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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단풍이 유난히 붉은 호남의 소금강 강천산

2010년 11월7일 일요일 오전 11시52분
지난해 1월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찾았던
호남의 소금강 강천산으로 단풍산행을 떠난 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듯 꽉 막힌 도로에서 차를 내려
걷기 시작한지 20여분이 경과했지만 아직도
강천산군립공원입구까지는 2km정도가 남았다.

오전 11시54분
20분 이상 걸어 지루해질 때 쯤
다행스럽게도 좌측으로 강천저수지를 끼고 걷게된다.
차량과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도로쪽을 외면한채
거울같은 수면에 비친 건너편 언덕의 숲을 바라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낮 12시8분
강천산도립공원 입구 삼거리에 도착했다.
입구 앞 도로는 양쪽 모두 차량들이 뒤엉켜 꼼짝을 못할 정도이다.
지난 1981년 초 우리나라 최초로 군립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곳 강천산군립공원은 수많은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이 부러워할 정도인
연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진입로 양측의 단풍나무들은
가을의 절정을 보여준다.
너무나 붉은 기운에 눈이 어지러워질 정도이다.

낮 12시32분
지난해 1월 이곳으로 눈산행을 왔을 때
차량을 멈춘 주차장까지 꼬박 1시간이 걸려 걸어왔을 정도이니
오늘의 인파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공원 입구부터 이어지는 단풍나무 숲은
1시간 동안 걸어온 발품을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이곳 강천산에 단풍철이면 이토록 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유는
이곳 강천산 계곡은 자갈밭으로 침수가 빠르고
개종되지 않은 순수한 토종 단풍나무로 잎이 작고 색갈이 고우며
서리가 내려도 지지 않는 일명 애기단풍이 식재되어 있어
단풍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낮 12시42분
이곳 강천산의 몇몇 명물 중 하나인 병풍폭포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폭포는 자연이 아닌 “인공폭포”이다.
아래는 폭포 앞 안내판에 쓰여진 글 귀이다.
“이 폭포는 병풍바위를 비단처럼 휘감고 있는 폭포로 높이 40m, 물폭15m, 낙수량이
분당 5톤이며, 작은 폭포는 높이 30m, 물 폭 5m로 전설에 의하면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1월11일 오전 11시5분에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곤두박질칠 정도의 강추위가 몰아쳤던 그날
병풍바위에 얼어붙은 각양각색의 고드름이 장관을 이룬 모습이다.

낮 12시49분
병풍폭포를 떠나 이곳 강천산 정상인 해발 583m 왕자봉을 오르는 산행 들머리와
삼인대계곡을 따라 강천사로 이어지는 길이 나누이는
삼거리 부근 금강교 아래를 지난다.
붉은 단풍잎이 떨어져 쌓인 땅 위에 편하게 누워보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잠시 해 본다.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1월11일 낮 12시53분
왕자봉 정상석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수많은 인파 때문에
왕자봉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포기하고 강천사쪽으로
방향을 돌리며 그 당시 발목까지 빠지는 눈 속을 걸어
왕자봉에 올랐던 행복했던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이다.

낮 12시53분
강천사로 향하는 숲길은 붉은 단풍나무가 하늘을 뒤덮은 가운데
계곡가 공터마다 휴일 하루를 가족들과 또는 친한 친구들과 보내며
행복을 나누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여유로움이 있어 좋다.

누군가는 산행을 계획하고 왔다가 정상을 오르는 산행을 포기하고
이렇게 숲길을 따라 걷는 나를 이해 못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수년 전부터 이어지는 주말 산행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절대 무리수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 여유가 있고 몸 상태가 좋을 때는
해발 1,400m가 넘는 소백산을 7시간 이상 산행을 하기도 하고
또 칼날같은 암릉으로 이어진 험한 산을 8시간씩 산행을 한 경우도 있지만
오늘처럼 인파로 붐빌 때는 정상 산행을 포기하고
이렇게 여유롭게 걷는 즐거움도 누릴 필요가 있음이다.





오후 1시7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단풍나무 터널을 따라 걷는 길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가을철 갈수기에도 이처럼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는 이유를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조차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잠시 후 들리게 될 구장군폭포 위
해발505m 제2형제봉 아래 해발 300m 정도 높이에 만들어진
강천제2저수지 때문이다.
한국농어촌공사가 인근 팔덕과 금과지역의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지난 1984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준공한 총 저수량 30만2천톤의 저수지이다.

간혹 하늘을 가린 단풍나무 숲이 끊어지는 부분에서
머리 위로 눈을 돌리면 이런 아름다운 산세의 풍광이 나를 매료시킨다.
강천산을 예전에는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 불렸다는 이곳 강천산.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답고 시원한 계곡, 계절마다 산의 경관이 변하고
그 경관이 한결같이 수려하여 호남의 금강 강천산이라 부른다.
마치 쪽빛을 연상시킬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이 물 속에는
송어가 많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 1시18분
강천문이라 이름 지어진 강천사 일주문을 지난다.
사찰의 제1관문이 일주문이니 이제 강천사 경내로 들어서는 것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있다해서 일주문이라 부르지만
여기서 한 줄이라 함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사찰 불전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오후 1시28분
강천사 경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인 이곳 강천사는
887년(신라 진성여왕 원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동여지승람에 의하면 강천사의 원명은
복천사(福川寺) 또는 복천사(福泉寺)라고 하나
선조 때 학자 구봉 宋翼弼이 강천사에 유숙하며
숙강천사(宿剛泉寺)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으니 이미 선조 때에도
강천사라고 일부에서는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7년에 관음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는 이곳 강천사[剛泉寺]의 대웅전은 비교적 작고 아담하다.
그러나 전면,측면 각 3칸인 작은 건물이 팔작지붕이다보니
윗부분이 너무 큰듯하다.
만약 내가 짓는다면 좀 더 소박한 형태인 맞배지붕으로 하고 싶다.

