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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800리 옛길 걷기 -1구간(2)



2009년 5월10일 오전 11시13분.

한 귀퉁이 밭에는 보라빛 자운영이 가득 피어있다.
지난해 뿌려진, 혹은 남겨진 씨앗에서 싹이 트고 겨울을 지낸 후
이듬해 꽃피어 열매 맺고 사라지는 월년초인 자운영을 논밭에 심는 것은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아름다운 식물의 뿌리 끝에 공생해 사는 뿌리혹박테리아들이
질소를 풍부하게하여 녹비역할을 한다.



이곳 상황마을은 파평(波平)윤씨 통정대부 윤천왕(尹天王)이
1592년 임진왜란때 지리산으로 피난 가던 중 등구치를 넘어 가려고 지나다가
영신암(靈神岩)이라 하는 바위 밑 굴속에 숨어 피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하며
위치가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일찍부터 부촌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니 비닐하우스에 볍씨를 심어 모판을 만들어
모내기를 준비중인 이 분도 가뭄으로 걱정이 태산이다.
비야 내려다오!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그분과 헤어졌다.



오전 11시21분.
매동마을을 출발한지 2시간 동안 이와같은 고사리 밭을 무수히 지나쳤다.
그리고, 고사리밭마다 어김없이 붙어 있는 안내판에는
함부로 밭에 들어가 고사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문구이다.

농민들이 피땀 흘려 짓는 고사리를 몰래 채취하는 몰상식한 인간들이 있어서일게다.
께름칙한 기분이다. 처라리 벼룩이 간을 빼 먹지..



모내기를 위해 물을 가둬 둔 다랭이논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내 눈에 이럴진대 직접 농사를 짓는 이 논의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할까?

일찍부터 부촌을 이루고 천석꾼이 여럿 있었다는 말이
이 광경 하나로 입증되는 것 같다.



오전 11시28분.
전라북도 남원군과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고도 620m정도의 등구재를 넘기 전 등구재쉼터에서 잠깐 한숨을 돌린다.
차 한잔을 마시며 젊은 주인부부와 잠깐 농사 얘기들을 나눴다.
휴일을 맞아 직접 손님을 맞는 이들도 자신들의 농사일을 위해
평일에는 무인점포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지리산이 다른 여타 산들과 다른 점은 이와 같은
야생동물 퇴치 시설을 갖춘 논과 밭이 많다는 점이다.

어머니산이라는 지리산이 그만큼 토질이 비옥하여
야생동물의 먹잇감이 풍부한 등
생존 여건이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전 11시42분.
해발 400m정도의 다랭이논에는 논물이 가득했으나
해발 500m를 넘어서자 논이 거의 말라 있다.
아마 조금 전 등구재쉼터에서 나누었던 젊은 농부의 가뭄에 대한 걱정은
이런 모습들을 두고 했던 것 같다.



등구재를 향하는 길은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해서는 경사가 좀 심한 편이다.
이곳 제1구간에서는 가장 높은 지점이 또한 등구재이다.
아마도 산을 자주 다니지 않는 나즐이객들에게는 조금은 힘든 구간이었던듯하다.
연세가 좀 많이 드신듯한 부부가 중간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르는 모습도 보였다.



등구재 정상 부근에서 지금 막 변태(탈바꿈)를 마친듯한 여치를
한참동안 관찰할 기회도 있었다.
여치는 매미,잠자리,사마귀,하루살이 등과 같은 불완전변태를 한다.
불완전변태란 번데기 상태를 거치지 않고
애벌레에서 바로 성충으로 변하는 변태를 말한다.

참고로 파리,모기,나비,벌 등은 번데기 과정을 거치는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들이다.



오후 12시 3분.
거북이 등을 닮았대서 거북 구(龜)를 쓰는 등구재 (登龜재)를 넘어
창원 마을로 향하는 길 숲 속에
이와 같은 "동물들의 오아시스"가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인간들이 만든 저수지인데 ,
이제는 야생동물들이 물을 마시고 목욕도 하는
또 다른 생명의 옹달샘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며 공생하는 현장이다.



오후 12시 13분.
깊은 숲이 끝나고 농로가 나타나며 눈 앞에 창원 마을을 둘러싼듯 보이는
다랭이논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창촌. 창말이라고도 부르는 창원(昌元)마을은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 마천면내의 세금으로 거둔 차나 약초, 곡식을
이 마을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오도재를 넘어서 지게로 날랐다고 한다.

산나물, 토종꿀, 옻순, 호두 가 주 산물인 창원마을에는
현재 약 23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해발 400m 정도의 높이인 이곳 창원 마을은
동구재 너머의 남원 상황마을의 경우
비닐하우스속에 모판을 만들었던데 비해
이곳 창원 마을은 노지에 모판을 만들어 두었다.

북서쪽에 등구재를 두고 동남향으로 동네가 앉은 지형적 영향 탓으로
기온이 높기 때문일게다.
등구재를 넘기 전보다 넘은 후 더위를 더욱 느끼는 것도
아마 기온이 높아진 탓인듯하다.



오후 12시36분.
창원마을을 벗어나 금계마을로 이어지는 고갯마루 고목 나무 밑에서
대부분의 산행객들이 한숨을 돌리며 쉬는 분위기이다.
그만큼 등구재를 넘는데 힘을 쏟은데다 창원 마을로 들어서며 갑자기 불어닥치는
온풍으로 인해 더 심한 더위를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잠깐 그들과 동참하여 나무 그늘에서 한숨을 돌린다.



오후 1시12분.
창원마을을 거치는 동안 비교적 넓은 도로에서 땡볕을 받아가며 땀을 흘리던터라
금계마을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처럼 숲길을 만나니 너무 행복하다.

햇빛을 막아줌은 물론 나무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숲의 바람이 너무 시원하고
시원한 바람에 곁들여 코 끝을 간지르는 풀냄새 또한 정신을 맑게 한다.



오후 1시31분.
울창한 숲길을 벗어나 임도로 나서자 눈 아래로 엄천강,
그리고 의탄교 너머의 의중마을에 펼쳐진 다랭이논의 모습이 나타난다.
넓은 농지가 거의 없는 이곳 지리산 자락의 경우
다랭이논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것 같다.
우리의 주식인 쌀의 자급자족을 위해서라도 다랭이논은 길이 보전해야할
우리의 유산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본다.



오후 1시 51분.
제1구간의 종착점인 금계마을에 도착하니
세심정(洗心停)이라는 이름의 정자와 물레방아가 나를 반긴다.
1구간 여정을 끝냈다는 만족감이 4시간 반의 피로를 잊게 해 준다.


이곳 함양에는 어디가나 물레방아 모형을 쉽게 볼 수 있으며,
함양군의 홍보문구에는 꼭 물레방아골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 이유는 조선말기 실학자이자 안의현감(1792년 부임)을 지냈던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문물을 둘러보고 온 후 조선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든곳이 바로 함양이다.

또한 물레방아의 이용은 이용후생 [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라는
현실개혁의 실학사상이 깃들어 있는 조선시대 농경문화 변혁의 시발점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