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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에 펼쳐진 하동 악양 슬로시티 토지길을 걷다.



2014년 4월13일 일요일 오전 10시 45분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지리산 남쪽 끝자락 성제봉(일명:형제봉) 산행을 위해 출발했으나
전날 밤부터 이어진 봄비 때문에 계획을 바꾸어 첫발을 내디딘 곳은
경남 하동군 정서리에 위치한 악양면사무소 앞.
내리는 봄비로 인한 짙은 안개로 인해
북서쪽에 자리한 성제봉 능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쪽빛 섬진강 물빛과 드넓은 평사리 벌판을 조망할 수 있는 성제봉 산행을 위해서는
북쪽으로 1.5km 더 들어가는 노전마을에서 출발해야하건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오전 11시 6분
성제봉 산행 대신 악양 토지길을 걷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그 첫 행선지로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2km 남짓 떨어진 '조씨고가'를 향해 조금씩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걷는다.
조씨고가를 300m 남짓 남긴 지점의 봄비에 젖은 돌담길이 너무나 정겹다.




오전 11시15분
정서리 상신마을의 '조씨고가(趙氏古家)'는  180년 전 소나무를 쪄서 다듬은 목재로 
17년 걸려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동네에서는 예전부터 ‘조부잣집’으로 불리웠다.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불에 타고 현재는 본채와 아랫채만 남은 상태이다.
*봄비를 그대로 맞으며 30분 가까이 걷다보니 카메라가 오작동을 일으켜 조씨고가 사진을 얻을 수 없어
지난 해 이른 봄날 찍은 사진으로 조씨고가의 모습을 대신한다.




'조씨고가'가 자리 한 상신마을은 돌담길로도 유명한 곳이다.
대부분의 집들이 크고 작은 돌로 쌓여 있어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돌담을 살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옥의 담뿐 아니라 경사진 비탈을 따라 일궈 놓은 논밭도 대부분 돌담을 쌓아 일궈 놓은 형태이다.




오전 11시38분
상신마을을 벗어나 2km 남짓 떨어진 '취간림'으로 향하는 길은 안개 자욱한 들길이다.
아직은 조금씩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걷는 인적 없는 길.
노출된 피부인 얼굴과 반팔 차림인 팔뚝을 적시는 빗물의 촉촉한 감촉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 길이다.




유채꽃의 짙은 향내가 낮게 깔린 안개 때문에 코 끝에 오래오래 머무는 논밭길이다.
맑은 날 바람 따라 전해 오는 유채향보다 몇배는 진하게 느껴진다.




인적없는 빗길에서 이방인을 만나 놀란 때문인지 멀리 나뭇가지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우지진다.
급히 망원렌즈로 당겨 보니 이처럼 예쁘게 생겼다.
우리나라 텃새인 곤줄박이 쇠박새,동박새 등과 닮은듯 하지만
새 종류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 이름은 알지 못하겠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마치 그림책에서나 나올듯한 아늑한 시골 냄새를 풍기는
부계마을을 가로질러 발걸음은 천천히 이어진다.




오전 11시53분
부계마을을 벗어나며 작은 개천을 가로지르는 정동교를 지나며 정동마을로 접어든다.
조씨고가에서 1.7km 들길을 돌아왔으며, 이제 취간림까지 남은 거리는 약 300m 정도이다.
부계마을과 정동마을이 속한 정동리는 오래 전 청동기시대부터 집단 주거지로 형성된 곳이라 전해지며
하동군에서 가장 오랜된 마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섬등 정자(亭子) 숲을 중심으로 그 동쪽이기에 정동리라 불리게 된 곳이다.




오전 11시59분
하동군민들의 여름 피서지로 인기 있는 취간림에 들어서 먼저 충혼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 충혼탑은 해방 이후 악양면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대한청년단 기동대원들 및
국군장병들을 위해 가까운 신성리에 지난 1968년에 세운 충혼탑이 노후되자
2008년에 이곳으로 옮겨 탑을 다시 세운 곳이다.
오늘 우리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한다.




