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매화꽃 만발한 쫓비산 아래 섬진강변



2009년 3월14일 토요일 오전 10시 51분.
경상남도 하동에서 전라남도 광양을 가로 지르는 섬진강 다리 한 가운데서 바라보는 강물은 쪽빛으로 빛난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부지런한 갈매기들도 아침 식사에 분주하다.

올해로 13회 째를 맞는 매화축제장을 향해 아침 기온이 영하4도에 육박할 정도로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대전을 떠난 시간이 오전 7시 반경. 하동 송림이 눈 앞에 보이는 섬진강변에 도달하니 10시가 채 못된 시각.
30분간의 거북이 걸음을 참다 못해 차에서 내려 도보 행군을 강행한지 30여분.
살을 에이는 강바람이 몰아치긴 하지만 상쾌한 기분만은 날아갈듯하다.



오전 11시 33분.
섬진강 다리를 건너 매화축제가 열리는 광양군 다압면 섬진마을(매화마을)을 향해 40여분을 걷는동안
도로 양쪽은 온통 매화꽃으로 덮여있다.
지난해 3월16일 방문한 후 1년만에 다시 찾은 이곳. 매화나무의 개체 수부터 작년보다 훨씬 불어난듯 하다.



낮 12시 12분.
쫓비산 아래 섬진강변의 섬진마을에 도착하여 산 아래 자리 잡은 청매실농원을 향해 올라가며 내려다 본
섬진마을은 온통 매화꽃으로 뒤덮여 있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광양군 다압면 섬진마을이지만 요즘은 매화마을이라는 이름이 일반에게 더 친숙해진듯하다.



파란하늘의 흰 구름과 섬진강의 파란 물빛을 더욱 돋보이게하는 희 매화꽃의 어울림이 무척이나 조화롭게 느껴진다.
쫓비산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인
쫓비산에 올라 바라 본 섬진강의 맑고 고운 물 색깔이 쪽빛(남색)을 띠고 있어서 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마을 위쪽에 자리한 청매실농원의 2500여 개에 달하는 장독대가 이채롭다.
이곳 매화마을에서도 가장 큰 매화 재배지이자 운치 좋은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청매실농원은 고(故) 김오천 선생이 1931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밤나무와 매화나무 묘목을 가지고 들어와
산자락 45만 평에 이르는 임야에 처음 심었고, 그의 며느리 홍쌍리여사가 대를 이어 매화농사를 짓고 있다.
홍쌍리여사는 매화나무 재배와 매실 식품 상용화에도 힘을 기울여 섬진마을 일원이 오늘날 매화마을로 정착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설중매(雪中梅)라는 말로 우리 귀에 친숙한 매화.
겨울이 다가기 전 아직 잔설이 난분분한 시절에 피기 시작하는 매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꽃이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국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
이제는 우리에게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화와 벚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물론 시기적으로 매화 꽃이 지기 시작하면서 벚꽃이 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쉽게 구분하는 방법 몇가지는
우선 매화는 꽃잎 가장자리가 둥글고, 벚꽃은 꽃잎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을 이룬다.
개화 시기를 보면 매화는 2~3월, 벚꽃은 3~4월이다.



벚꽃은 한곳에서 대여섯개의 꽃자루가 길게 나와 꽃을 피운다.
그러나 매화꽃은 사진에서 보듯이 가지에 바로 붙어서 하나 또는 두 송이 정도의 꽃을 피울 뿐이다.
따라서 바람에 하늘거리는건 벚꽃이지 매화가 아니다.
또한 향기가 약한 벚꽃에 비해 매화는 향기가 진하게 나는 특징이 있다.



정유재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의 모가지를 나꿔 채 남강 물에 익사 시키며 자신의 생명도 초개같이 버렸던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의 '수분재( 수분령이라고도함)'에서 발원하여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하동포구를 거쳐 광양만으로 흐르는 쪽빛 섬진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이곳 매화마을을 찾은이들의
가슴을 더욱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도 남는다.



꽃말이 "고결한 마음, 인내"인 매화나무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중국 산동 지방에 '용래'라는 청년의 약혼녀가 약혼식 3일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약혼녀 무덤에서 울던 용래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나무가 한 그루 돋아난다.
용래는 그 나무를 집에 옯겨 심고 약혼녀의 넋으로 여긴 그 나무를 바라보다 일생을 마친다.



그리고 용래가 늙어 죽어서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그 나무를 떠나지 않았다.
후세에 사람들은 용래의 약혼녀 무덤에서 핀 나무를 '매화나무'라 하였고,
그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곁에 가까이 있던 새를 '휘파람새'라 불렀다.



수많은 인파와 차량의 홍수로 인해 휴일 나들이에 대한 짜증을 잠시나마 느꼈던 상춘객들도
한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이른 봄철 꽃의 향연을 벌이는 매화 향기에 취해 짜증을 모두 던져 버린다.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고 난초, 국화, 대나무와 짝을 이루어 사군자라 해서
귀한 꽃으로 대접 받는 매화에 둘러 싸여 지낸 이곳에서의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고결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진 매화에는 퇴계 이황 선생에 얽힌 얘기도 전해 온다.
퇴계 선생이 단양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를 몹시 사모하던 한 기생이 선생께 사랑의 정표로 숫한 선물을 건넸으나
모두 물리치면서도 매화나무 한 가지만은 선물로 받아 동헌 뜰에 심고 그를 즐기셨다 한다.

그리고, 도산으로 돌아 가실 때 그 매화나무를 도산서원으로 옯겨 심었는데, 오늘날 도산서원의 매화나무는
그 기생이 선물한 매화나무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오후 4시 40분.
매화마을을 떠나 돌아가는 길.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를 내쫓았다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강이 되었다는 섬진강변을 따라 구례쪽으로 차량은 이동한다.
섬진강 건너편 하동쪽의 화개장터 주변에도 차량의 홍수를 이룬다.
우리나라 강물중 가장 깨끗하다는 쪽빛 섬진강 물과 멀리 보이는 지리산 자락의 흰 눈을 바라 보며 주말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