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와 묘소를 찾아 떠난 영월 여행



2013년 5월18일 일요일 오전 10시 52분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의 슬픔이 깃든 역사의 현장을 찾아 떠난 영월 여행.
첫 발을 내디딘 곳은 한반도 지형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는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용정리의 선암마을 주차장이다.
황금연휴인 3일 연휴의 둘쨋날을 맞아 주차장 주변은 발 디딜틈조차 없어 보인다.




한반도 지형을 보기 위해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이처럼 울창한 숲길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주를 이루며 이제 막 푸르른 잎이 솟아나는 활엽수로 뒤덮인
녹음 짙은 숲길의 맑은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 마시며 걷는 길. 발걸음이 가벼워 진다.




오전 11시3분
주차장을 출발해 10여분만에 도착한 전망대에서 서강변에 자리한 한반도 지형을 바라본다.
굽이쳐 흐르는 평창강에 의해 침식,퇴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신비함이다.
요즈음은 '한반도지형'이라 통상 불리는 저곳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자리를
간혹 '종만봉'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이곳을 처음 발견한 '이종만'이라는 이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참고로 이 사진은 본인이 지난 2008년 7월26일 오전 11시28분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의 해발 270m 둔주봉 바로 아래 정자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곳 한반도 지형만큼 전국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한반도 지형의 좌우를 뒤바꿔 놓은듯한 이 모습을 보기위한 관광객이 최근들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곳이다.




멋진 장관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의 행렬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당초 이곳의 행정구역 명칭은 영월군 서면이었으나
관광객 유치를 위한 영월군의 의지가 반영되어 지난 2009년 10월 면의 명칭이 '한반도면(韓半島面)'으로 변경되었다.
명칭 변경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듯 싶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 한 장으로 담기가 어려워
여러장의 사진을 가로로 이어붙여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어 보았다.
구비구비 흐르는 서강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와 유사하며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적 특색까지 빼어 닮은 모습이다.




종만봉 절벽 위 비좁은 공간에 마련된 전망대로 몰려드는 관광객은 점점 불어난다.
멋진 경치를 다시 한번 망막에 깊에 새긴 후 전망대를 벗어난다.




한반도 지형을 삼면으로 감싸고 흐르는 서강 위에는 뗏목 형태의 유람선이 떠 있다.
오전부터 땀이 솟게하는 무더운 날씨인지라
뗏목에 걸터 앉아 시원한 강물에 발을 적시는 저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러운 이 순간이다.




전망대를 떠나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짧은 길이 아닌
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1km 정도의 한적한 숲길을 따른다.
길섶에 둥글레꽃이 예쁘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흔히들 둥글레 차는 즐겨 마시지만 꽃이 핀 모습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둥글레는 봄철에 어린 잎과 뿌리줄기를 식용함은 물론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번갈·당뇨병·심장쇠약 등의 치료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짙은 풀내음 풍기는 조용한 숲길에서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회양목 군락지도 지난다.
한 여름에 너무 짙은 녹색의 나뭇잎보다
5월의 신록으로 빛나는 연두빛의 회양목 잎이 싱그러움으로 다가 온다.




상록수인 이 회양목(淮陽木)을 예전에는 예전에는 황양목(黃楊木)이라고도 불렀는데,
석회암지대가 발달된 북한지역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자랐기 때문에 회양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회양목 열매를 한방에서는 진해·진통·거풍 등에 약재로 이용했으며,
회양목은 목질이 단단하고 균일하여 쓰임새가 많은 나무였다.
조선시대에 회양목은 목판활자를 만드는데 이용되었으며, 호패, 표찰을 만드는데도 이용되었다.
또한 도장, 장기알 등을 만드는데 이용되기도 했다한다.




낮 11시29분
울창한 숲길이 이어지던 중 서쪽 바위절벽 가에 조그만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름하여 '서강전망대'이다.
앞서 간 일행 몇몇이 함빡 웃음을 터뜨리며 추억 남기기에 여념없다.
행복감이 듬뿍 담긴 밝은 웃음소리가 그칠줄 모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서강변의 풍경이 아름답다.
원래 이 강줄기의 이름은 평창강이다.
평창군 북부의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속사천(束沙川)이라는 이름으로 남서로 흐르다가
평창군 봉평면(蓬平面)에 이르러  흥정산과 태기산에서 발원한 흥정천(興亭川)과 합류하여 평창강을 이룬다.
그리고 이곳 한반도면에서부터 영월읍까지의 구간을 속칭으로 서강이라 부르며
오후에 방문하게 될 청령포를 휘감아 돈 후 영월읍에서 동쪽의 동강과 만나 남한강을 이루게 된다.