정동마을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숲인 취간림은
지난 2000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숲 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한 곳이다.
푸를 취(翠) 산골물 간(澗) 수풀 림(林). 즉, 푸른 개울물 옆의 숲 취간림(翠澗林)이다.
예전에는 고려말 녹사 한유한 선생을 기리기 위한 정자인 '모한정'을 건립 후
정자 이름을 취간정으로 바꾼 때문에 이곳 이름이 취간정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나,
정자가 없어진 후 취간림으로 불리게 된 곳이다.
현재는 지난 1993년에 새로 지은 팔경루가 길손들의 휴식을 위해 세워져 있다.




낮 12시 28분
취간림을 떠난 후 악양면을 가로질러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총 길이 10.5km 인
악양천을 가로 지르는 악양교를 건너 발길은 남으로 이어진다.
성두마을,덕계마을이 속한 신성리를 지나 이제 상신대마을을 지나며 발길은 계속 이어진다.

이곳 상신대마을에는 400여 년 전 마을을 개척한 합천 이씨 두 집안과 전주 이씨 한 집안 이렇게 세 집안이
힘을 합쳐 시작한 당산제가 이어져 왔으나 지난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가 사라진 점 아쉽기만 하다.




낮 12시35분
우리나라 대봉감의 본산격인 대축마을을 지난다.
매년 늦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우리의 입맛을 돋구는 식품 중 홍시[연시]나 곶감을 들 수 있다.
‘과실의 왕은 감이요, 감의 왕은 대봉’이라 하여 옛날부터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이름난 과일이 '대봉감'인데,
이곳 악양면 축지리가 우리나라 대봉감의 시배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 대축마을과 이웃 소축마을이 합쳐 축지리라는 행정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낮 12시38분
지난 2003년 만들어진 길이 25m 의 축지교를 따라 악양천을
동에서 서로 건너 평사리로 들어선다.
취간림에서 2.4km를 지난 지점이며 이곳에서 부터 전국적인 관광명소인
드라마 '토지' 촬영장소인 최참판댁까지의 거리는 1.8km이다.




평사리 넓은 들을 북서 방향으로 가로지른다.
좌측 논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는 일명 '부부송'이라하여 유명세를 타는 소나무이다.
평사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넓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이란 의미에서 평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경치가 좋아 '소상팔경'의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과 같다 하여 평사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소상'은 중국 호남성에 있는 아름다운 강으로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 여덟 가지를 가리켜
'소상팔경(瀟湘八景)' 이라 했으며, 그 팔경 중 하나가 '평사낙안(平沙落雁)'인데,
평사낙안이란 넓고 고운 모래밭에 기러기 한 마리가 와서 앉는 그런 아름다운 경치를 이름이다.




아직 모내기철이 조금 남은 넓은 논바닥에는 곳곳에 붉은빛을 띄는 자운영 꽃이 무수히 피어난다.
콩과 식물인 자운영은 뿌리에 뿌리혹박테리아가 붙어서 공중질소를 고정시켜
농사에 큰 도움이된다고 알려져 있으며, 남쪽 지방에서는 녹비로 재배하기도 한다.
또한 어린 순을 나물로 하며, 풀 전체를 해열·해독·종기·이뇨에 약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사리 넓은 들판 가운데 나란히 선 소나무 두 그루.
‘부부송’이라고 불리는 이 소나무는 평사리 들판의 상징인데,
드라마 '토지'가 방송된 이후에는 각각 서희나무, 길상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총 16권으로 된 박경리의 원작 소설 '토지'를 서너 차례 읽은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음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서희나무,길상나무가 아니라 용이와 월선네 나무라 해야할 것 같다.




