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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수유 피어나는 전남 광양,구례로 떠난 남도 여행


2011년 3월19일 토요일 오전 10시31분
매화꽃 만발한 섬진강변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쫓비산 산행을 위해 산행 들머리인
관동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하얀 매화꽃과 더불어
강렬한 색감의 홍매화가 금년 초 개통한 순천-완주 고속도로를 따라
지난해보다 30여분 이상 단축된 길을 달려온 나를 반긴다.

해발 536.5m에 불과하며 산 자체의 경관은 보잘것 없는
이곳 쫓비산을 오르는 이유는 섬진강 푸른 물과 더불어
만발한 흰 매화꽃의 멋진 어울림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약한 황사로 인한 연무 때문에 시계가 극히 불량하다.
내 경험상 쫓비산 정상은 물론 이어지는 능선에조차
섬진강 조망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산행을 포기하고 청매실농원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오전 10시51분
관동마을에서 4km 남짓 떨어진 다압면 매화마을(섬진마을)의
청매실농원에 도착해 매화향을 코 끝으로 음미한다.
지난 해 말부터 시작된 구제역 여파로 매년 이맘 때
이곳 청매실농원을 중심으로 열리는 매화축제는 취소되었지만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의 홍수는 여전하다.

그러나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의 여파로 매화꽃의 개화 정도는 20% 에 불과해 보인다.
아쉬움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든다.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3월14일 오후 1시25분에
이 부근에서 찍은 사진이다.
매화꽃의 개화 시기가 예년에 비해 2주 이상 늦어진 것을 다시 한 번 아쉬워 한다.

매화꽃의 개화 시기가 늦어진 것 뿐 아니라
약한 연무로 인해 시계가 불량하여 먼 산에 희끗희끗 피어 오르는
흰 매화꽃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음 또한 안타깝다.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3월14일 찍은 사진이다.

비록 개화 시기가 많이 늦기는 했으나
간혹 햇빛을 유난히 잘 받는 위치에 자리한 나무에는
이처럼 꽃이 만개했다.
저마다 멋진 사진을 담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그리 많지 않은 꽃을 찾아 다니며 꿀을 모으는 벌 또한 분주하다.
뒷다리에 꽃가루가 점점 크게 뭉쳐진다.

이곳 청매실농원과 섬진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로 향하는 길
왕대숲이 길 한편으로 울창하게 자라는 오솔길
그 한 편 사면의 홍매화가 요염한 색으로 상춘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전 11시43분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시원하다.
19만평 정도의 너른 농원 앞을 흘러 내리는 섬진강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다.
저 넓디넓은 농원 전체에 매화꽃이 만발했으면 좋았을 것을..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8년 3월16일 오전 11시33분
이 부근에서 찍은 사진이다.
3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낮 12시 4분
전망대에서 내려와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부근을 지난다.
이곳 청매실농원의 2500여 개에 달하는 장독대가 이채롭다.
이곳 매화마을에서도 가장 큰 매화 재배지이자 운치 좋은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청매실농원은 고(故) 김오천 선생이 1931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밤나무와 매화나무 묘목을 가지고 들어와 산자락 45만 평에 이르는 임야에 처음 심었고,
그의 며느리 홍쌍리여사가 대를 이어 매화농사를 짓고 있다.
홍쌍리여사는 매화나무 재배와 매실 식품 상용화에도 힘을 기울여
섬진마을 일원이 오늘날 매화마을로 정착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낮 12시 10분
청매실농원 입구에는 각종 봄나물과 매화 묘목을 팔고 사는 인파로 붐빈다.
수많은 인파와 차량의 홍수로 인해 휴일 나들이에 대한 짜증을 잠시나마 느꼈던 상춘객들도
한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이른 봄철 꽃의 향연을 벌이는 매화 향기에 취해 짜증을 모두 던져 버린다.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고 난초, 국화, 대나무와 짝을 이루어 사군자라 해서
귀한 꽃으로 대접 받는 매화에 둘러 싸여 지낸 이곳에서의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비록 2008년 3월16일에 부근에서 찍은 이 사진처럼
만발한 매화꽃 향기를 만끽하지는 못했겠지만...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매화향에 둘러 싸인 그림같은 집도
많은 서민들에게는 꿈 속에서 항상 그리는 모습일게다.