강천사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저곳은 삼인대로 정면 1칸의 비각이다.
이 비각 속에는 전북유형문화재 제27호인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三印臺] 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744년(영조 20)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대학자인 이재 (李縡:1680∼1746)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사진의 節義塔(절의탑)은 지난 2003년 '순창삼인선양문화회'에서
순창 300개 마을의 돌 2개씩을 모아 그들을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중종반정을 주도하고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愼守勤) 일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오후 1시37분
이곳 강천산군립공원 최고의 명물인 일명 '구름다리'인 현수교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중간쯤부터 길게 늘어선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오후 1시59분
2~3분이면 오를 곳을 수많은 인파로 인해 20분이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현수교 입구 전망대에서 나래를 내려다 본다.
50m 아래 옛날 숫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윗용소 부근의
경치가 일품이다.

50m높이에 만들어진 길이 75m의 현수교를 건너 맞은편 해발 425m인 신선봉과
그 앞의 전망대로 오르는 인파가 마치 뱀꼬리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한 달 전인 10월 중순 이곳보다 더 높은 해발 800m위치에 놓인
90m 길이의 봉화 청량산 하늘다리도 건너는 등 수많은 현수교를 건너봤지만
어쨌든 이런 다리는 건널 때마다 스릴을 느낀다.

맞은편 신선봉 위의 전망대 부근의 활엽수들도
붉은색으로 물들어 햇빛에 빛난다.

요즈음 대부분의 산에 만들어진 정자는 팔각정이 아닌 육각정이지만
이곳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팔각정으로 불러도 될 8각 형태로 되어 있다.
앞서 오른 이들이 전망대에서 조망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저들이 부러워진다.

이곳 구름다리는 두 사람이 스치고 지날 정도로 폭이 좁아
오늘처럼 인파가 붐비는 날은 안전을 위해
가급적 교대로 일방통행을 시킨다.
잠깐 기회를 만들어 사람이 거의 없는 모습의 사진을 한장 찍는다.
지난 1908년에 만든 다리로 알려져 있으나
그 후 대대적인 보수가 한 두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1월11일 오후 1시42분
바닥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은 미끄러운철판 위를 조심스레 걷는
산행객들의 모습이다.
이 현수교 하나만 놓고 보면 겨울 눈산행시의 경치가 더 좋아 보인다.

오후 2시14분
현수교 바로 아래에서 붉은 단풍잎 사이로
50m위의 구름다리를 바라보는 경치 또한 일품이다.

구름다리 아래의 윗용소를 뒤로하고
구장군폭포가 있는 남서쪽을 향해 걸음을 이어간다.
두어시간 전보다 인파가 더욱 늘어난듯도 싶다.

이곳 주차장에서 구장군폭포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삼인대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수없이 많다.
광덕교,신선교,금강교,송음교,극락교 등등..
그리고 그 다리 아래로는 징검다리를 만들어 행락객들이
자의로 선택해 지날 수 있게 배려해 놓았다.

오후 2시32분
구장군폭포로 오르는 언덕 철계단에 발을 들이자
좌우로 늘어선 단풍나무 사이로 작은 물보라가 얼굴을 때린다.
수직 절벽을 흘러 내리는 폭포의 물줄기가 포말을 일으키며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휘날린다.
그러나, 뺨을 스치는 물방울이 싫지가 않다.

방탕했던 청년이 개과천선하여 어머니를 위한 산삼을 구하러 떠났다가
때마침 용소에서 목욕하던 선녀와 사랑에 빠진 후
못된 호랑이의 방해로 하늘로 오르지 못하지만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바위가 된 전설이 서린 곳
그곳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물보라를 만든다.
보기만해도 시원하다.

이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 부르게 되었으니
마한시대 아홉 명의 장수가 폭포의 천년사랑 거북바위를 기리며
도원결의하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쟁취하였다고 전해지면서
폭포 이름을 구장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구장군폭포 앞에서는 대부분의 행락객들이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나 또한 구장군폭포 앞에 마련된 정자인
산수정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서울은 물론 부산,울산,포항,목포,광주 등등
전국의 행락객들이 총집결한 곳이 오늘의
강천산군립공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국에서 모여든 행락객들이
휴일 하루를 즐긴다.

오후 2시51분
구장군폭포에서 휴식을 취한 후
주차장을 향해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주위의 단풍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토종 애기단풍이 많다는 소문대로
아직 녹색 잎을 그대로 간직한 단풍잎들도
곧잘 눈에 띈다.
아마도 이잘 말까지는 단풍 행락객들이
끊이지 않을듯하다.

오후 2시59분
40여분 전 지나왔던 구름다리 아래를 지난다.
신선봉 전망대인 팔각정으로 향하는 인파의 숫자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듯하다.
안전사고 없이 오늘 하루를 마감하기를 기원한다.

오후 3시8분
강천사와 삼인대 사이 길을 지난다.
멀리 눈 앞에 강천사 일주문인 강천문이 보이는 곳.
이 부근의 단풍나무 잎들이 가장 강렬한 붉은 빛을 띈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붉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색상이다.

오후 3시29분
주차장이 가까워지면서 귀가길에 나선 행락객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느낌이다.
비록 단풍구경인지 사람 구경인지 모를 인파에 뒤섞인 하루였지만,
서점 숫자의 10배가 훨씬 넘는 4만여 노래방이 주택가까지 파고들 정도로
퇴폐,환락에 물든듯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자연과 더불어 휴일을 보내는 인파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고
일말의 희망을 엿보며 행복했던 휴일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