낮 12시9분
한반도면을 떠나 다음 행선지인 선돌을 둘러보기 위해
해발고도 320m 인'소나기재' 정상부에 위치한 주차장에서 탐방로를 따라 서강변으로 향한다.
이곳의 이름 유래는 비운의 왕 단종과 연관이 있다.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채 유배길에 오르던
15살의 소년 왕 단종이 유배길에 소나기를 만났던 고개라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때의 그 소나기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단종의 눈물을 감추기 위한 하늘의 배려였을까?




낮 12시11분
선돌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는 주차장에서 불과 100여m로 2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깎아지른듯한 서강변 절벽위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선돌의 모습이 장관이다.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가 이곳 행정구역이다.
선돌 너머 서쪽으로는 북쌍리 동강사슴목장 너머로 평창강을 가로지르는 연당교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절벽에서 분리되어 있지만 푸른 강물 사이로 불쑥 솟은 당당한 모습의 높이 70m인 선돌(立石).
오랜 옛적 단양의 전투에서 수세에 몰린 온달장군을 돕기 위해 달려온 고구려의 산신령이
장군의 전사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멈추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이곳.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기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낮 12시25분
선돌 전망대를 떠나 도로가로 나와 청령포를 향해 한참을 걷던 중
도로 건너편 비탈 사면에 흐드러지게 핀 등나무꽃에 현혹되어 잠시 걸음을 멈춘다.
여름에 뙤약볕을 피해 그늘을 만들기 위해 흔히 심는 나무 덩굴답게 등나무꽃의 꽃말 또한 '환영'인데,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옛부터 지팡이 재료로 많이 이용된바 있다.




낮 12시59분
당초 계획은 선돌에서부터 청령포까지 5~6km 거리를 도보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상 차량으로 이동하여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했다.
불과 3년전만 해도 별다른 건물이 없이 작은 매표소만 덩그러니 서 있던 주차장에 큰 시설물이 자리하고 있다.
청령포 관리동을 겸한 강변저류지홍보관 건물이다.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지정된
행정구역상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번지인 청령포의 면적은 20만 4,241㎡이니
알기 쉽게 평수로 환산하면 6만2천평이 조금 못되는 면적이다.




정원 50여명의 작은 도선으로 남한강 상류 지역인 서강을 건너 청령포에 발을 딛기까지는 불과 2~3분의 짧은 시간이다.
지금은 이렇게 잔잔한 강물이지만 여름철 장마 때는 청령포의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기도 한다.
1457년(세조 3년) 세조(世祖)에 의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나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게 된다.
나 또한 수년 전 이 부근을 지나던 중 청령포에 잠시 들리고자 했으나
많은 비가 내린 후  안전을 이유로 도선이 운항을 중단한고로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단종이 짧은 기간 머물렀던 어가(御家)는 하늘을 찌르듯 뻗은 소나무들이
따뜻이 감싸 안고 있다.
마치 어린 단종을 품어주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처럼...




단종이 머물던 어가 경내에 자리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모습이다.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것으로 영조가 직접 쓴 글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에 새겼다.
비(碑)의 뒷면에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 청령포라고 표기된 것으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0년 복원된 전면 5칸,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구조인 단종어소(端宗御所)는
유배 당시 단종이 기거하던 건물이다.
당시 '어가' 또는 '적소(유배생활하는 자가 머무는 곳)' 등의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어가의 위치 등 여러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 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 했다.




단종어소와 작은 담을 사이에 둔 담장 옆의 이 초가집은 행랑채로
단종을 따라 청령포까지 동행한 몇몇 궁녀들과 관헌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경내에는 단종어소를 향하여 절하듯 길게 수평으로 자라는 소나무가 있다.
받침목 여러개로 보호된 채 잘 자란다.
수년 전 들렀을 때보다 더욱 싱싱하게 자라는걸 보니 영월군에서도 세심한 관리를 이어가는듯 싶다.




단종어가를 벗어나 망향탑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무척 키가 큰 소나무가 한 그루 눈길을 끈다.
그 앞의 안내문에는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이 소나무의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당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서쪽 서강변 절벽지대 육육봉과 노산대 중간 지점에는 이와같은 작은 돌탑이 있다.
'망향탑'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돌탑은 유배생활 당시 단종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의 모습은 1974년 허물어졌던 탑을 복원한 것이다.