두 그루의 나란히 선 소나무가 바라보는 곳.
북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야산 비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최참판댁이 위치해 있다.
물론 하동군에서 문화관광 차원에서 지난 2001년에 만든 인위적인 곳이다.
실제 경남 통영 출신의 토지 원작자 박경리 선생은 26년간에 걸쳐 '토지'를 집필하면서도
이곳 평사리에는 단 한 번도 와본 일이 없었다 한다.




오후 1시12분
부부송에서 서쪽으로 500여 m 떨어진 곳의 동정호 생태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호안면적 4만2000㎡ 인 호수를 중심으로 생태공원 조성사업이 진행중인 곳으로
예전에는 약15만㎡ 정도의 큰 호수였으나 줄어든 것이 아쉽다.

하지만 더 큰 안타까움은 생태공원 이름인 '동정호(洞庭湖)'가
앞에서 거론한 중국의 소상팔경 중의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에서 모방을 했다는 점이다.
중국 악양(岳陽)에 있는 둥팅호[洞庭湖]에서 그 이름을 그대로 빌어 ‘동정호(洞庭湖)’가 된 것이다.
언제쯤 우리 주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튜울립 꽃이 예쁘게 핀 동정호생태공원을 벗어나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호숫가에 세워진 빨간 우체통은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우체통이 아니다.
'동정호 사랑의 느린 우체통'이란 이름의 저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보낸 달의 1년 후 마지막 날에 발송되는 우체통이다.
가족,친구,연인에게 혹은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 한 통 보내 보는건 어떨런지?




오후 1시57분
최참판댁 입구에서 곧장 최참판댁으로 향하지 않고, 서쪽인 좌측 도로로 들어서면
1.4km 떨어진 한산사라는 이름의 작은 사찰로 향하게 된다.
최참판댁 입구로 향하던 수많은 인파가 일시에 사라지고
오로지 나 홀로 인적없는 오르막길을 따라 1.4km 떨어진 한산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오르막 길을 오른지 10분 정도 지난 시점.
우측으로 최참판댁으로 더 잘 알려진 드라마 토지 촬영장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긴다.
1시간 여 전 비가 그친 후인지라 오르막길을 오르니 땀이 계속 흘러 얼굴을 적신다.




오후 2시10분
유난히 홍단풍이 많이 몰려 있는 구간을 지나며
200m 남짓 앞쪽에 큰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한산사 경내가 가까웠음이다.
1.4km 정도 급경사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반팔 차림의 상의는 온통 땀으로 젖었다.




오후 2시15분
한산사 바로 아래 동쪽으로 조망이 트인 절벽 위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좌측인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최참판댁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로 평사리 넓은 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우측인 남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조금 전 다녀온 동정호가 눈 아래로 보이고
그 우측으로 고운 모래를 가진 섬진강이 눈에 들어온다.
비 그친 후 남아 있는 옅은 안개로 인해 쪽빛으로 빛나는 섬진강물을 접하지 못함이 아쉽다.
동정호 바로 너머에는 낮에 지나온 '부부송'이 조그맣게 보인다.




논 한 가운데 서 있는 부부송을 망원렌즈로 당겨 본다.
저토록 다정해 보이는 '부부송'이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길상과 서희일 수가 없음이다.
만석꾼 양반 집안의 외동 상속녀인 서희는 근본도 모르는 노예 신분인 길상을
먼리 만리타향 만주 땅 용정에서 남편으로 맞아 들인다.
그것도 사모하던 양반집 자제 상현의 무심함에 피치 못해.

그러나, 우직한 농사꾼 용이와 서로 사랑했던 월선네는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로 혼인을 못했지만
평생을 용이와 서로 사랑하며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랑이 변치 않는다.
고로 소설 '토지'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저 두 그루의 소나무는
'용이와 월선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사찰인 한산사 대웅전 앞에서 잠시 머문다.
사찰 측의 주장에 따르면, 화엄사(544년)와 창건연대가 비슷하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중국의 한산사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전해 진다.
한산사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으며,
잠 시 후 들리게 될 고소성 또한 중국의 고소성과 같은 이름이다.




