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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 종찰 송광사를 품에 안은 조계산 산행기



2013년 1월6일 오전 11시26분
조계산 산행을 위해 도착한 곳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접치재.
해발고도 240m 정도 지점인 이곳은 햇빛을 받지 못한 때문인지 차량이 다니는 도로까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는 설원이다.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하고
3.5km 거리인 조계산 최고봉 장군봉을 향해 산행로로 접어 든다.




오전 11시42분
영하 15~6도를 오르내리던 혹한의 겨울 추위가 조금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추운 날씨 속의 눈 산행이라 한기가 옷 속을 파고든다.
하나 다행스러운 점은 진행 방향이 남향인지라 정면으로 부는 겨울 바람을 맞지 않아도 됨이다.
대부분의 나무가 참나무 계통인 조계산이지만 간혹 최근에 조림한듯한 키 작은 편백 숲을 지나기도 한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느낌이 좋다.
발 밑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눈 밟는 소리는 어린 시절 책에서 읽은 그대로 "뽀드득"이다.
뒷편으로는 방금 지나온 아직은 어린 편백나무숲 너머로 야트막한 잘 알려지지 않은 오성산이 보인다.




낮 12시14분
이제 해발고도는 500m를 훌쩍 넘긴 지점이다.
금년 새해 첫날부터 전국적으로 내린 많은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다.
그만큼 새해 첫날부터 몰아닥친 동장군의 기세가 등등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오르막 산행길을 쉬지 않고 오르다보니 몸에 땀이 난다.
자켓을 벗어부치고 등산 티 하나만 걸쳤음에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며칠간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 속에서 지내다보니 추운 날씨에 적응이 많이 된듯 싶다.




낮 12시34분
542m 봉 부근 쉼터에서 몇몇 일행들과 잠시 휴식을 취하며 초콜렛 등 간식을 먹는 중 불청객이 찾아 든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텃새인 '동고비' 여러 마리가 모자 위에 내려 앉기도 하고
초콜렛을 든 손 위에 앉아 입맛을 다신다. 유난히 눈이 많은 올겨울 야생동물들의 먹이가 부족함을 절감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손 위에 올라 앉아 재롱을 피우는 동고비 덕분에
한 시간 이어진 산행의 피로를 풀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새해 벽두부터 모든 이들의 얼굴에 큰 미소를 만들어준 작은 새들이 너무 고맙다.




달콤한 휴식을 끝낸 후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 산길.
눈의 깊이는 고도가 높아갈수록 깊어진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도 눈이 녹지 않음에서 지금이 1년 중 가장 추운 겨울의 한복판을 새삼 느낀다.




진행 방향 우측인 북서쪽으로 눈 덮인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동계산 자락에 자리 한 접치마을과 그 너머 주암면 행정리 마을인듯 하다.




오후 1시7분
해발고도 860m 지점의 '장박골삼거리'에서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쉰다.
각종 등산지도에는 이곳의 명칭을 '장박골갈림길' , '접치능선삼거리' 로
혹은 '장박골몬당'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몬당'이란 말은 전라도 사투리로 '정상' , '높은 언덕' 등을 뜻함인데,
아마도 조계산 정상인 해발고도 884m 장군봉과 비슷한 높이인 때문일게다.
사진 우측 멀리 남쪽 방향으로 장군봉 정상부가 눈에 들어온다.
산행 들머리에서 이제 2.7km 를 왔으니 이제 장군봉까지는 0.8km 를 남긴 지점이다.




오후 1시24분
조계산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석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오랜 옛날 대홍수 때 이곳 정상부 근처만 남겨두고 모두 물에 잠겼었다는 얘기에 맞춰
저 정상석 바로 아랫부분에 시멘트를 바를 때 조개 껍질을 섞어 발랐으나 눈이 얼어 붙어 그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이 사진은 지난 2010년 12월11일 이곳 장군봉에 올랐을 때 찍은 사진이다.
정상석 아래 시멘트 몰탈 부분을 자세히 살피면 조개 껍질을 섞어 시멘트를 바른 것이 확인된다.
아마도 가까운 벌교가 꼬막 주산지이기에 꼬막 껍질을 섞은듯하다.

