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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논과 암수바위를 거쳐 설흘산으로



2009년 2월14일 토요일 낮 12시 3분.
다랭이논으로 명성이 자자한 가천 마을과 설흘산 산행을 위해
가천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서쪽 고개길에서부터 걸음을 내딛는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을 한 남해섬의 회음부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가천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해오는 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라 불리어 왔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 가천(加川)이라고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멀리 해발 481m인 설흘산이 눈에 들어 온다.



남해 사람들의 근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일명 삿갓논,

삿갓배미라고도 불리는 다랭이 논이 층층이 계단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논을 갈다가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안에 논이 하나더 있더라는데서 유래된 삿갓논은
짜투리 땅도 소중히 활용한 남해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을 대변하고 있다. 논에 심어진 파랗게 보이는 것은 마늘이다.



다랭이논과 더불어 이곳 가천마을의 또 다른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된 암수바위의 모습이다.
높이 5.9m의 수바위와 4.9m의 암바위로 이뤄진 암수바위는 발기한 남자의 성기와 애기를 밴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23일에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푸짐한 제를 올리고 있다.
자녀가 없는 사람들은 자녀를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다.



전해 오는 얘기로는 영조 27년(1751년) 이 고을의 조광진 현감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를 소와 말들이 지나다녀 견디기 어려우니 나를 파내어 일으켜 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현감은 꿈에 노인이 지적한 가천의 현장에서 현재의 암수바위를 파내어 세워놓고 논 다섯마지기를 제수답으로 내주었다.
그래서 매년 암수바위를 발견한 음력 10월23일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1920년에는 욕지도의 한 어선이 풍랑으로 가천 앞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는데,
암수바위의 화신인 미륵노인이 나타나 구해준 뒤로는 '미륵바위' 라는 이름이 또 붙게 되었고,
구출된 그 어부들이 평생을 암수바위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한시대에 남쪽 변한(弁韓)의 12개 부족 국가중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노국(樂奴國)에 속하였다고 추측되며
이후 가야연합시대에는 6가야 중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현 진주 관할인 고령(古寧)가야에 속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처음 사적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신문왕 7년(687)인 남해.

이런 남해군은 고려 중엽부터 조선 중엽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왜구들의 끈질긴 침공과 약탈을 받았지만,
스스로의 끈질긴 항쟁으로 땅을 지켰다.
그러다보니 이태리의 시칠리섬이나 프랑스의 콜시카섬 같은 섬 사람들만의 단결력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근면과 단결 없이 지금 보이는 이런 다랭이논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전국의 농어촌 마을에서 어김없이 눈에 띄는 폐교. 이곳 남해 가천마을에도 예외는 없다.

1964년에 13만 7천9백14명으로 인구 수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이곳 남해군도 지난 2008년 10월말에는
50,966명으로 인구 수에서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북쪽에 아름다운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이미 동백꽃이 빨갛게 꽃망울을 터뜨린 이 좋은 땅이
늦겨울의 스산한 바닷바람만 몰아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효과적인 활용방안을 모색해야할 것 같다.



오후 2시 13분.
가천마을 구경을 끝내고 설흘산 정상의 봉수대를 향해 숨가쁘게 산을 오르던 중 내려다 본 북쪽 마을의 모습이다.
불과 20여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 이곳도 거의 야산 정상부까지 다랭이논이 형성되어 있다.

남해는 임야면적이 68%로 우리나라 섬 중 산의 비율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농지는 23%에 불과하다.
농지는 8,091ha, 농가 한 가구당 경지면적은 0.65ha 에 불과하다. 자연을 이겨 내는 인간의 의지가 엿보인다.



지난번 이곳 남해군의 금산을 오를 때도 느낀 점이지만 섬 지방의 산들은 이처럼 험준한 바위가 주류를 이룬다.
내 경험으로는 해발 1600m정도인 태백산,덕유산 등을 오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해발 400~500m정도의 바위산이다.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며 서쪽을 향해 급히 날아가기에 산행 중 스치는 분들에게 물으니
서쪽 응봉산쪽의 바위 능선에서 어떤 분이 실족을 해서 크게 다친 모양이다. 항상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겠다.



오후 2시 24분.
멀리 서쪽 응봉산 쪽에서 멈춘 채 들것을 내리던 헬기가 내 머리 위를 지난다.
아마 응급환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 같다.

건강을 위해 산행에 나선 그 분이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빌어 본다.



오후 2시 40분.
해발 481m인 설흘산 정상에서 내랴다 본 동쪽 바다의 모습이다.
맑은 날씨임에도 옅은 연무로 인해 시계가 좋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섬은 노(櫓)처럼 생겨서 노도(상주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은 섬이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이 조선조 숙종 때귀양살이를 한 섬이 바로 이곳이다.



설흘산 정상의 봉수대 위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무척 늠름하고 상쾌해 보인다.
잠시 후 나도 똑같은 위치에 올라보니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방의 바다를 내려다 보는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봉수대가 있는 설흘산 정상을 떠나 하산길에 오른다.

봉수대의 둘레는 25m, 높이 6m, 폭 7m이다
이 봉수대는 동쪽에 위치한 남해 금산 봉수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혹은 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소흘산(所訖山) 봉수’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지금은 설흘산(雪屹山)으로 불려지고 있다.



오후 3시 4분.
하산길 바위 능선에서 내려다 본 가천마을이 무척 평화롭게 보인다.
주말 오후이어서인지 주차장에 관광버스를 비롯한 차량들도 꽤 많아졌다.

근면한 농민들은 좁은 경지에서도 높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 사진에서처럼 층층이 석축을 쌓아 만든 다랭이논에서
남해의 주요 생산물인 마늘과 쌀을 이모작하는 방법으로 토지 이용률을 높여 왔다.
주요 농산물은 마늘, 쌀, 고구마 등인데 남해는 마늘의 주산지로 전국 생산량의 7%를 차지하고 있다.



오후 4시58분.
귀가길에 잠깐 머문 삼천포항은 겨울철이어서인지 무척이나 한산하다.
봄,가을에 마치 시장바닥을 연상시키듯 관광객으로 붐비던 모습과 너무 대조적으로 한산하다.

지난 2003년 4월 개통된 남해군 창선면과 사천시 대방동을 잇는 3.4km의 창선·삼천포대교를 바라보며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여유로와 보인다.
창선·삼천포대교는 늑도와 초양섬 모개섬 등 3개의 섬을 징검다리로 이용하여 5개의 다리로 연결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의 하나이다.



오후 5시 31분.
바닷가에서 일몰을 보는 것으로 주말 하루를 마감코자 염원했으나 짙은 구름으로 인해 일몰을 볼 수는 없었다.

그나마 서편 산위의 햇살이 구름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아쉬워 하는 내 마음을 갈매기가 달래 주는듯하다.
주말 하루를 이렇게 평온하게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