한산사를 벗어나 고소성으로 향하는 길은 풀내음 가득한 곳이다.
지난 해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추운 겨울을 지냈음에도 마치 가을날 낙엽을 밟으며 지나는듯
싱싱한 느낌을 발밑으로 전해주는 그런 길이다. 그만큼 사람의 왕래가 뜸한 곳임을 뜻하는 것이리라.
최참판댁 입구를 떠나 한산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든 이후 아직 사람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곳이다.




오후 2시37분
하동고소성(河東姑蘇城)  남문에 도착한다.
해발고도 340m 지점인 이곳은 아래 한산사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서기 600년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원군인 위병의
섬진강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구축한 것이 아닌지 추측한다고 전해진다.
동북쪽은 지리산의 험준한 산줄기로 방어에 유리하고 서쪽은 섬진강이 한눈에 보여
남해에 오르는 배들의 통제와 상류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성벽 위에서 앞쪽인 남동쪽으로는 평사리 들판과 멀리 섬진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다만 오늘 날씨가 도와주지 않을 뿐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화창한 날을 골라 다시 이곳에 올라 멋진 섬진강의 경치를 바라보고 싶다.




성벽 안쪽인 남서쪽으로 바위와 소나무 가지를 뚫고 섬진강 푸른 물을 바라 본다.
쪽빛 물빛과 고운 모래로 잘 알려진 이곳 섬진강은
옛부터 모래가 고와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강), 사천(沙川) 등으로 불리었으나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를 내쫓았다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강이 되었다 한다.




오후 2시42분
고소산성을 떠나 최참판댁을 방문하기 위해 다시 한산사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린다.
사적 제151호인 고소산성은  면적 18만 8881㎡. 성벽 둘레 1,500m, 높이 3.5~4.5m 인데
 성의 단면은 사다리꼴로 되어 매우 견고하고, 남북에 각각 성문을 둔 구조라 한다.




오후 3시11분
도로변 최참판댁 주차장 입구에서 600m 정도 위로 올라온 지점으로
한산사에서 8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주차장을 거쳐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1,000원으로 기억되는 입장권을 구입해야 출입할 수 있다.
이곳 입구에도 매표소가 있지만, 사람이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하긴 나 자신 1시간 이상 사람 구경을 못했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인데,
나 한 사람에게서 입장료를 받기 위해 사람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게다.
지난 수년 간 여러차례 방문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최참판댁으로 들어선다.




하동군에서 최참판댁을 문화관광 차원에서 건립한지 벌써 10 여년이 지난 지금.
연간 150만 여명이 다녀가는 관광명소가 된 이곳.
만석꾼 양반집인 최참판댁 본 채 건물 주위로 갖가지 구조물이 형성되어
관람객들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관광지 중심부인 최참판댁으로 들어선다.
최참판댁은 지상 1층 건물로, 주 건축물로는 최서희의 조모 윤씨 부인의 생활공간인 안채[90.03㎡],
최서희의 공간인 별당채[43.2㎡], 최치수의 사랑채[82.62㎡]를 비롯하여,
문간채[19.44㎡], 행랑채[129.82㎡], 중문채[72.9㎡], 사당[8.91㎡], 초당[15.12㎡],
사주문[3.6㎡], 뒷채[42.84㎡] 등 10개 동으로 되어 있다.




'더블린 이야기', '율리시즈' 등 세계 명작을 남긴 "제임스 조이스" 한 사람에 의해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세계적 관광명소가 된 사실을 부러워했던 나의 젊은 시절을 회상해 본다.
이제 박경리라는 대한민국 통영 출신의 위대한 소설가가 나와
동시대의 삶을 한동안 영위했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26년이라는 집필 기간, 그리고 사투리만을 모은 별도의 책 한 권을 포함 17권으로된
우리 문학사상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엄청난 그 작품을
한 권, 한권 기다리며 읽던 지난 시절의 기억을 다시 되새겨 본다.
구한말인 1897년에서 1945년까지 약 50여 년에 이르는 기간의 우리 역사를 기록한 대하소설 토지.
지금까지 네번 읽은 책이지만 올 여름부터 16권의 책을 다시 한번 읽으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최참판댁 앞 마당 부근에서 평사리 벌판과 섬진강을 내려다 본다.

