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23일 오전 10시 26분.
하루 전 개막된 매화축제가 열리는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의 중심부에 자리 한
청매실 농원 입구에는 따뜻한 봄 날씨 때문인지 수많은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섬진강 건너 동쪽 경남 하동군에 마련된 대형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섬진강을 가로 지른 임시 부교를 건너 이곳까지 걸어오는 10 여 분간 움직인 탓인지
조금 더위를 느낄 정도의 따뜻한 날씨다.
청매실농원 바로 뒤편 온통 매화꽃에 파묻힌듯한 작은 정자에도
수많은 상춘객들이 몰려 발 디딜 틈 조차 없어 보인다.
5~6년 전부터 매년 이맘 때쯤 이곳을 찾는 일이 당연시 되다시피 한 나의 주말여행이지만
오늘처럼 따뜻한 날씨 속에서 만개한 매화 향에 취하는 행운도 흔치는 않은 일이다.
설중매(雪中梅)라는 말로 우리 귀에 친숙한 매화.
겨울이 다가기 전 아직 잔설이 난분분한 시절에 피기 시작하는 매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꽃이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국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
이제는 우리에게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꽃이 되었다.
매실 가공식품류를 숙성,보관하는 수많은 장독의 모습도 이곳의 큰 구경거리 중 하나이다.
청매실농원의 매실식품은 매실 농축액과 원액, 매실청, 된장, 고추장, 장아찌, 절임, 젤리 등이 있는데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농원 앞마당에 빼곡한 2,500여 개의 전통옹기에서 숙성되고 있다.
수년 전까지는 장독의 갯수가 2,500 여개라고 들었는데,
최근 언론 보도에서는 3,000여개라고 한다. 그새 갯수가 늘었는지도 모르겠다.
휴일을 맞아 봄꽃 구경을 나온 관광객들만 분주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꽃들을 찾아 다니며 꽃가루와 꿀을 모으는 벌 또한 분주하다.
뒷다리에 꽃가루가 점점 크게 뭉쳐진다.
저 꽃가루 뭉치가 점점 커져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되면 집으로 돌아가 꽃가루를 털어낸 후
다시 부지런히 일터로 돌아온다.
정유재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의 모가지를 나꿔 채 남강 물에 익사 시키며
자신의 생명도 초개같이 버렸던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의 '수분재( 수분령이라고도함)'에서 발원한 후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하동포구를 거쳐 광양만으로 흐르는 쪽빛 섬진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매화축제장을 찾은이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이곳 매화마을에서도 가장 큰 매화 재배지이자 운치 좋은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청매실농원은 고(故) 김오천 선생이 1931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밤나무와 매화나무 묘목을 가지고 들어와
산자락 45만 평에 이르는 임야에 처음 심었고, 그의 며느리 홍쌍리여사가 대를 이어 매화농사를 짓고 있다.
홍쌍리여사는 매화나무 재배와 매실 식품 상용화에도 힘을 기울여
섬진마을 일원이 오늘날 매화마을로 정착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수많은 인파와 차량의 홍수로 인해 휴일 나들이에 대한 짜증을 잠시나마 느꼈던 상춘객들도
한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이른 봄철 꽃의 향연을 벌이는 매화 향기에 취해 짜증을 모두 던져 버린다.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고 난초, 국화, 대나무와 짝을 이루어 사군자라 해서
귀한 꽃으로 대접 받는 매화에 둘러 싸여 지낸 이곳에서의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오전 11시 4분
전망대에 올라 눈 아래로 청매실농원 주위로 펼쳐지는 흰 매화꽃의 향연과 어우러지는
섬진강의 쪽빛 물빛을 즐기는 가족단위 관광객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눈에 띈다.
전망대가 산자락에 위치한 청매실농원 뒷편 언덕 높이 자리한 때문인지
인파가 많지 않고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곳이다.
청매실농원을 둘러싼 뒷산은 해발 536.5m 인 쫓비산이다.
쫓비산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는 산 정상부가 뾰족한 모습인데,
뾰족하다라는 말의 이 지방사투리인 '쪼삣하다'가 변해서 된 이름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쫓비산에 올라 바라 본 섬진강의 맑고 고운 물 색깔이
쪽빛(남색)을 띠고 있어서 유래한 산 이름이라 한다.
허나 오늘은 옅게 낀 연무로 인해 시계가 조금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섬진강의 쪽빛 물빛을 보지 못한다.