이것은 잠시 후 송광굴목재쪽으로 하산하며 만나게 될 '배바위'에 얽힌 전설과 관련이 있다.
오래 전부터 '배바위'에는 조개껍질이 붙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옛날 이 부근이 물속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구상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도 오래 전 옛날에는 바다속에 있었음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남서쪽으로는 온통 흰 눈에 덮인 조계산 자락의 부드러운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로 연산봉이 보이고 그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는 천자암봉이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부에는 세찬 겨울 바람이 쉴새없이 몰아친다.
오르막 산길을 오르느라 자켓을 벗고 티셔츠 하나만으로 이곳까지 왔으나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추위가 몰려온다.
벗어두었던 자켓을 다시 꺼내 입는다.




벗어 두었던 등산 자켓을 껴 입었으나 세찬 바람은 몸 속으로 냉기를 불어 넣는다.
정상부 남동쪽 바로 아래 햇빛이 잘 들고 세찬 겨울 북풍을 막아주는 눈밭에서 휴식과 점심식사를 한다.
매년 늦가을 이곳에 오르면 많은 산행객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오늘은 며칠간 이어진 강추위 때문인지 산행객들이 거의 없는 조용한 산행길이다.




오후 1시57분
30분 가까이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하느라 한 자리에 머무른 때문인지
몸에 땀이 식어가며 심한 추위를 느낀다.
귀마개는 물론 후드까지 뒤집어 쓰는 등 중무장을 한채 정상부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몇몇 산행객들을 뒤로한채
1.8km 떨어진 큰굴목재를 향해 남쪽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오후 2시8분
해발고도 700m 정도 지점의 배바위 옆을 지난다.
이 배바위는 이곳 조계산에 대한 여러 등산지도상에도 대부분 표기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지형지물이며
또한, 조계산을 이해하는데 의미 있는 중요한 대상임에도 대부분의 산행객들은 그냥 앞만 보고 내달린다.
비록 아주 높은 산도 아니고, 멋진 기암괴석이 즐비한 산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는 산이라면 그 산에 대한 한 두가지 특징 정도는 머릿 속에 담아 두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배바위를 지나 이어지는 비교적 급경사의 내리막길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길이다.
순백색을 그대로 간직한 흰 눈길을 걸으며 길섶을 가득 메운 조릿대 군락이 이어진다.
상록수를 찾기 어려운 대부분 참나무 계통의 활엽수 천지인 조계산 자락에서
유일하게 녹색을 띈채 살아 있는 생물임을 입증하는 존재가 바로 이 조릿대 군락이다.




오후 2시15분
가파른 내리막 경사길을 따르던 중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뒷쪽을 바라본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조금 전 지나온 배바위가 제 모습을 드러 낸다.




망원렌즈로 가까이 당겨 살펴 보니 배바위의 온전한 형태가 모두 드러난다.
사물을 판단할 때 반드시 가까이에서 보아야만 진실을 알 수 있음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저 배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아득한 옛날 온세상이 물에 잠기는 큰 홍수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큰 배를 만들어
이 바위에 묶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살아남았다 한다.
성서의 '노아의 방주'와 흡사한 전설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그리스신화에서도 전해진다.




오후 2시25분
해발고도 630m 지점에 위치한 작은굴목재에서 잠시 멈춘다.
장군봉에서 0.8km를 지난 지점이다. 이제 큰굴목재까지는 남쪽으로 1km를 가야한다.
평소 수많은 산행객들이 이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곳이건만 오늘은 인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눈에 덮인 숲속 공기가 무척 차갑게 느껴진다.

이곳 조계산에는 이곳 작은굴목재 외에도 일명 '선암굴목재'라고도 불리우는 큰굴목재,
그리고 송광굴목재 등 3곳의 굴목재가 있다.
굴목재를 이 부근 어르신들은 굴맥이재라고 부르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예언가가 이곳 지하로 '굴'이 뚫릴 '목'이라 하여 '굴목재'라 이름을 지었으며
이후 주암댐과 상사호 간의 통수로가 이곳 굴목재 지하로 뚫림으로서
그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아래의 얘기가 더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옛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굴목재 양쪽 사이의 골짜기인 장박'골'을
장박'굴'이라고 발음했다고 한다. 그리고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목'의 뜻도 가져와
발음의 편리상 '맥이'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굴맥이재로 표기해야 맞다고 한다.




