.

자그마한 숲속이지만 조금만 신경을 써서 살펴 보면
온갖 생명이 꿈틀거린다.
어린 순은 나물로 식용하고, 한방에선 뿌리를 감기,두통,신경통,관절염,중풍 등에 쓰이는
강활의 여린 순으로 배를 채우는 여치의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산골짜기 냇가와 숲 가장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빛 이삭여뀌도 이처럼 온통 녹색인 풀숲에서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붉은 빛이 어찌보면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마치 관절통·위통 등에 사용하면 큰 효과가 있을듯도 하다.

지난 봄 온 산을 뒤덮다시피 희끗희끗한 연노랑 꽃을 피우던 밤나무도
이제 결실을 맺어간다.
가지 끝 부분의 밤송이들은 아람이 벌어져간다.

낮 11시55분.
이제 깨사리고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멀리 북쪽으로 계명산의 계봉 부근으로 흰 구름이 잔잔한 초가을 바람을 타고 떠 다닌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은 초가을이건만 햇빛은 억새꽃마저 강한 햇살에
고개를 숙이며 외면할 정도로 뜨겁다.

낮 12시
봉명산과 이명산을 2차선 차도로 갈라 놓은 깨사리고개에 당도했다.
'깨사리'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고사리'를 말함인데..
이 '깨사리'가 같은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오래전 이명산에서 시작된 무고천이 봉명산을 거쳐 흘러 내렸었건만
사천시 곤양면과 하동군 북천면을 연결하는 이 도로가
능선으로 연결된 하나의 산을 두 토막을 내어 놓은 것이다.
어디 이런 곳이 우리나라 금수강산 중 이곳 뿐이랴마는
마치 어머니 젓가슴처럼 부드러운 능선으로 연결되었을 산을 두 토막 낸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음은 어쩔 수 없다.

낮 12시58분.
이명산 정상에 올랐다.
이명산(理明山) 상사봉(想思峯) 해발 570m라 새겨진 정상석 주위로
수많은 잠자리떼가 마치 검은 점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 다닌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 산은 동경산(東京山)이라고 불리어졌는데
이 동경산의 정상에는 커다란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심술 사나운 커다란 이무기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이 이무기는 화가 나면 목을 내밀고 독을 뿜었는데
진교 방면으로 향하면 산밑의 월운리 사람 중에 장님이 생기고
북천 방면으로 목을 돌리고 독을 뿜으면 북천쪽 사람중에 장님이 생기는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주민들이 힘을 모아 불에 달군 돌로 못을 메우고 이무기를 몰아낸 후
평화를 찾았다한다.
그런 연유로 이맹산(理盲山)으로도 불리던 산 이름이 이명산(理明山)이 되었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오늘 산행이 끝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감상할 코스모스축제가 열리는 하동군 북천면쪽이 내려다 보인다.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벼이삭과 푸른 하늘의 구름이 무척 평화롭게 보인다.

남쪽으로 금오산과 남해바다가 보이는
'이명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자에서 점심식사와 함께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비교적 긴 휴식 시간을 가지는 호사도 누려 본다.

오후 1시50분.
이명산 정상에서 북천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에서 만나는
세개의 시루떡을 닮은 바위 중 첫번 째 바위를 만난다.

암벽 한쪽면을 다듬어 만든 이명산마애석조여래좌상 [理明山磨崖石造如來坐像] 이다.
지난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된바 있으며
제작기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전해진다.
기도발 좋기로 소문난 때문인지 기도하는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무언가를 빌고 있다.

정면에서 자세히 관찰해 본다.
관련 문헌에는 아래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

"머리부분은 고부조(高浮彫)로 처리되었고 목 아래는 음각선(陰刻線)으로 간단히 윤각선만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로 육계가 크게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양감이 풍부하다.
얼굴 외의 신체 부분은 선각(線刻)이 거의 마멸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들어올리고 왼손은 팔을 구부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

오후 1시53분.
두번 째 시루떡 모양의 바위 또한 그 형상이 기묘하다.
마치 찰흙을 겹겹이 쌓아올려 무언가를 만들다 잠시 쉬는듯한 느낌을 준다.