쫓비산 자락의 품에 안겨 섬진강을 끼고 자리 한 아늑한 매화마을은 매화꽃에 묻혀있다.
원래 이 마을 이름은 섬진마을이었으나 청매실농원을 중심으로 매화나무가 번창하며
이제는 이름이 매화마을로 바뀌었다.
고결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진 매화에는 퇴계 이황 선생에 얽힌 얘기도 전해 온다.
퇴계 선생이 단양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를 몹시 사모하던 한 기생이
선생께 사랑의 정표로 숱한 선물을 건넸으나 모두 물리치면서도
매화나무 한 가지만은 선물로 받아 동헌 뜰에 심고 그를 즐기셨다 한다.
그리고, 도산으로 돌아 가실 때 그 매화나무를 도산서원으로 옮겨 심었는데,
오늘날 도산서원의 매화나무는
그 기생이 선물한 매화나무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른 아침에는 기온이 영하에 가까운 쌀쌀한 날씨였지만
한낮이 되면서 포근하다 못해 더위까지 조금 느껴지는 날씨가 봄꽃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이다.
진한 매화 향을 코끝으로 느끼며 드넓은 청매실농원 일대를 여유있게 거닐어본다.
수많은 사진 동호회원들은 전문 모델까지 동반하고 멋진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의 매화꽃은 이미 꽃이 지기 시작한다.
이 아름다운 흰 꽃이 모두 질 무렵이면 꽃샘추위,황사 등으로 심술을 부리던 변덕스런 봄날은
추운 겨울을 지낸 후 맞은 봄의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부리나케 물러나며
더운 여름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될게다.
머잖아 떠나갈 봄을 아쉬워하며 한동안 풀밭에 앉아 매화삼매경에 빠져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화와 벚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물론 시기적으로 매화 꽃이 지기 시작하면서 벚꽃이 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쉽게 구분하는 방법 몇 가지는
우선 매화는 꽃잎 가장자리가 둥글고, 벚꽃은 꽃잎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을 이룬다.
개화 시기를 보면 매화는 2~3월, 벚꽃은 3~4월이다.
위 사진의 매화꽃을 자세히 보면 꽃잎 가장자리가 매끈한 원형이다.
(* 이 사진은 2010년 4월10일 마산 무학산 자락에서 찍은 벚꽃 사진이다.)
벚꽃은 위 사진에서처럼 꽃잎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다.
또한 나뭇가지에서 대여섯개의 꽃자루가 길게 나와 꽃을 피운다.
그러나 매화꽃은 가지에 바로 붙어서 하나 또는 두 송이 정도의 꽃을 피울 뿐이다.
따라서 바람에 하늘거리는건 벚꽃이지 매화가 아니다.
또한 향기가 약한 벚꽃에 비해 매화는 향기가 진하게 나는 특징이 있다.
옛날 중국 산동 지방에 '용래'라는 청년의 약혼녀가 약혼식 3일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약혼녀 무덤에서 울던 용래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나무가 한 그루 돋아난다.
용래는 그 나무를 집에 옮겨 심고 약혼녀의 넋으로 여긴 그 나무를 바라보다 일생을 마친다.
그리고 용래가 늙어 죽어서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그 나무를 떠나지 않았다.
후세에 사람들은 용래의 약혼녀 무덤에서 핀 나무를 '매화나무'라 하였고,
그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곁에 가까이 있던 새를 '휘파람새'라 불렀다.
온통 매화꽃으로 뒤덮인 청매실 농원과 쫓비산 자락에서 벗어나
수많은 차량,인파, 그리고 음식점들이 즐비한 도로변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곳 섬진강 주변의 특산물인 벚굴을 손질하는 상인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일본인들이 벚꽃이 피는 시기에 먹는 굴이라해서,
또는 벚굴은 서너 개가 한 데 모여 자라는데 그 모습이 꼭 물속에 핀 벚꽃 같다고 해서
벚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굴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섬진강 하구 강물 속 바위에 붙어 자란다.
이날 이곳에서의 벚굴 시세는 위 사진의 한 접시 가격이 3만원이다.
지난 2011년에는 2만원~2만5천원 정도였는데,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는 금년 시세를 보니
유명세를 타며 수요가 크게 늘어난듯 싶다.
어쨌든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손질 중인 굴 한접시 옆에
담배갑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
보통 이 굴 한개의 무게는 껍질 포함하여 600~700g. 엄청난 크기이다.
맛 또한 일품이며 입춘 무렵부터 4월까지만 맛 볼 수 있는 진미 중 하나이다.