작은굴목재에서 큰굴목재에 이르는 1km의 하산길은 완만한 경사의 개울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물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라 눈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내린듯하다.
키 작고 가느다란 조릿대 군락들은 두텁게 쌓인 눈의 무게에 힘겨워 울상을 짓는듯 여겨진다.




오후 2시30분
남향으로 이어지던 하산길은 해발고도 615m 지점의 큰굴목재를 지나며 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신평천을 따른다.
그리 넓지 않고 야트막한 신평천 물줄기는 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 위에 소복히 내려 앉은 흰 눈이 운치를 더해준다.
저 흰 눈들은 아마도 봄이 다가오는 2월말 이후 복수초나 보춘화 등 이른 봄 망울을 터뜨리는 꽃소식이 전해져야만
생명이 살아 숨쉬는 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얼어붙은 물가로 가까이 내려가 자세히 살펴보면 얼음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기도 한다.
물 한 모금을 떠서 목을 축이고 조금씩 땀이 배어나는 얼굴을 찬물로 씻는다.
지난 여름 삼복더위 때 지리산 자락 계곡산행을 하며 게곡물로 세수를 했을 때
뼛속까지 시릴 정도의 차가움을 느꼈건만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오늘의 이 물은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후 2시37분
똑같은 모양의 개울을 건너는 나무 다리를 세번 째 만난다.
숲속의 겨울 풍경을 가장 잘 모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다리의 이름이 '장박 1교'이니 이제 이곳 조계산자락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인 보리밥집이 가까왔음이다.




오후 2시45분
점심 때가 지난데다 강추위로 산행객이 적어서인지 항상 북적이던 보리밥집이 오늘은 조용하다.
해발고도 510m 남짓되는 이 지점에서 송광사까지는 아직 3.7km가 남았다.
수년래 매년 한차례 이상 조계산을 찾으며 몇차례 사 먹었던 보리밥. 오늘은 이미 점심을 먹었으니 생략한다.
2년 전 가격 그대로 보리밥 한 그릇에 6,000원. 야채전,도토리묵,동동주,솔잎주 등도 판다.

혹자는 이곳이 불법, 또는 무허가가 아닌지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이 식당은 자연공원법상 자연취락지구내에 위치한 곳으로
도립공원 행위허가(점용허가;99.8.26), 건축물 사용승인(2000.7.4),
식품접객업 영업허가(2002.2.18)를 받아 합법적으로 상행위를 하고 있다.




오후 3시1분
보리밥집을 지나 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은 다시 완만한 오르막 경사길로 이어진다.
산행로 옆에서 산행객들을 위한 아담한 대피소 겸 휴식터 옆을 지난다.

해발 600m지점의 이 대피소는 "배도사(裵道士)대피소"라는 이름을 얻은 곳이다.
1983년 경 지어진 이 대피소에 오래 전 한 때 긴머리 수염에 훤칠한 체격을 가진
배(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서 기거한적이 있는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풍수와 사주에도 일가견이 있는듯한 그 사람을
기억하던 이들에 의해 세월이 지나면서 "배도사대피소"가 되었다 한다.




오후 3시15분
보리밥집을 지나 30여 분동안 이어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이건만
4시간 가까이 이어진 눈산행은 다리에 피로감을 안겨준다.
송광굴목재로 이어지는 막바지 오르막에서 많은 이들이 힘에 겨워한다.
하지만 저 고개를 넘어야만 송광사에 다다를 수 있고, 송광사를 지나야만 안락한 내 집으로 귀가할 수 있음이다.




오후 3시16분
송광사까지 2.5km를 남겨둔 지점인 송광굴목재에서 잠시 뒤처진 일행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한다.
여러 해 전부터 누차 이곳을 찾으면서 오늘처럼 인적이 전혀 없었던 날은 처음이다.
항상 산행객과 관광객들로 붐비던 곳인데 마치 딴세상에 온듯하다.