할머니인 윤씨 부인의 손에 이끌려, 길상이의 등에 업혀,
그리고 못된 친척에게 쫓겨 만주로 떠나면서 입술을 깨물며 바라보던 평사리의 기름진 논들이
최참판댁 마당에서 눈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길상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을 잡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내려다보던 중년 부인 서희의 모습도 눈 앞에 선하게 느껴진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여인 서희를 생각하며 최참판댁을 떠난다.




오후 5시40분
평사리 최참판댁을 떠나 귀가길에 잠시 들린 곳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위치한 화개 장터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도로 좌측이 지난 2001년 봄 면적 3,012㎡ 터에 복원한 현재의 화개장터이고,
도로 우측 현재는 일반 건물이 들어선 부분이  18세기 후반 무렵에는
 전국 7위의 거래량을 자랑한 큰 시장인 화개장이 있던 자리다.

도로변에 세워진 커다란 돌에는 "律刹本山雙磎寺(율찰본산쌍계사)"라 각인되어 있지만
지나는 사람 대부분이 무심코 지나친다.
가까운 곳에 있는 큰 사찰인 쌍계사가 불교의 한 종파인 "율종(律宗)"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는듯 하다.
율종(律宗)은 불교에서 율장(律藏)을 근본 종지(宗旨)로 하고 있는 종파를 말한다.




총 면적 1,000평이 채 못되는 화개장터로 들어선다.
『화개면지』에 의하면 화개장은 1770년대에 1일·6일 형식의 오일장이 섰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현재도 이곳 화개장터의 장날은 1,6일장이다.
하지만 외래 관광객들이 몰리는 주말이 장날과 상관없이 크게 붐비는 특징이 있음이다.
점심 무렵까지 비가 내린 때문인지 오늘은 주말임에도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화개장은 본래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열리던 장으로,
섬진강의 ‘가항종점(可航終點)’ 즉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이곳에 대규모의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 시대 때부터 중요한 시장 중의 하나로 주로 지리산 일대의 산간 마을들을 이어주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옛날에는 섬진강의 물길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이 시장에 모여,
내륙에서 생산된 임산물 및 농산물과 남해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라는 노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개장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발표된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의 주무대가 화개장터일 정도로
이 부근에서는 규모가 크고 중요한 장터였었다.
소설 '역마'를 읽어보면 화개 장터에서 주막을 운영하며 사는 옥화는
아들의 역마살을 없애기 위해서 아들 성기를 쌍계사로 보내고 장날만 집에 오게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화개장터'라고 쓰인 표지석과 화개장터의 유래 및 「화개장터」노래 가사를 적은 석조물,
역마상과 옛 보부상의 조형물 등을 뒤로 하고 화개장터를 떠나 귀가 차량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오후 6시 4분
귀가 차량 탑승을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하루 종일 대지를 비취주던 태양이 지난 2003년 여름 개통한 길이 358m 의 남도대교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이고, 섬진강 너머 다리 저쪽은 전남 구례군 간전면이다.
남도대교 너머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 마루금은 해발 1,218m 인 광양 백운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한재, 따라봉을 잇는 능선인듯 하다.

당초 계획한 성제봉 산행 대신 슬로시티 토지길을 걸은 하루였지만
나름 우리 옛 문화와 역사를 가까이 하면서도 4시간 이상 걸을 수 있었던 행복했던 하루였다.




위 지도상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날 하동군 악양면에서 걸었던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