쪽빛 물빛과 고운 모래로 잘 알려진 이곳 섬진강은
옛부터 모래가 고와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강), 사천(沙川) 등으로 불리었으나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를 내쫓았다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강이 되었다 한다.
낮 12시33분
2시간 이상 머물렀던 매화마을을 뒤로하고 부교를 이용해 섬진강을 건너간다.
이제 이곳 전남 광양에서 저 부교를 건너 가면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 박경리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제주도,전남 보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녹차 산지인 경상남도 하동 땅이 된다.
낮 12시48분
흔들거리는 부교를 이용해 섬진강을 건너 동쪽 경상남도 하동 땅에서
건너편인 서쪽 전라남도 광양 땅을 바라다본다.
2시간 이상 머물렀던 매화마을 축제장 부근은 오전보다 인파가 더 늘어난듯 하다.
저 많은 인파들이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하루를 즐기기를 바라며
다음 행선지인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장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오후 3시37분
매화축제장 인근 섬진강변 주차장에서 불과 30 여km 남짓 떨어진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축제장까지 이동하는데 2시간 반 이상이 걸렸다.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곳을 극심한 차량 정체로 시간을 허비한 탓에
축제장 부근을 벗어나 반대쪽인 북쪽 반곡마을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반곡마을은 마을 전체가 샛노란 산수유꽃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산수유마을로 불리우는 구례군 산동면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다.
지리산 자락의 상위마을, 하위마을, 월계마을, 반곡마을, 대평마을, 상관마을을 비롯해 계척마을, 현천마을 등.
1000여년 전 중국 산동(山洞)에서 시집온 처녀가 산수유나무를 가져다 심으면서
마을 이름이 산동으로 바뀐 이곳은
여순사태 당시 지리산 공비잔당 토벌로 숱한 민간학살이 행해진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한국, 중국이 원산지인 산수유나무는 특히 토심이 깊고 비옥한 곳에서 잘 성장하고
햇볕을 좋아하나 음지에서도 개화 결실하며
각종 공해에는 약한 편이나 내한성이 강하고 이식력이 좋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지역인 이천시 백사면에서도 재배하지만 주로 남부의 산지에서 자생한다.
우리 나라 산수유(열매) 생산량의 60%가 이 부근인 전남 구례군에서 생산된다.
산수유가 이곳 구례군 산동면의 지방특산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200년 전쯤이었다고 한다.
지리산 험한 준봉에 둘러싸여 있어 논이 적고 밭이 척박하였기에
산수유 나무를 곳곳에 심어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그 덕분에 요즈음은 산수유 꽃 하나만으로 전국 각지의 행락객들을 불러모으는
효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이다.
공해에 약하지만 내한성 강하고 이식력이 좋아
진달래나 개나리, 벚꽃보다 먼저 개화하는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 꽃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 수형과 아름다운 열매로 조경수로서의 가치가 상당히 높다.
20~30개의 작은 꽃들이 뭉쳐 퍼지며 핀다.
등산을 자주하는 이들은 매년 3월이면 산행 중 노란색 꽃을 만나면 산수유로 착각한다.
그러나 산속에서 피어나는 노란 꽃은 산수유와 흡사하지만 대부분 생강나무 꽃이다.
생강나무의 줄기,가지는 매끈하고 깨끗하지만 산수유나무 줄기와 가지는
껍질이 벗겨지는 등 지저분한 모습으로 구분된다.
또한 산수유꽃은 수술이 길게 뻗어나와 불꽃놀이 하듯 피어나는 특징이 있다.
* 위 사진에서 보듯 산수유나무 줄기는 껍질이 제멋대로 벗겨진 지저분한 모습이다.
사진에서 보듯 줄기가 벗겨진 곳이 거의 없이 무척 깨끗하다.
요즈음 산수유나무는 대부분 민가 근처에서 자라므로 3월달에 산속에서 노란꽃을 만난다면
아마도 대부분 암수 딴그루인 생강나무일게다.
줄기,잎,꽃에서 우리가 식용하는 생강 냄새가 나는 연유로 그 이름을 얻었다.