'재'란 고개를 이르는 말인데, 이처럼 '재'에 멋진 표지석을 세운 경우는 드물다.
이곳 조계산의 최고봉인 해발 884m 장군봉보다 이곳 '송광굴목재'와
선암사쪽에 가까운 큰굴목재(선암굴목재),작은굴목재가 송광사-선암사를 잇는
산행길에서 더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지석에 해발고도 720m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인듯하다.
산행시마다 휴대하는 고도계는 해발고도 660~670m 를 가리킨다.
해발고도 884m인 장군봉에서도 휴대한 고도계와 이상이 없음을 학인했으니
고도표시가 잘못된 것이라면 고치는게 좋자 않을까 한다.




오후 3시40분
바위가 거의 없는 전형적인 육산인 조계산에서 이런 형태의 바위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대부분 산행객들은 이 바위 옆을 무심코 지나친다. 이 바위의 이름은 "걸친바위"이다.
2년 전 이곳을 지날 때는 안내판을 보았지만 오늘은 안내판이 눈속에 묻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일부 등산지도에는 '지댄바위'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지댄'이란 의지하다는 의미의 '기댄'의 전라도 사투리이다.
옛날 조계산에 살던 스님들을 시기하는 마군들이 송광사와 선암사를 왕래하는 스님들의 길을 막기 위해 큰 바위를 굴렸고
이를 막기 위해 도승이 굴린 돌이 큰 바위를 괴며 길 막는 것을 막아낸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길을 막으려다 괸 돌에 걸쳤다하여 "걸친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후 3시55분
토다리 삼거리를 지난다. 이제 송광사까지 남은 거리는 1km 남짓이다.
해발고도가 300m 를 조금 넘는 이 지점에서 북동쪽으로 갈라지는 산행로를 따르면
피아골을 따라 장군봉 남서쪽의 연산봉으로 향하게 되는데, 2년 전 이맘 때 그 피아골을 따라 산을 오르며
여순반란사건 무렵부터 6.25까지의 기간동안 무장공비들이 아지트로 이용했다는 '국골 공비굴'앞을 지난 기억이 새롭다.




오후 4시6분
산길이 끝나고 편안하고 넓은 길로 들어서며 편백나무 군락을 지난다.
최근 전국 곳곳에서 편백나무에 대한 인기가 날로 상승한다.
사람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내뿜는 나무가 편백나무로 일본인들이 특히 '히노끼'라 칭하며 아주 좋아한다.
이에 편승하여 요즈음 악덕 묘목업자들이 값싼 '측백나무'를 편백나무라고 속여 판매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이 편백나무와 값싼 측백나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열매가 달려 있으면 구분하기가 쉽지만, 사철 녹색으로 빛나는 잎으로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이 사진은 편백나무 잎 뒷면을 찍은 사진이다.
측백나무와 앞면으로는 구분이 어렵지만 편백나무 뒷면은 흰색으로 알파벳 "Y"자 표시가 선명하다.




이 사진은 편백나무에 비해 값이 아주 싼 측백나뭇잎 뒷면이다.
알파벳 "Y"자가 선명한 편백나뭇잎과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나라 3대사찰의 하나로 승보종찰이자 조계총림인 대사찰 송광사는 살림살이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쓰기 좋게 토막난 장작더미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할텐데 처마 밑에서 잘 말라가는
우거지인지 시래기인지 명확치 않은 국거리가 군침을 돋운다.




처마 밑의 것을 망원렌즈로 가까이 당겨 보니 우거지인듯 하다.
우거지와 시래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배추잎을 뜯어 말린 것이 '우거지'인데, '윗가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며
무청을 엮어 말린 것을 '시래기'라 한다.
우리가 이처럼 우거지와 시래기를 즐겨 먹는 이유는
배추의 속잎보다 겉잎에, 그리고 무우보다 무청에 카로틴 등 영양성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지난 해 가을 울창한 댓잎으로 뒷편이 전혀 보이지 않던 대숲도 겨울철을 맞아 댓잎들이 많이 떨어져 황량한 모습이다.

