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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와룡산(臥龍山) ; 누운 용을 닮은 호국((護國)정신이 깃든 산



2009년 4월19일 일요일 오전 8시 56분
휴일 아침 6시 대전을 출발해 경남사천시 남양동사무소 부근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8시40분경.

와룡산을 향해 걸음을 옮긴지 10여분. 지난 가을 이후 지속된 가뭄으로
바닥이 보일듯한 남양저수지 (일명 임내저수지)를 지난다.
아침 기온은 10도 정도로 선선했지만 해가 뜨면서 때 이른 더위가 시작된다.



오전 9시23분
산행을 시작한지 30여분이 지나 '백팔탑'이라는 표지석이 길가에 세워져 있고
우측으로 수많은 돌탑들로 정원을 꾸민 볼거리 부근을 지난다.
아마 이 돌탑의 숫자가 108개인듯하다.

이제부터는 발걸음을 더디게만 하던 지루한 콘크리트 포장의 임도를 벗어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등산화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산길을
오를 시간이다.



오전 10시3분.

비교적 가파른 산길을 땀을 쏟으며 부지런히 올라 해발 고도 500정도 지점인

도암재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앞에 보이는 암봉은 경남 산악인들이 암벽 등반의 메카로 꼽는 해발 625m의 상사바위이다.

부모의 반대에 절망한 젊은 남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하는 상사바위는 천왕봉

북동사면을 이루는 절벽이지만, 그 이름이 워낙 널리 알려지다 보니 천왕봉보다는 상사바위로 불리는 것이다.

웅장하게 보이는 암봉의 모습이 마치 북한산 인수봉과 흡사하다.



오전 10시25분.

작은 돌로 만들어진 돌탑이 산재한 너덜이재를 지난다.

너덜이란 산사태로 인해 작은 바위가 쌓여진 구간을 말함인데,

이런 너덜은 와룡산 곳곳에서 만나게된다.

너덜지대를 통과하는 산행객들은 발이 바위사이에 빠지는 것에 세심한 신경을 쓴다.



오전 10시59분.

도암재와 너덜지대를 지나 새섬바위로 향하는 길은 이처럼 가파른 암릉을 자주 만나게된다.

남북으로 뻗은 능선이 용의 등줄기 비늘을 연상시킨다.

위험한 구간이긴하나 안전을 위한 철책을 의지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위험지대를 통과한 후에는 누구나 약간의 희열을 느끼는 점 또한 바위산 산행시의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오전 11시15분.

가파른 너덜지대와 위험한 암릉을 지난 비교적 평탄한 해발 700m고지에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이 잔등을 식혀 준다.

멀리 남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눈에 들어오고, 바다 건너 남해군 창선면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전진 방향인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이곳 와룡산의 실질적인 최정상인 새섬바위가 손에 잡힐듯 하다.



와룡산의 실질적 최정상인 해발 801.4m의 새섬바위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이곳 와룡산의 최정상은 민재봉으로 높이는 798.6m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최근 사천시에서 확인결과 그동안 제2봉으로 알려졌던 새섬바위(797m)가 사실은 재봉보다 2.8m가 높은 801.4m였다 한다.

국토지리정보원은 이미 예전부터 새섬바위와 만재봉의 해발고도를 이같이 측정해 사용해 오고 있었다 한다.

사천시가 2007년 발행한 행정지도에도 새섬바위를 801.4m라고 표시하고 있다.

현재 사천시는 이에 대한 수정 작업을 진행중이다.

아마 올 6월 이전에는 와룡산 높이가 801.4m로 공식 확인될듯도 하다.



오전 11시41분.

민재봉으로 향하면서 돌아다본 새섬바위의 모습이 한폭의 동양화에 담긴듯

신비스럽게 내 마음에 와 닿는다.

한편으로는 철 늦은 진달래의 분홍빛 때문인지 슬프게도 느껴진다.

저 새섬바위는 바위는 오래 전 옛날 대 홍수로 인해 삼천포 일대가 물에 잠겼을 때

유독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을 정도의 터만 남아 있었다 하여

지금의 이름인 새섬바위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져 온다.



낮 12시3분.

와룡산의 명목상 최정상인 민재봉 바로 아래에서 남동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사천시내 시가지와 멀리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시설용량 324만kw. 국내 화력발전소 중 최대 단위기 용량인 56만kw급 화력발전설비 4기(1-4호기)와 50만kw급 화력발전설비 2기(5, 6호기)를 갖춘 이곳 삼천포 화력발전소는

지난 1983년 1호기 준공을 시작으로 1998년 6호기 준공을 완료한 석탄 발전소이다.

붉은색 띠를 두른 3개의 굴뚝은 완벽한 공해 방지 시설을 갖춘 굴뚝이다.