고결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진 매화에는 퇴계 이황 선생에 얽힌 얘기도 전해 온다.
퇴계 선생이 단양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를 몹시 사모하던 한 기생이
선생께 사랑의 정표로 숱한 선물을 건넸으나 모두 물리치면서도
매화나무 한 가지만은 선물로 받아 동헌 뜰에 심고 그를 즐기셨다 한다.
그리고, 도산으로 돌아 가실 때 그 매화나무를 도산서원으로 옯겨 심었는데,
오늘날 도산서원의 매화나무는
그 기생이 선물한 매화나무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설중매(雪中梅)라는 말로 우리 귀에 친숙한 매화.
겨울이 다가기 전 아직 잔설이 난분분한 시절에 피기 시작하는 매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꽃이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국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
이제는 우리에게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화와 벚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물론 시기적으로 매화 꽃이 지기 시작하면서 벚꽃이 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쉽게 구분하는 방법 몇가지는
우선 매화는 꽃잎 가장자리가 둥글고, 벚꽃은 꽃잎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을 이룬다.
개화 시기를 보면 매화는 2~3월, 벚꽃은 3~4월이다.

(* 이 사진은 2010년 4월10일 마산 무학산 자락에서 찍은 벚꽃 사진이다.)
벚꽃은 위 사진에서처럼 한곳에서 대여섯개의 꽃자루가 길게 나와 꽃을 피운다.
그러나 매화꽃은 가지에 바로 붙어서 하나 또는 두 송이 정도의 꽃을 피울 뿐이다.
따라서 바람에 하늘거리는건 벚꽃이지 매화가 아니다.
또한 향기가 약한 벚꽃에 비해 매화는 향기가 진하게 나는 특징이 있다.

낮 12시45분
도로변으로 길게 이어지는 섬진강변을 거닐어 본다.
정유재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의 모가지를 나꿔 채 남강 물에 익사 시키며
자신의 생명도 초개같이 버렸던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의 '수분재( 수분령이라고도함)'에서 발원하여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하동포구를 거쳐 광양만으로 흐르는 쪽빛 섬진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이곳 매화마을을 찾은이들의 가슴을 더욱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도 남는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홍매화 너머로 쫓비산 능선을 바라본다.
아직도 옅은 연무가 시야를 가린다.
쫓비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쫓비산에 올라 바라 본 섬진강의 맑고 고운 물 색깔이 쪽빛(남색)을 띠고 있어서 라고도 하고,

산 모양이 뾰족하게 생긴 것을 보고 이 지방 사투리로
"쬬삣하다(뾰족하다)" 라고 부르던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꽃말이 "고결한 마음, 인내"인 매화나무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중국 산동 지방에 '용래'라는 청년의 약혼녀가 약혼식 3일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약혼녀 무덤에서 울던 용래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나무가 한 그루 돋아난다.
용래는 그 나무를 집에 옮겨 심고 약혼녀의 넋으로 여긴 그 나무를 바라보다 일생을 마친다.

그리고 용래가 늙어 죽어서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그 나무를 떠나지 않았다.
후세에 사람들은 용래의 약혼녀 무덤에서 핀 나무를 '매화나무'라 하였고,
그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곁에 가까이 있던 새를 '휘파람새'라 불렀다.

오후 1시15분
강변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옛부터 모래가 고와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강), 사천(沙川) 등으로 불리었으나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를 내쫓았다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강이 되었다 한다.

강 중심부의 모래톱을 망원렌즈로 당겨본다.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부근이어서인지
유난히 갈매기떼가 많이 눈에 띈다.

오후 1시45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도로변을 따라 빼곡히 늘어선 음식점들을 둘러 본다.
이곳 섬진강 주변의 특산물인 벚굴을 손질하는 상인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일본인들이 벚꽃이 피는 시기에 먹는 굴이라해서 벚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이 굴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섬진강 하구 강물 속 바위에 붙어 자란다.
이날 이곳에서의 벚굴 시세는 위 사진의 한 접시 가격이 2만원이다.
굴 다섯 쪽에 2만원이라니??