망향탑을 지나 목재 데크로 만들어 놓은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청령포 서쪽 끝의 절벽 위에서 길은 막힌다.
이 절벽의 이름은 육육봉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서강 물빛을 바라보며 600여년 전 단종의 슬픔의 깊이를 가늠해 보지만
도저히 일개 범부인 나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육육봉에서 내려와 다시 망향탑 앞을 지난 후 동쪽으로 몇십 걸음 옮기면
큰 바위로 된 절벽이 서강변에 깎아지른듯 서 있다.
한 두명이 올라설만한 공간의 바닥에 '노산대'라 새긴 돌을 박아놓았다.
단종은 1457년(세조 3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는데
단종이 자주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하여 노산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산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좌측 절벽 숲속에는 조금 전 들렀던 육육봉으로 오르는 관광객들이 나무숲 사이로 보인다.
잔잔하게 흐르는 서강물을 바라보며 그 옛날 소년 단종도 시름을 흘려보냈으리라.
어쨌든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끝내 죽이기까지 한
수양대군은 정말 나쁜 인간임은 분명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비록 그가 조선 7대왕 세조로 재임한 14년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국방력 신장,
직전법(職田法) 실시 등 업적이 있었다 할지라도..




'금표비(禁標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비문을 읽어본다.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뜻을 풀어보면 동,서쪽으 3백자, 남.북으로 4백9십자 범위내에서 농사 등 행위를 금하며.
차후 진흙이 쌓여 생긴 땅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뜻인데.

이는 1726년(영조2년)에 세운 것으로 일반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농사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계셨던 곳이니 일반인들은 접근하면 안된다는 뜻으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 1시50분
청령포 관광을 마친 후 도선을 타고 서강을 다시 건너와
강변저류지 홍보관에서 마지막으로 청령포를 조망해 본다.
사진 한 장으로 전경을 모두 담을 수 없어 여러 장의 사진을 파노라마로 연결해 본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인파는 오후가 되면서 더 많아진듯 하다.
저 많은 관람객들이 눈에 보이는 경치만 둘러보지 말고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담고 돌아오는 유익한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오후 3시20분
때 늦은 점심식사와 휴식을 끝낸 후 영월읍 영흥리에 소재한 단종의 묘소인 장릉 관광을 위해 경내로 들어선다.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은 지난 1970년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바 있다.




능역에는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과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의 합동 위패를 모신 장판옥등 여러 시설들이 있다.
 그리고 능소 입구에 있는 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에는
중종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치제 하였으나
중종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으로 무덤을 찾아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촌비각 좌측의 계단을 오르면 단종 능으로 향하게 된다.




단종능으로 이어지는 그리 길지 않은 길 얖옆으로는 멋진 자태의 소나무가 마치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좌우의 소나무 모두 나뭇가지를 사람이 지나는 길쪽으로 향한 것을 두고 홍보책자에는
단종을 향해 고개 숙인 것이라 한다.

이곳에도 수십명의 인원을 세워 놓고 큰 소리로 해설하는 문화해설사들이 있다.
매주 산행이나 여행을 하며 수많은 관광지의 문화해설사들을 지나치게되는데,
너무 시끄럽고 또한 이끌고 다니는 수십명의 무리들 때문에 혼잡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수십명씩 인솔하고 다니는 문화해설사가 꼭 필요한 것일까?




지난 1970년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莊陵)은 1698년 능호 제정을 한 딘종의 능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17살에 죽임을 당한 단종.
그리고 본인의 안위를 전혀 의식치 않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몰래 매장한 영월 호장 엄흥도.
그리고 장판옥에 위패로 모셔진 264인의 충신들을 생각해 본다.




지난 2009년에 우리나라의 조선왕조 왕릉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왕릉 중에서도 이곳 장릉은 보존이 잘 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다.
조선왕조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이내에 만들던 예법이 있었으나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 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비로소 복권되어 왕으로 칭해졌으니
간교하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때를 덜 탔다고 할 수 있으려나?




장릉은 왕릉 조성 관례로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또한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참고로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중 '장릉'이라는 같은 이름의 능은 전국에 3곳이 있다.
다만 한자로는 각각 다르다.
이곳 조선 제6대 단종릉인 영월 장릉(裝陵)외에
조선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 원종과 인원왕후 구씨릉인 김포장릉(章陵)과,
조선 제16대 인조와 왕비 인영왕후 한씨릉인 파주 장릉(長陵)이 있다.




오후 3시45분
장릉 서쪽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영천(靈泉)을 끝으로 장릉 경내 탐방을 마친다.
이 영천은 1791년(정조 15년) 어명으로 영월부사가 수축하여 한식 때 제사용 우물로 사용해온 것이라 한다.

이제 오늘 여행을 마감하고 귀가길에 나서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영천(靈泉)앞에서 잠시 멈추어 돌아가신 단종임금의 명복을 빌어본다.
영천 샘물 아래 가라앉은 수많은 동전들을 볼 때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위 지도상에 붉게 표시된 부분이 이날 방문했던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