대나무를 한자로는 죽(竹)이라고 한다.
주로 열대지방에서 자라던 대나무가 북방으로 옮겨질 때 명칭도 중국 남방음이 따라 들어왔다.
‘竹’의 남방 고음이 ‘덱(tek)’인데 끝소리 ‘ㄱ’음이 약하게 되어
한국에서는 ‘대’로 변천하였고 일본에서는 두 음절로 나누어져 ‘다케’로 되었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이 피지 않지만, 필 경우에는 전 대나무밭에서 일제히 핀다.
대나무의 꽃은 대나무의 번식과는 무관한 돌연변이의 일종으로 개화병(開花病) 혹은 자연고(自然故)라고도 한다.
개화 시기는 3년, 4년, 30년, 60년, 120년 등으로 다양하며, 대나무 밭 전체에서 일제히 꽃이 핀 후 모두 고사한다.




오후 4시17분
새해 첫날을 맞아 온천지를 뒤덮은 흰 눈을 말끔히 쓸어내어 깨끗하게 정돈된 송광사 대웅보전 앞에서 잠시 멈춘다.
이곳 송광사는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이곳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인 1200년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한다.




송광사의 주 불전인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서도 보기 힘든 우람한 건물이다.
정면 7칸,측면 5칸의 아자형(亞字形) 건물이다.
화려한 다포식 공포를 조합하여 평면이 아(亞)자를 이루는 팔작지붕 건물로 지난 198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송광사의 일주문인 '조계문'을 나서며 송광사 경내를 벗어난다.
대부분 사찰의 경우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일주문은 경내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며
이와같은 담이 없이 거의 외로이 서 있다. 이 송광사 일주문의 경우 아주 특이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 일주문은 최초에 신라시대에 지은 이래 1310년,1464년,1676년, 그리고 1802년에 고쳐 지었다는데,
건축 양식으로 보아 현재의 일주문은 180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얘기다.




 일주문을 나서면 좌측으로 수많은 부도탑으로 이루어진 부도군(浮屠群)이 나타난다.
이곳 송광사가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법보(法寶)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로써
고려시대 이후 16국사가 배출된 승가의 대표적 승보(僧寶)사찰임을 한 눈에 보여 준다.




부도탑이 끝나는 지점 길섶의 이끼 낀 바위 하나에서도 오랜 역사의 흔적이 엿보인다.
칙령(勅令) 이라는 글씨도 보이기는 하나 이하영,김규석,조병지 등 한자로 음각되긴 했으나 주로 사람 이름이다.
요즘처럼 사진이라는 기록매체가 달리 없던 시절의 시쳇말로 '인증샷'쯤 되지 않을런지...




부도탑 맞은 편 길 옆에는 돌 비석 하나가 뭍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
수레를 탄 사람은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이다. 즉 신성구역을 뜻하는 경계비인 것이다.

하마비의 연원은 아마도 1413년(조선 태종 13년) 왕명으로
종묘, 그리고 궐문 앞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긴 경계석을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게 했던 것일게다.




송광사를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신평천변을 따르는 편안한 산책길이다.
일주문에서 400m 정도 지나온 지점의 신평천을 건너는 다리에는 이와같은 누각이 세워져 있다.
송광사로 향하는 전면의 현판은 '청량각'이지만 뒷편의 현판은 '극락교'이다.
이 청량각이 세워진 누각 아래 다리 이름이 '극락교'이기 때문이다.
이 극락교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행기다리'라 부르는데
이는 석조 구름다리인 '홍교'에서 '행교'-'행기'로 부름이 변한 것이다.




오후 4시32분
5시간여에 걸친 조계산 눈산행을 끝내고 귀가 차량이 기다리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거의 매년 한번 이상씩 이곳 조계산을 찾아 서쪽 송광사에서 동쪽 선암사로 하산했으나
오늘은 평소와 다른 구간으로 산행을 마쳤다. 행복감을 느끼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곳 조계산은 서쪽의 송광사와 동쪽의 선암사라는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이
자리 잡은 명산이다.
산행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장군봉까지 오르지 않고 둘레길만 걸어도
송광사에서 선암사까지 4~5시간이면 충분한 구간이다.




위 지도상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구간이 이날 산행 구간이다.