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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탄진 장날의 겨울 모습(1)


오래 전부터 습관이 된 아침 5시 반 기상. 일요일도 예외는 없네요.

지난 주에는 뿌리공원을 다녀왔는데, 이번 주는 어디를 다녀올까? 하는 궁리를 하는 중 오전 시간이 거의 지나버렸더군요.

3,8 장인 신탄진 장터를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휴일만은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키로 스스로와 약속한지라 좌석버스요금 3천원을 잔돈으로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옛날 학교 다닐 때보다 버스 타기가 좋아진 건 이처럼 버스 도착 시간을 정류장에 설치된 단말기로 실시간 정보가 제공된다는 점이겠지요. 한 가지 아쉬운건 승용차로 20~30분이면 도착할 곳을 뱅글뱅글 도는 버스 노선 때문에 꼭 1시간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이외 같은 굴곡노선은 꼭 시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꼬박 1시간이 걸려 도착한 신탄진역 앞 모습. 이곳에서부터 신탄진 5일장이 펼쳐집니다.

신탄진이란 지명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문평동(현재 3공단)지역에 빈번한 홍수로 인하여 갑천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새로 형성된 여울목의 나루터라 하여 새여울 나루의 한자 표기인 新灘津(신탄진)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新(새로울신) 灘(여울탄) 津(나루진)

신탄을 우리 말로 표현하면 "새여울"이며, 새여울이 줄어 "새일" 또는 "시알"이라는 말이 생겼으므로 새일시알은 신탄의 순수한 우리말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연유로 해서 신탄진에는 "새일"이라는 상호가 많습니다. 새일유치원, 새일초등학교, 새일고등학교, 새일서적 등등



신탄진역을 지나 기차길 밑의 굴다리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장터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전에는 문평동이 신탄진 일대의 중심지로 문평동에서 5일 장이 섰었다는군요. 그러나 1925년의 큰 장마로 인해 온 마을이 떠내려간 후 5일장은 신탄진역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3·8일장으로 변하였고 취락도 신탄진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신탄진읍이 대전직할시로 편입되면서 신탄진이라는 지명은 없어지고 신탄진 역 주변이 석봉리에서 석봉동이 되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탄진이라하면 알아도 대덕구 석봉동이라하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석봉동의 인구가 많아지자 분동을 하게되었는데 석봉 1,2동이라 하지 않고 철길을 경계로 신탄진 시장쪽(서쪽)을 석봉동이라 하고 신탄진 역쪽(동쪽)을 신탄진동이라 이름하게 되었다는군요.


한낮인데도 영하에 가까운 추운 날씨 때문인지 곱은 손을 연신 비비며 팔려고 내 놓은 몇가지 잡곡 함지를 만지작거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유난히 춥게 느껴집니다. 그나마 몸에 해롭다는 담배가 할머니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분량의 무우, 배추 등 야채를 내 놓고 팔고 있지만 추운 날씨에 대비해

땔감을 충분히 준비해 온 이 할아버지는 시린 손을 녹이려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인이었습니다.


가정부업,기름집, 그리고 양행이라는 간판이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게 합니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양행(洋行)이라는 상호명이지만 제가 젊은 시절에는 서울시내 중심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간판이었었지요.

양행(洋行)이란 지난 18세기 후반 중국 청나라 때 광저우[廣州]에서 서양인과 무역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상인조합에서 유래된 말이지요.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고종 20년(1883)에 독일 마이어 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무역 상사 세창양행 [世昌洋行]이 역사에도 남아있습니다.

'유일한'박사가 1926년 12월 10일

의약품 수출입 및 판매업을 위해 설립한 유한양행(柳韓洋行)은 아직도 국민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요.


돼지 족발은 이처럼 수북하게 쌓아 넣고 즉석에서 썰어 파는게 더 맛이 있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음식 자체가 서민적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겠지요.


온갖 옷가지를 뒤섞어 놓고 균일가로 파는 장면. 요즘 흔히 구경하기 힘든 장면이지요.

직장생활 초창기 서울 시청 근처에 사무실이 있을 때 울적하면 자주 들리던 남대문 시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정겨운 모습이었지요.

어릴 적 동네 골목에 뻥튀기 장수가 나타나면 코흘리개 아이들이 때묻은 손에 저마다 동전을 한닢 씩 들고, 대부분 흰 수염이 듬성듬성난 할아버지들인 뻥튀기 장수의 손놀림을 군침을 삼키며 기다리던 고소한 뻥튀기도 이제는 혼자서 자동으로 뻥튀기를 만들어냅니다.


뻥튀기 기계를 자동으로 설정한 채 국화빵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 카메라를 들이대자 마침 가족들과 통화를 하며 나 지금 카메라 발 받는다!하시던 아주머니. 이 사진은 즉석에서 mp-300으로 인화해 드리고, 사진 포스팅 허가도 받았습니다.

점심 대신 사먹은 따끈한 국화빵, 2천원어치지만 저에게는 황제의 성찬 이상의 맛있는 점심 요기였습니다.


8만대장경을 정교한 목판본으로 만들어 인쇄를 하고, 또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우리 조상들의 손재주를 이어받은 도장 새기는 장인을 보기 위해 장터를 뒤졌지만 끝내 외는 돋보기를 한쪽 눈에 붙이고 깨알 같은 글씨로 도장을 새기는 장인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5일장 한쪽 구석의 좌판 도장가게도 컴퓨터를 이용해 기계로 도장을 새기는 모습은 왠지 떨떠름한 기분을 떷맃 수가 없더군요.

경상도나 전라도 해안지방에서는 겨울철 최고의 인기 회감인 개불이 음식 맛에는 후진적인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멸시 받는듯합니다.

개불이라는 이름은 생긴 모양이 개의 불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으며, 중국에서는 하이장(海腸)이라고 부르지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르는 겨울철이 제철로서, 여름철에 바다 밑바닥 1m 아래에 틀어박혀 있다가 수온이 차가워지는 한겨울에 위로 올라오면 본격적인 개불잡이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글리신과 알라닌 등의 단맛을 내는 물질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달짝지근한 맛이 나며, 마디가 없이 하나의 원통 모양으로 된 몸 특유의 조직 때문에 씹히는 맛이 독특한 고급 횟감이지요.

뜨내기 약장수처럼 벌인 좌판도 모자라 얼핏 스님 복장으로 지나는 사람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이 분의 정체는 모르겠으되, 제 눈살을 찌푸리게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추운 날씨에 장갑도 끼지 않았지만 엄마와 함께 하는 장터 나들이가 너무 즐거운 이 아이.

오늘 처음 본 갖가지 사물을 통해 많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생각하는 힘을 얻었겠지요.


워낙 추운 날씨인지라 싱싱한 야채,나물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한 평소보다 장터를 찾은 인파도 적은 형편이지만,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데는 오뎅 한 두 점과 뜨거운 오뎅 국물 이상 좋은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가족들을 위해 따뜻한 겨울 옷을 마련코자 하는 알뜰 주부들의 바쁜 손 놀림에 옷 가게들은 그나마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