창원 ·여천 공업단지에 절격을 공급하는 중요 시설인 이곳의 행정구역은 삼천포가 아닌

"경남 고성군 하이면(下二面) 덕호리(德湖里)"이다.



정상인 민재봉(旻岾峰)에서는 힘든 산행 끝에 정상에 도착한 산행객들이

정상석 주위에서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특이한 것은 정상부가 꽤 넓다는 점이다.

넓은 정상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와룡산에 대한 전설을 하나 소개한다.

그 전설이란 와룡산은 매년 섣달 그믐이면 산이 소리를 내며 슬피 운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우리나라 산의 족보인 '산경표'에 누락되어 운다고도 하고,

골짜기 숫자가 아흔아홉골로 하나가 모자라 백계를 못 채워 운다고도 하고,

일제 강점기 때 왜놈들이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산 정상을 지금 처럼 깎아 내려서 운다고도 한다



멀리 동쪽으로도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 싸인 마을들이

마치 어머니 품속에 안긴듯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와룡산은 성문(城門)`파병산(派兵山)`퇴병산(退兵山) 등과 같은 지명에서 보이듯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거북선이 최초로 등장한 사천해전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니

수륙(水陸)에서 온몸으로 왜(倭)놈들에게 맞선 셈이다.

가야시대엔 철(鐵)의 집산지로 인도`중국`일본에서 온 무역선들이

철광석을 실어 나르던 국제무역항이기도 하다.



오후2시33분.

민재봉에서 여유 있는 점심과 휴식을 마친 후 하산을 시작한지 한 시간 남짓.

이제 산길이 끝나고 꽤 넓은 임도로 들어섰다.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숲, 그리고 작은 규모의 다랭이논이 정겹게 느껴진다.

와룡산은 전술한 것처럼 호국(護國), 국제무역의 중심 같은

좋은 이력(履歷) 만 있는 건 아니다.

와룡산은 고려시대 왕실의 추문이 얽힌 현장이기도 하다.

고려 태조의 8번째 아들 욱(郁)은 조카 경종의 부인이었던 헌정왕후와

정을 통해 아이까지 갖게 되었다.

이들의 금지된 사랑은 성종에게 발각되고 욱은 그의 아들(뒤에 현종이 됨)과 함께

와룡산 기슭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된다.

지금도 사천에서는 매년 5월 고려 현종의 유년시절과 와룡산과의 인연을 기념하는

와룡문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오후 3시11분.

산행의 종착지인 백천사 주차장에 도착해 백천사를 둘러보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휴일 오후를 맞아 관광객들로 백천사 입구는 야단법석이다.

이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은 불교용어로써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인듯하다.

'야단법석'은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로써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王舍城:현재의 비하르주 라지기르)

주위에 있는 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백천사 대웅전 앞에는 곧 다가올 4월초파일 부처님 태어나신날을 앞두고

요란한 단장에 여념이 없다.

통상 한 사찰의 주된 불전이 대웅전일진대 대웅전 뒤쪽 언덕에

대웅전을 압도할 정도의 위세로 멋대가리없이 크게만 지어놓은 건축물이 너무나 부조화스럽다.

얼핏 느끼기에는 근본없고 요망한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사이비 사찰을 보는듯하여 씁쓸하다.



모 TV프로에도 소개가 되었다 하여 이제는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듯한

이른바 우보살(牛菩薩)이라 불리는 소가 관리인의 독촉을 받고

혓바닥으로 목탁소리를 내느라 안간 힘을 쏟는다.

소가 마치 인간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인파에 시달리는 소의 눈매가 처량해 보인다.

대부분의 시간을 되새김질로 보내야 할 소가

되새김질 할 시간을 뺏긴다면 그건 불행이 아닐까?

시골 약장수에게 끌려 다니는 원숭이와 다를 바 없어 불쌍해 보인다.

부처님도 이런 건 원치 않으셨을 성 싶다.



와룡산에는 옛날의 절터가 많기로 유명하다.

구전(口傳)되는 전설에 의하면 와룡산에는 팔만구암자(八萬九菴子)가 있었다하나

오늘날은 몇몇 절터가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곳 백천사(白泉寺)의 홍보물에는 1300년전 신라문무대왕 때

의선대사(의상대사의 속세 형제)가 백천사를 처음 창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진양지(晋陽誌)등의 기록물에 의하면 "백천사는 와룡산의 서편에 있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백천사는 최근에 건축한 건물들이다.



오후 3시49분.

백천사를 나와 바닥만 드러난 백천저수지를 지나 귀가할 차량으로 향한다.

이곳 백천사 주위 계곡은 물이 좋기로 이름난 곳인데 이런 흉한 꼴을 보니 마음이 저려 온다..

조선시대 이곳 서쪽 계곡은 세심정, 무금대 등의 좋은 경치가 있고

동서계곡의 상하에 물레방아 16개소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내일부터 전국적으로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기대하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휴일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