측면의 모습은 마치 강원도 영서지방 산악지대에서 접하는
석회석 동굴이나 종유굴에서 보는듯한 퇴적 형태를 보여준다.
마치 오랜시간 바닷속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퇴적암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또 다른 반대쪽면은 거대한 괴물의 벌린 입을 연상시킨다.
더위에 지친 많은 산행객들은 거대한 바위 그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더위를 식힌다.
마치 거대한 에어컨을 틀어놓은듯 시원한 냉기가 주위를 감싸고 돈다.
잠시 머문 동안에도 이마의 땀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오후 2시2분
세번 째 만나는 시루떡 모양의 바위 또한
측면으로 보이는 주름 잡힌 형태는 비슷하다.
붉은 빛을 조금 띄는 것을 보아서는 철분이 함유되어 산화된 때문인것도 같은데
전형적인 육산인 이곳에 이처럼 거대한 암반이 생뚱맞게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이 바위의 다른 한쪽은 마치 여러가지 동물들이 한곳을 응시하며
호시탐탐 사냥감을 노리는듯한 묘한 형상이다.
얼핏 보아서는 거북의 형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유추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을 탓하며
하산길을 재촉한다.

오후 2시36분.
산행이 끝나고 평지로 내려서는 물가에서 물봉선 군락과 마주친다.
노란색이나 흰색도 있는 물봉선. 이곳의 경우 색깔이 유난히 진하다.
봉선화와 모양이 비슷하고 물가에 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봉선화와 마찬가지로 손을 살짝 대기만 해도 열매가 터져 씨가 밖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영문이름도 Touch-me-not이다.

오후2시54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의 이병주문학관 부근 도로가에서는
작은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는 '꽃무릇'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일본이 원산지로 다른 말로 '석산'으로도 불리는 이 꽃은 잎이 없는 꽃대에서 9∼10월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이 떨어진 다음 짙은 녹색의 잎이 나오는데,
이 잎은 다음해 봄에 시든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우리나라 원산인 '상사화'와 혼돈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사화와 꽃무릇은 서로 다른 꽃이다.

오후 3시7분.
이병주문학관 입구 도로가에서 문학관으로 이어지는 벌판 양편은 온통 코스모스밭이다.
축제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줄지어 만들어 세운 허수아비가 아직은 외로워보인다.
이병주문학관은 "관부연락선" , "지리산"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지난 1992년 4월 71세를 일기로 타계한 하동 출신의 작가 '이병주'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8년 4월 이곳에 건립된바 있다.

비록 37년만의 심한 여름 더위에 이어진 늦더위로 인해
코스모스의 개화 시기가 예년보다 늦어지기는 했지만
드넓은 벌판을 온통 수놓은 코스모스가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모습은
그저 바라보기만해도 5시간여의 산행으로 인한 피로를 일시에 풀어준다.

어린 시절부터 주위에서 흔히 접해왔고
서민적인 느낌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코스모스가
멀리 멕시코에서부터 온 세계로 퍼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한방에서 뿌리를 제외한 식물체 전체를 추영(秋英)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눈이 충혈되고 아픈 증세와 종기에 사용해왔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3시43분.
하루 전부터 코스모스축제가 시작된 경전선 북천역으로 이어진
도로변의 코스모스는 꽃이 핀것보다 이제 막 꽃봉오리만 맺힌 것이 훨씬 많다.
만발한 코스모스의 화려함을 기대하고 축제장을 찾은 이들로서는 실망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세상만사가 모두 뜻대로 되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끼는 현장이다.

오후 4시39분.
귀가길에 경전선 북천역에서 잠시 머문다.
경부선 삼랑진역과 호남선 광주송정역 사이를 잇는 총 길이 300.6km의 경전선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다해서 그 이름을 얻은 철도이다.
지난 1968년 역사가 세워진 북천역. 지금은 무궁화호만 정차하는 역이지만
간판에는 "북천 코스모스역"이라는 이름도 얻고
축제기간중에는 임시열차까지 운행될 정도의 명성을 얻고 있다.

오후 4시43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코스모스를 얘기하면 가장 먼저
시골의 작은 기차역, 그리고 철길을 연상하게 된다.
아마도 철로변의 황량한 공터에서까지 잘 자라는
코스모스의 생명력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코스모스 피어나는 철길에서 한 장의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며
행복에 겨워하는 웃는 얼굴들을 보며 나 또한 주말 하루 일정을 행복하게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