매년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우리 나라에서 산수유 꽃 축제를 개최하는 곳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경북 의성군 사곡면 등이 있으나
올해로 제15회 째를 맞는 이곳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 꽃 축제에 비하면
다른 지역의 경우 역사나 그 규모가 이곳에 미치지 못한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북쪽 2km 남짓 거리의 상위 마을에 들러 그곳의
산유정이라는 이름의 정자에 올라 샛노랗게 물든 아담한 산수유마을과 지리산 만복대에서 부터
뻗어 내린 산 자락에 터를 잡은 다랭이논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
그 옆으로 나란히 선 대숲 등이 뒤엉킨 한 폭의 산수화를 보고자 했으나,
시간 제약으로 그러지 못하는 대신 이곳 반곡마을 물가에서 봄을 즐긴다.
산수유 그늘 아래 큰 암반 사이를 흐르는 얼음 녹은 물.
아직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디찬 물이지만 조그맣게 소리를 내며 흐르는 맑은 물에
샛노란 산수유꽃이 비친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축제장 부근 대로변에서 10분 이상 걸어 올라온 이곳 반곡마을.
그 덕분에 인적이 얼마 없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햇빛 잘 드는 큰 암반 위에 편하게 앉아 봄을 즐긴다.
지금 이 순간만은 세상 그 누구도 부러울 이 없다.
지리산 만복대 남동쪽의 위안리 비리바위골 부근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상위마을에서 시작된 또 다른 물줄기와 합쳐 서시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계속 남서쪽으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머잖아 구례읍을 지나면서 섬진강 품속으로 스며든다.
샛노란 산수유꽃에서는 벌을 구경하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노란색에 가까운 벌 고유의 색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꽃말이 지속[持續], 불변[不變] 등인 산수유꽃도 자세히 살펴 보면
많은 벌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농촌 일손 부족 현상 때문인지 수확을 못하고 해를 넘겨 말라 버린 산수유 열매가 안쓰럽다.
산수유 열매는 8월부터 녹색의 핵과가 형성되어 10월이면 진한 붉은색으로 익은 아름다운 산수유 열매를 볼 수 있다.
10월 중순의 상강(霜降) 이후 서리가 내린 다음에 수확하는데
육질과 씨앗을 분리하여 육질은 술과 차 및 한약의 재료로 사용한다.
또한 산수유 씨에는 렉틴(Lectins)이 들어 있어 인체에 유해하므로 반드시 씨를 제거토록 해야 한다.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과 함께 비교적 일반에게 잘 알려진 한약 중 하나인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에 산수유를 비롯한 여섯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오후 4시18분
반곡마을을 떠나 큰 도로변에 위치한 원좌마을 산우슈문화관 뒤편 동산에 오른다.
산수유사랑공원이란 이름이 붙은 자그마한 공원.
노란색 산수유 조형물 뒤로 멀리 보이는 마을이 조금 전 다녀온 아름다운 반곡마을이다.
산수유사랑공원내 가장 높은 지점에 만들어 놓은 정자에 오른
많은 관광객들은 사방으로 눈을 돌려도 온통 샛노란 산수유로 뒤덮인 황홀경에 취해
자리를 뜰줄 모른다.
산수유사랑공원이 위치한 녹색농촌체험마을로도 알려진 원좌마을은
온통 노란 산수유로 뒤덮여 있다.
원좌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마을 생김새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하여 '좌새'라 하였다가
그 후 지대가 높은 위치라는 이유로 '원좌'로 불리웠다고도 하고,
또는 서쪽 산동면 소재지 부근 원촌마을 아낙네들이 이곳 원좌마을 뒷산으로 약초를 캐러왔다가
이곳 마을 청년들과 사랑이 움트면서 같은 원촌 사람들이 다수 살게되고
후에 마을 이름까지 '원좌'로 바뀌었다는 다소 로맨틱한 유래까지 전해지는 곳이다.
귀가 시 자나가야 할 지리산온천랜드 부근 축제장 중심부를 거쳐
산동면 소재지를 거쳐 산동교차로까지 이어지는 4차선 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주차장을 방불케한다.
1년에 한 번 시기를 맞춰야 가능한 꽃 구경이니 잠시 동안의 교통 체증쯤은
머릿 속에 담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도 봄철 꽃나들이를 떠나는 이들은 잊지 말아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오후 4시49분
귀가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지나는 길도 온통 산수유로 뒤덮여 있다.
희망, 여유로움, 따스함을 준다는 노란색.
그로 인해 피로가 조금은 회복되었으리라 자위하며 산수유축제장을 떠나 귀가길에 오른다.
머릿 속으로는 곽재구 시인의 "산수유 꽃 필 무렵"이라는 싯귀를 다시 떠올려 본다.
--산수유 꽃 필 무렵--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은 삼십 리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 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