그래서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손질 중인 굴 한접시 옆에 담배갑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
이 굴 한 접시는 2만5천원.
보통 이 굴 한개의 무게는 600~700g. 엄청난 크기이다.
맛 또한 일품이며 입춘 무렵부터 4월까지만 맛 볼 수 있는 진미 중 하나이다.

맛있는 벚굴을 먹으며 바라보는 섬진강의 경치는 다할나위 없다.
저 무리지어 나르는 철새떼들은 아마도 이맘 때 쯤이면 이곳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는
황어떼를 노리는 것은 아닐런지?

오후 4시
청매실농원을 떠나 섬진강을 가로지른 남도대교를 건너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덕분에 일반에 널리 알려진 화개장터에서 잠시 머문다.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인 이곳 장터는
일반 시골장터에 비해서 크기는 아주 작은 편이다.
그러나 섬진강변 교통요지에 자리한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오후 4시35분
행정구역상 명칭보다는 산수유마을로 더 잘 알려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시리에 도착해 산수유꽃을 가까이 살펴 본다.
이곳 산수유 역시 예년에 비해 늦게 꽃망을을 터뜨린다.
활짝 핀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09년 3월21일 오후 1시 16분에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다.
만개한 모습이다.

산수유 열매는 8월부터 녹색의 핵과가 형성되어
10월이면 진한 붉은색으로 익은 아름다운 산수유 열매를 볼 수 있다.
10월 중순의 상강(霜降) 이후 서리가 내린 다음에 수확하는데
육질과 씨앗을 분리하여 육질은 술과 차 및 한약의 재료로 사용한다.
씨에는 렉틴(Lectins)이 들어 있어 인체에 유해하므로 반드시 씨를 제거토록 해야 한다.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과 함께 비교적 일반에게 잘 알려진 한약 중 하나인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에 산수유를 비롯한 여섯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올해로 13회째를 맞는 산수유 축제의 공식행사는 구제역으로 인해 취소되었지만
우리나라 제일의 멋진 산수유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붐빈다.
공해에 약하지만 내한성이 강하고 이식력이 좋아
진달래나 개나리, 벚꽃보다 먼저 개화하는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 꽃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 수형과 아름다운 열매로 조경수로서의 가치가 상당히 높다.
20~30개의 작은 꽃들이 뭉쳐 퍼지며 핀다.

한국, 중국이 원산지인 산수유나무는 특히 토심이 깊고 비옥한 곳에서 잘 성장하고
햇볕을 좋아하나 음지에서도 개화 결실하며
각종 공해에는 약한 편이나 내한성이 강하고 이식력이 좋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지역인 이천시 백사면에서도 재배하지만 주로 남부의 산지에서 자생한다.
우리 나라 산수유(열매) 생산량의 60%가 구례군에서 생산되며
또한 구례 지방 생산량의 85%는 지리산 만복대 기슭에 자리잡은
이곳 산동면에서 생산된다 한다.

매년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우리 나라에서 산수유 꽃 축제를 개최하는 곳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경북 의성군 사곡면 등이 있으나
올해로 제13회 째를 맞는 이곳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 꽃 축제에 비하면
다른 지역의 경우 역사나 그 규모가 이곳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올해는 공식행사는 구제역 때문에 취소한채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 제공은
예년과 변함이 없을 뿐이다.

산수유가 이곳 구례군 산동면의 지방특산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200년 전쯤이었다고 한다.
지리산 험한 준봉에 둘러싸여 있어 논이 적고 밭이 척박하였기에
산수유 나무를 곳곳에 심어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요즈음 산수유 꽃 하나만으로 전국 각지의 행락객들을 불러모으는
이곳 위안리는 한국전쟁 전만 해도 1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다.
그러나 여순 반란사건(1948)으로 많은 주민 대다수가 목숨을 잃으면서
지금은 40여 가구만 그 땅을 지키고 있다.

참고로 이사진은 지난 2009년 3월21일 오후 1시37분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다.
비록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로 인해 산수유의 개화 시기가 늦어
이 사진에서와 같은 노란색으로 물든 장관은 접하지 못했으나
주말 하루 매화,산수유에 묻혀 봄을 느낀 행복감으로 하루를 마감하며
귀가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